고장 난 회사 파쇄기에게 바치는 헌정글
사무실 파쇄기가 고장 났다. 시작 버튼을 누르면 한참 뒤에 작동하고, 또 종이를 마구 뱉어내더니 마침내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하얀 종이가루가 눈발 날리듯 휘날렸다. 산산이 흩어진 종이가루를 보니, 나 좀 알아달라 울부짖는 것 같았다.
투입된 종이 양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무뎌진 칼날에 더 이상 종이를 자를 수 없었겠지. 혹은 세상에 공개되어선 안 되는 것들을 더 이상 삼켜낼 수 없어 되려 뱉어낸 걸 수도. 그동안 꾸역꾸역 종이를 삼켜내던 파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회사에서 가장 똑똑했던 건 파쇄기였다. 혼자만 삼켜내던 수많은 정보들. 사람들 저마다의 글씨체, 말투, 문서 스타일, 업무 일정까지 모든 걸 알고 있었겠지.
독불장군처럼 꾹 참고 비밀을 지켜내느라 힘든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중에는 나 역시 꽤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나는 작은 포스트잇에 적어둔 메모조차 파쇄하곤 했으니까. 나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사건건 글로 쓰고, 또 속마음을 들킬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은 파쇄기에게 '천적'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다른 부서 선배한테 우리 층 파쇄기가 고장 났다고 알려주었다. 선배는 사람들이 얼마나 종이를 욱여넣었길래 그 단단한 기계가 고장이 나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게요, 하며 다들 숨기고 싶은 게 많은가 보다고 덧붙였다.
회사에는 보안 파기 업체가 업무용 문서를 파기하러 한 달에 한 번 꼴로 방문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동안 어디에 숨겨놓았는지도 모르겠는, 구석구석 묵혀둔 문서들을 박스째 실어 날랐다. 파쇄기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은 한 달을 참지 못하고 양손 가득 파쇄기를 찾아가곤 했다.
다들 파쇄기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지 않았을까.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되는 것들. 사무실, 부서, 책상에서만 읽고 끝내야 하는 것들. 위압감과 중압감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파쇄기를 보며 나 역시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끼곤 했으니까.
선배는 감정 없는 기계도 업무 과다(사실상 종이 과다)로 고장 나는데, 고장 나지 않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말했다. 고장 날 법하면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어 일을 시키고, 또 어떻게든 일하기 위해 몸뚱어리를 고쳐 쓰니 참 이상하다면서.
나는 또 그러게요, 허허. 하면서, 웃고, 울고, 슬프고, 행복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쯤 되면 고장 날 법도 한데 지구가 자전하듯 그냥 당연하게 굴러가는 게 이상하다고 말했다.
기계는 고장 나는데 사람은 고장 나지 않는 세상. 정확히는 고장 나면 안 되는 세상. 아이러니했다.
아무튼 결론은 파쇄기라도 해방되어 참! 다행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들을 지켜내 주어 고맙다고, 그동안 홀로 견뎌내느라 고생했다고 말해주어야겠다. 물론 조만간 새로운 파쇄기가 탕비실에 놓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