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공화국의 탄생 / 박정희공화국 : 정치
- 박정희공화국의 탄생 :4·19 그리고 5·16
이승만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시작했다. 해방되고 처음으로 구성된 정부에서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뿐 아니라 정부의 정통성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국회에서 구성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탄압하고 해산시켜 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때가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 당시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을 해서 친일파를 벌주고, 재산을 몰수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기회주의자들이 판치거나, 친일이나 권력에 빌붙은 사람들이 기득권을 행사하는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아 있다.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고 정의와 원칙보다는 기회주의자들이 큰소리치는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듯해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1960년에 일어난 4·19는 ‘미완의 혁명’이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깨닫게 되는 소중한 첫걸음이었다. 그 당시 17살 고등학생 김주열이라는 이름은 기억하고 가자.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 시위 중 사라졌던 김주열 군이 27일 만에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관통한 채로 어부에 의해 발견된다. 이를 부산일보가 보도하게 되고,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및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은 전반적으로 무능했다. 농지개혁 말고는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긴 것이 없다. 제1공화국과 더불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3번의 대통령 임기 동안 폐허가 된 강토도, 피폐한 국민의 삶도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는 하야를 맞이했다. 그 빈자리를 민주당이 차지했지만, 민주당도 구파와 신파가 싸우기 바쁜 나머지 국민의 삶은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그 틈을 막강한 군대의 힘을 등에 업은 박정희 소장이 무혈입성하듯 정부 요직을 장악했다. 1961년 5월 16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자, X세대에게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장악한 것이다. 우리 X세대는 이 사람이 새로 재건한 국가에서 자라고, 배우고 길들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정희는 그의 나이 43살에 혁명을 꿈꾸었다. 사실 꿈은 몇 해 전에 꾸었지만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이 1961년 5월 16일, 그의 나이 43살 때였다.
누가 보아도 쿠데타였지만 그를 포함한 주체세력은 이를 ‘혁명’이라 했다.
그럼 주체세력이 내세운 혁명공약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여섯 번째 있는 혁명공약은 결국 지키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과업이 성취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자신보다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후 의장직을 맡으면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수차례의 약속을 번복하며 시간을 끌어오던 박정희는 1963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해서 스스로 민간인이 되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그해 12월 윤보선 후보를 1.5% 간발의 차로 이겨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어찌 되었건 정통성을 부여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5번의 대통령과 16년이라는 철권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전의 양면 같은 사람이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 어떠한 철학이나 가치관을 가지냐에 따라 호불호(好不好)가 확실히 달라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 이것은 줄다리기의 굵은 밧줄처럼 양쪽이 힘껏 잡아당겨도 절대 끊어지지 않고, 승부도 알 수 없는 논쟁으로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足跡)을 남긴 인물이자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박정희공화국 : 정치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 5월 16일부터 그가 사망하기까지 대한민국은 ‘박정희공화국’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집권을 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오로지 박정희가 원하는 데로 굴러갔다.
앞서 이야기했듯 박정희라는 인물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좋고 나쁨을 떠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조금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군정(軍政) 포함 18년 5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했으며,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대한민국을 이끌었으며, 5·6·7·8·9대에 걸쳐 5번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1961년 5월 16일에는 ‘군사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잡았고, 1972년 12월 27일에는 ‘친위쿠데타’를 통해 종신집권을 꿈꾸었다. 그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의 대한민국과 그가 1979년 10월 26일 흉탄에 의해 사망한 후의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이었다.
그의 꿈과 욕망, 그리고 과오(過誤)가 모두 대한민국 역사뿐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낸 사람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그로 인해 수혜를 입은 사람도 아무 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할 때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경제적인 부분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은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할 것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평가하는 사람들은 최악의 지도자로 평가할 것이다.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경제는 ‘근대화(近代化)’를 정치는 ‘군대화(軍隊化)’를 이룬 장본인이다. 그만큼 개인이 가진 가치관에 따라 엇갈린 평가를 하고 또한, 세대나 지역에 따라서도 호불호(好不好)가 확연하게 구분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이끌었던 대한민국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5·6·7대 대통령을 했던 3 공화국과 8·9대 대통령을 했던 4 공화국, 경제적으로는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기와 제3·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X세대에게는 X세대가 태어나기 전의 대한민국과 X세대가 태어나기 시작한 대한민국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시기는 X세대가 태어난 시기인 동시에 X세대의 부모세대가 경제발전의 주축이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X세대의 부모세대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 거의 전부를 박정희와 함께 보냈다. 즉 박정희를 비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젊은 시절의 고생과 열정을 부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이 시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정치적인 상황이 어찌 되었건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 가난에서 해방되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는 산업화세대, 즉 X세대의 부모세대가 지닌 자존감 같은 것이다. 현재 나타나는 정치성향에서 보듯 X세대와 그들 부모세대와의 정치적 괴리감은 지금까지도 꽤 크게 존재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개인의 삶을 희생하면서 뼈 빠지게 일해서 대한민국을 이 정도 만든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1) 박정희 군정 그리고 제3공화국
해방 이후 한반도는 두 번의 군정을 겪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해방 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3년 동안 ‘미군정’에 의해 통치를 당했고, 또 하나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날로부터 군사쿠데타 주역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2년 7개월간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통치기구를 만들어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모두 행사하는 군정을 실시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약속을 몇 번 번복한 후에 결국 본인이 민간인이 되어 본인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로 인해 군정이 끝나고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이다.
제3공화국 헌법 전문에는 제헌헌법에 수록되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를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 한다는 내용이 없어지고 “4·19 의거와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X세대에게도 4·19는 의거이고 5·16은 혁명이라고 배운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고, 국민에 의한 직접선출과 4년 중임제를 채택하였다.
그의 나이 45세가 끝나갈 무렵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1963~1967)에 취임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혁명공약에서 약속한 것처럼 경제문제에 많은 힘을 쏟았다. 서독에 광부·간호사 파견, 베트남전 파병, 그리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해서 만든 국가의 시드머니(Seed money)를 활용해 각종 경제정책과 경제개발에 힘쓴 시기였다. 대한민국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통치기반 마련을 위한 간첩 조작과 인권유린, 경제개발 명목하에 수많은 국민의 희생, 굴욕적 외교 등의 문제점도 많이 남겼다.
1967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6대 대통령(1967~1971) 시기에 그는 경제발전에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 경부고속도로를 2년 5개월 만에 건설하고, 포항종합제철을 착공했다. 새마을운동을 ‘농촌계몽운동’에서 전국의 계몽운동으로 확대함으로 인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였다. 반면 경제개발 이면에는 노동자나 빈민 등 사회 약자들은 수없이 많은 고통과 착취를 당해야 했으며, 북한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아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헌법에 있는 대통령 4년 중임제였다. 1969년 대선을 1년 반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당시 여당이자 절대적인 다수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변칙적인 방법으로 ‘대통령 3기 연임 허용’이라는 3선 개헌을 단행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또다시 대통령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결국 이승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71년에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이라는 다크호스가 박정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무원동원·금품 살포·군 부재자 부정투표 등 수많은 부정선거를 하고도 박정희 대통령은 겨우 8% 차로 제7대 대통령(1971~1972)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전 압도적인 의석수 차와는 다르게 겨우 4.4% 차이로 신민당을 이겼다. 이 선거의 결과는 그에게 상당히 충격이었으며 제4공화국 탄생의 빌미를 제공한 선거가 되었다.
2) 제4공화국 그리고 10·26
X세대는 대부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암흑기에 태어났다. 그 이전 이후로도 이보다 더한 암흑기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신(維新)이다.
유신(維新)의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 따위를 고쳐 새롭게 함’이다.
그렇게 제4공화국은 유신헌법과 함께 탄생했다. 제4공화국은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시행된 1972년 12월 27일부터 1981년 2월 24일까지이다. 이 시기 박정희는 8·9대 대통령을 지냈고, 그가 살해되자 최규하가 10대 대통령, 그리고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을 지낸 시기이다. 모두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간선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의해 쓰러지는 10·26까지 살펴보려 한다.
제7대 대선과 제8대 총선에서 박정희는 쓰라린 승리를 맛보았다.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 3선까지는 성공했지만, 이후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임기가 끝나는 4년 뒤까지 기다리지 않고 장기집권에 대한 계획을 미리 세웠다. 제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X세대라면 시험에 꼭 나온다며 달달 외웠을 평화통일 3대 원칙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기억할 것이다. 1972년에 남북이 최초로 합의해서 발표한 ‘7·4 남·북 공동성명’이다. 이후에도 언급하겠지만 1·21 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실미도사건 등 전쟁이 언제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남과 북이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을 때, 박정희와 김일성을 대리한 정권의 실세는 북한과 남한을 오가며 상대의 국가지도자와 만나서 면담을 하고, 밀실에서는 긴밀한 협상을 하고 있었다. 여하튼 국민은 하루아침에 통일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었고, 극과 극으로 대립하던 두 지도자는 처음으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시험에 나온다며 달달 외웠던 내용은 이후 완전히 헛일이 되어 버렸고, 공교롭게 1972년 12월 27일 같은 날, 남한에서는 유신헌법을 공포·시행했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해 양 지도자는 종신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럼 남한에서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자.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통일국가를 만들기 위한 명분을 만들었다. 이 명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특단(特段)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그럼 1972년 10월 17일에 있었던 대통령 특별선언의 내용을 보면서 국어 공부를 해 보자. 한번 읽어 보면서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을 찾아보기 바란다.
대통령 특별 선언(1972.10.17.)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進運)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 지난 7월 4일에는 역사적인 남북 공동 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습니다. ·······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극 체제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이에 나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면서 오늘의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일대 민족 주체세력의 형성을 촉진하는 대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약 2개월간의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하여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
서울 한복판에 탱크를 주둔시키고 언론사와 주요 기관에는 군 병력을 투입시켜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만든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친위쿠데타를 다시 일으킨 것이다. 열흘 뒤 미리 준비해 둔 유신헌법을 국회가 아닌 비상 국무회의에서 심의하고 11월 21일 91.5%의 압도적 찬성으로 국민투표를 통과한 뒤 12월 27일 공포·시행하게 된다.
유신헌법의 주요 부분만 살펴보자. 이제는 수학공부 할 차례이다.
-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을 뽑는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한다.
-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는다.
-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누구나 비슷한 답을 찾았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으로 대한민국은 국민의 힘으로는 절대 정권을 교체할 수 없는 독재국가로 거듭난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유신헌법의 핵심이며 박정희 18년 철권통치의 끝판왕을 만나볼 차례다. 흔히 ‘긴조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긴급조치이다. X세대는 태어나기 전이거나 태어났더라도 시대 상황을 느낄만한 정신적·신체적 나이가 되지 않았기에 피부에 직접 와닿지는 않을 것이다. 긴급조치에 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이 주요 내용만 기술할 터이니 각자 어떤 시대였는지 짐작해 보시기 바란다.
긴급조치 1호(1974년 1월 8일 시행)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처단한다.
긴급조치 4호(1974년 4월 3일 시행)
전국 민주청연학생 총 연맹(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제단체(이하 ‘단체’라 한다)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동 또는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회합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도서·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5.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관계자 지도 감독하의 정상적 수업, 연구활동을 제외한 학교내외의 집회·시위·성토·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적 행위를 금한다. 비정치적 행위는 예외로 한다,
6. 이 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7. 문교부장관은 대통령 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기타 학생 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 처분을 할 수 있다.
8. 제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7항에 의한 문교부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 7호(1975년 4월 8일 시행)
고려대학교에 대한 휴교와 교내에서의 일체의 집회 시위 금지
75년 4월 8일 하오 5시를 기해 고려대학교 휴교를 명한다.
동 교내에서 일체의 집회, 시위를 금한다.
제1·2호를 위반한 자는 3년 이상 1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
긴급조치 9호(1975년 5월 13일 시행)
다음 각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공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서,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관여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2. 제1항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 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 판매, 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
5.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 위반자, 범법 당시의 그 소속학교, 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다음 각호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가.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 임직원, 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
나. 대표자나 장, 소속 임직원, 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조치
다. 방송, 보도, 제작, 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 조치
라. 휴업, 휴교, 정간, 폐간, 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
마. 승인, 등록, 인가, 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 조치
.......
정말 입만 뻥긋해도 징역을 살거나 사형까지 시킬 수 있다는 엄포를 놓고 있다. 게다가 가담하지 않고 방조만 해도 책임을 엄하게 물고, 지금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결사·표현의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조치가 유신헌법의 보호 아래 이뤄지고 있었다. 그 시절 어린아이들은 울음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도록 부모는 어린아이들을 달래기 바빴다.
더불어 유신헌법과 같은 날 채택되었던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을 조금만 살펴보자.
제89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한다.
제93조 주석은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되며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한다.
제101조 중앙인민위원회 수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다.
제103조 중앙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
3. 사법·검찰 기관사업을 지도한다.
4. 국방 및 국가정치보위 사업을 주도한다.
5. 헌법, 최고인민회의 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명령, 중앙인민위원회 정령·결정·지시 집행정형을 감독하며 그와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지시를 폐지한다.
·······
위에서 보다시피 국가주석제를 신설해 모든 권한을 주석에게 집중시키고, 김일성 자신이 주석이 되었다. 어찌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다며 만든 남의 ‘유신헌법’과 북의 ‘사회주의헌법’에 심한 구린내가 나는 것 같지 않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권력을 쉬이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목숨을 건 정치투쟁으로 쟁취한 권력자일수록 더욱 그러한 경향이 강했으며, 이는 곧 독재자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정희는 서로 죽일 듯이, 때로는 실제로 죽이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최고 권력자로서 서로 교감하는 부분이 있은 듯하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1972년 12월 27일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고, 같은 날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 의해 신설된 국가 주석에 취임하게 된다. 이는 모두 절대 권력자가 됨과 동시에 종신집권을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