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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X세대론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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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Sep 25. 2024

3-2. 박정희공화국Ⅱ

경제 / 사회 /주요 사건

박정희공화국 경제     

혁명공약 네 번째는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되어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 세계는 피폐해져 있었다. 빨리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는 것이 각 나라의 시급한 과제였다. 그나마 근대화에 성공한 열강들은 덜 했지만,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 식민지배를 받았거나 국토를 전장으로 내어준 국가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식민지배에 전쟁까지 겪었으니 나라 사정은 불을 보듯 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잘 읽은 듯하다. 수단과 방법, 과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국민에게 “그래도 덕분에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평가는 대체로 듣는 편인 것 같다. 나 또한 부모세대들에게 많이 듣고 자랐다.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부모세대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장기적인 계획하에 나라 경제를 운영했다. 이전 정부에서도 경제개발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허지 부지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답게 추진력이 있었고, 꼼꼼하기도 했다.      


그럼 시기별로 살펴보자.

1.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71)

이 시기의 중요현안은 1차 때는 농업 생산력 증대, 에너지 확충, 기간산업 및 사회간접자본 확충, 수출증대, 기술개발 등을 중점으로 이루어졌고, 2차 때는 식량 자급, 산림녹화, 공업고도화, 가족계획에 의한 인구억제, 국민소득 증대, 인적자원 개발 등으로 요약된다. 1962년 6월 화폐개혁으로 국내자본을 끌어내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가난한 나라에 그럴만한 돈이 나라에도 국민에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국내자본을 이용한 경제개발의 한계를 느낀 정부는 결국,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서 자본을 조달한 것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가 있었고, 1963년부터 7800명이 이르는 건장한 청년은 독일 광산으로 가서 어둠의 막장에서 사투를 벌이며 일했으며, 1966년부터 1만 명에 이르는 간호사 또한 독일로 가서 갖은 험한 꼴을 보며 일해야 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베트남파병은 전장에서 목숨값으로 외화벌이를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업적으로는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1970.07.07.)가 건설되었고, 포항종합제철 착공(1970.04.1.)을 시작했으며, 수출 1억 달러 달성(1964년), 수출 10억 달러 달성(1971년) 등이다.


2. 제3·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81)

먼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기는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한 획을 그은 시기이다. 

중화학 공업화가 추진됨으로 인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후 1980년대 중화학공업이 정상궤도에 올라서면서 한국 경제는 부가가치가 높은 고도성장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제4차 때는 성장·형평·능률의 기조를 내세웠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앞만 보고 내달리던 폭주 기관차 같았던 대한민국 경제에 처음으로 형평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경제성장의 희생물이면서 대한민국 경제의 제일 밑을 받치고 있던 노동자들의 죽음과 희생이 만들어낸 눈물겨운 결과였다. 여하튼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전 세계 불황에서도 중동의 건설 붐과 수출급증에 힘입어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게 되었다. 놀라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보고 외신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주요 업적으로는 새마을운동 본격 시작(1972년), 포항종합제철 준공(1973년),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1974년), 국산 1호 자동차 ‘포니’ 생산(1975년), 쌀 완전 자급자족 달성(1976년), 고리 원자력 1호기 점화(1977년),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수출 100억 달러 달성(1977년) 등이 있다.      


 X세대는 중화학 공업화가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한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국가는 경제가 발전하는 만큼 그에 맞는 인력이 필요했다. 도시마다 지금은 ‘폴리텍대학’이 된 직업훈련원을 만들고, 실업계고등학교를 늘렸다. 인문계라고 일컬어지는 고등학교서도 취업반이 생겼으며, 문과반이 1~2반이면 이과반은 10반이 넘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진로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고 국가가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해 주면 장기집권을 한다거나 인권을 탄압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무덤은 자신이 판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유인즉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좀 더 높은 차원의 욕구 해결을 원하게 되는데, 이것이 자유이고 민주화이며, 독재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종신집권의 탐욕에 매몰되어 국민의 욕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함으로써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박정희공화국 사회

박정희공화국에서 일어났던 일 중 현대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나, X세대에게 영향을 끼친 사건들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1) 반공이 국시(國是)이다.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

혁명공약 첫 번째를 기억하시는가? 

그렇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로 되어있다. 5·16 쿠데타 군부도 반공을 국시로 삼았지만, 이후 등장한 12·12 군사반란의 신군부도 반공에 있어서는 열성이었다. X세대는 반공에 관해서는 어릴 적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이전에도 북한은 수시로 간첩을 남파해 왔지만 1968년은 목적이나 규모 면에서 좀 더 담대한 간첩 작전을 펼쳤다.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 31명이 청와대 300m 부근까지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1·21 사태’ 또는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며칠 뒤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이야기했다. 

김신조의 이 말로 인해 대한민국은 병영국가로 거듭날 뿐 아니라 이때 만들어진 제도가 아직 남아 있거나 적어도 X세대에게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먼저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아마 X세대 남자들도 6~8년 정도의 예비군 기간을 지냈을 것이다. 간첩이냐 아니냐를 구분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가 생겨났다. 당시 처음 만들었을 때와는 주민등록번호체계가 조금 다르지만, 현재 X세대의 주민번호를 보면 성별이 무엇인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확인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열 손가락 지문을 국가에 보관하여야 한다. 이는 어찌 보면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또한, 대학과 고등학교에는 교련 수업이 도입되었는데 대학교는 1988년, 고등학교는 1994년까지 유지되었다. X세대 대부분은 고등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씩 제식훈련을 하거나 나무로 만든 총으로 총검술을 익히고, 여학생은 구급법을 배웠을 것이다. 군복무 기간도 육군 기준 6개월 연장되어 당시 병장은 하사로 전역하기도 했으며, 이는 10년 정도 지난 다음에야 원래 복무기간으로 복구되었다. 방위병도 이때 창설되어 1994년까지 존재했는데, 당시 우리는 ‘군복을 입은 채 도시락 싸서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되지 않아 북한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리고 북한의 1·21 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목따는 부대도 탄생했다, 우리에게 ‘실미도’라는 영화로 잘 알려졌지만, 실미도에서 훈련한 공군소속의 684부대, 육군의 선갑도 부대, 해군의 장봉도 부대, 해병대의 까치부대 등이 김일성의 목을 따거나, 북한의 주요 시설을 폭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실미도’ 영화에서 보듯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 김일성 목을 딸 기회를 놓치자 결국 보안 유지를 위해 684부대를 몰살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 이야기를 들은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을 죽이고 탈영해, 버스를 탈취한 뒤 청와대로 향했다. 버스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해 대부분 죽고 죽지 않는 사람도 결국 사형을 당했지만, 김일성 목따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에 의해 또다시 자신의 목을 따일 뻔한 아이러니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1월 23일에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피랍되어 83명의 승조원 중 1명이 죽고 82명이 북한에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간 120명의 무장공비가 울진·삼척 연안에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아홉 살이던 이승복은 자신의 집에 잠입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입을 벌려 대검으로 찢고 살해했다. X세대에게 이승복 어린이는 반공의 상징이었고, 모범적이고 본받아야 할 이상향이었다.

 이렇듯 1·21 사태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더욱 일사불란한 병영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 혁명공약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위에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이 자동으로 떠오르지 않는가?

 마지막까지는 아닐지라도 첫 문단까지는 X세대라면 대부분 기억이 날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자학하지는 말자. 뭐 그리 기억하고 싶은 문장은 아닌 듯하다. 그럼 전체를 한 번 천천히 읽어보자.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지금 읽어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에 만들어져 5차 교육과정 때까지 교과서 제일 앞부분에 인쇄되어 있었고, 아침 조회시간에 외우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의 시원한 매타작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학생 때부터 국가관이 어떡해야 한다는 것을 세뇌시키고, 국민이 국가의 일부분이며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운명이 민족의 사명이 되는 국가주의를 넘어 전체주의사고를 강요하고 있으며, 반공하지 않는 것은 애국이나 애족하지 않는 길이 되는 것이며, 근면하지 않으면 후손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학창 시절 내내 달달 외우고 자란 X세대가 지금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한 현상이지 않을 수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한번 외워보기 바란다. 

(1972년 이후 맹세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 6월 이후현행)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X세대는 첫 번째 맹세문을 시도 때도 없이 읊었다. 지금 읽어 보니 어떠한가?

 조금 거북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가? 

 조국과 민족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 했으며, 국기 하강식을 할 때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고약한 사람으로 취급받아야 했다. 

 두 번째 국기에 대한 맹세는 X세대가 외웠던 맹세문이 맹목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많아 2007년에 수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맹세문이다. 이 또한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

 X세대라면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청소를 하거나, 마을 곳곳을 고치거나 보수할 것이 있으면 부모님을 따라가 잔심부름을 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나도 어른들이 시멘트 반죽을 할 때 옆에서 물어 부어주거나 술이나 담배 심부름을 한 기억이 있다. 아마 X세대에게는 이런 비슷한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同)은 1970년 4월 박정희 정부가 농촌계몽 운동으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이야기하며 내세운 3대 정신이다. 

농촌계몽 운동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1972년 3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출범하면서 국가 차원의 전국적인 계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국기 게양대 옆에는 새마을기가 함께 게양되어 있었는데 녹색 바탕의 황색 원 안에 새싹 모양이 들어가 있었고 아래에는 ‘새마을’이라는 하얀색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체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후렴)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어릴 적 아침잠을 깨웠던 이 노래도 기억나지 않는가?

1972년에 만들어진 ‘새마을노래’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한 노래이다.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함이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대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나듯 국가를 위해 국민을 동원하거나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박정희 대통령이 해왔던 행적을 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 하거나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한 것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차가 달리고 있었고, 서울 땅 밑에는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었다. 공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마을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아오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X세대의 부모들은 정말 뼈 빠지게 일했다. 

여하튼 누구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 배가 고파서 울어본 기억은 없는 듯하다. 급기야 우리나라는 북한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후진국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이 되어있었다.           


경제성장의 빛바랜 자화상

급격한 경제개발이나 밀어붙이기식 경제개발에는 부작용도 있기 마련이다. 경제개발의 혜택을 받은 사람도 있고, 경제개발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있으며, 때로는 국가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되는 사람도 생기게 된다. 급격한 경제개발만큼 힘없는 국민의 삶은 더욱 옥죄는 현실이 발생했다.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만 살펴보자.


○ 한일기본조약

 한일기본조약은 1965년 6월 22일에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와 전후(戰後) 보상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체결한 조약이다. 조약은 한일 양국이 앞으로 잘해보자는 내용으로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문제가 된 것은 함께 진행된 청구권 협정이다. 1962년에 실시했던 화폐개혁의 실패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에서 돈을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 때 22억 달러의 일제 피해 금액을 요구해 일본으로 퇴짜맞고 진척이 없던 한일청구권 협정이 3억 달러라는 헐값에 체결되었다. 이는 피해당사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결정이기에 거센 국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 파독근로자

 파독근로자는 광부와 간호사, 간호조무사가 주를 이루었다. 박정희 정부에서 외화획득을 위한 목적으로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통해 파견되었다. 광부는 1963년부터 1978년까지 7,800명 정도가 파견되었으며, 간호사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 명 가까이 파견되었다. 광부는 막장에서 강도 높은 노동과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을 겪어야 했으며, 간호사는 식사 및 대·소변 수발부터 시체를 닦는 일까지 모진 일들을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외화는 고국의 경제개발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되었다.      


○ 베트남파병

 베트남파병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비전투요원 파견으로 시작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주둔 인원 5만 명 이상의 전투병이 파병되어 8년간 30만 명 이상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기도 했지만, 파병으로 인한 외화벌이 및 전쟁특수를 노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위한 ‘브란운각서(1966.03.04.)’에 명시되어 있듯 미국은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한다는 약속 아래, 파병 수당 및 경제원조·차관·전쟁물자 보급 등으로 외화벌이를 할 수 있었고, 기업과 노동자들도 베트남에 진출해 적지 않은 외화를 국내로 실어 날랐다. 실제로 베트남파병은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5000여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어야 했고, 1만 6000명에 달하는 수많은 부상자가 평생 고통과 함께 살아야 했다. X세대의 부모세대들이 대부분 참전했던 전쟁이니만큼 그 피해는 적지 않은 X세대에게도 대 물림 되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돈 벌러 베트남이나 다녀오지 왜 안 갔냐”며 투정을 부리곤 했다.

 앞에서 언급한 사건은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파독 광부로 일한 뒤 월남 노동자로 간 경우는 희박하긴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이나 현실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 생각된다.      


○ 와우아파트 붕괴와 광주 대단지 사건

경제개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전국 각지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몰려들었다. 인구는 급증하는데 서울은 그 정도의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무 곳이나 자리만 있으면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박정희 정부는 판자촌을 정리할 것을 서울시에 지시했고, 서울시는 판자촌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와우아파트도 그중 하나였는데 서울시는 낮은 가격으로 입찰을 하고, 공사 기간도 턱없이 부족하게 제시했다. 이에 건설업자는 지반공사도 하지 않고 기둥에 철근도 몇 개 넣지 않고 채 날림으로 공사를 했다. 봄이 되어 지반이 녹기 시작하자 곳곳에 균열을 드러낸 와우아파트는 급기야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면서 3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시는 무허가 판자촌 정리 계획 중 하나로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일대(현재 성남시 수정구·중원구)에 10만 명 규모의 대단지 거주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했다. 10만 명이 넘는 빈민들은 서울시의 말만 믿고 이주했지만, 막상 가보니 땅만 있고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교통편도 일자리도, 먹을 것도 화장실도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 토지 대금의 가격도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몇 배나 뻥튀기했다. 이에 참다못한 5만여 명의 빈민들은 1971년 8월 10일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놀란 정부는 광주 대단지(성남출장소)를 성남시로 승격하고,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회사에서 발령을 받아 ‘광주대단지(성남시 수정구) 사건’이 있었던 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처음 갔을 때 받은 느낌은 아주 오랫동안 보아왔던 낯설지 않은 동네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 동네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과 너무 닮아있었다. 6·25 전쟁 때 피난 내려온 사람들과 경상도 각 지역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부산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산꼭대기까지 집을 짓고 살 기세였고, 도시는 난잡하게 개발되었다. 성남시의 구도심인 수정구·중원구도 그러한 아픔이 있는 도시란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5) 탐욕에 묻혀버린 인권과 자유

북한의 존재는 최고 권력자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도 있지만, 국민을 통치하기에는 유용한 면이 있다. 시국사건이 일어나면 북한의 조정설이나 연계설이 나왔고, 이는 곧 간첩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정부에 비판하는 세력은 대부분 간첩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그중 역사상 최악의 간첩 조작사건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다, 

제1차 인혁당사건은 1964년, 앞서 언급했던 굴욕적인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6·3 항쟁이 일어나자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앙정보부는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발표한다. 당사자들은 숱한 고문을 당했지만, 이는 모두 조작인 것이 검사 수사로 인해 밝혀지고 대부분 공소 취하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문제는 10년 뒤 1974년에 발생한 제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이는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를 위해 유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10년 전 인혁당사건을 다시 들추어내 군법회의에서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대학생 외 8명에 대해서는 항소를 기각해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하고 18시간 뒤인 다음날 새벽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끔찍하다 못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국민의 생명 따위는 하찮게 여겨 무참한 국가폭력을 행사했다. 이는 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3년이 지난 2007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전원 무죄로 선고되었다. 

 

정당성이 부족한 정부이거나 독재화가 이루어진 정부일수록 언론탄압과 언론통제, 또는 각종 검열이나 단속이 늘어나게 된다.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박정희 혁명공약 세 번째 조항과 X세대가 어린 시절 지겹게 보았던 전두환 시절의 ‘정의사회구현’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 국민을 겁박하거나 인권을 유린해서 정통성 없는 정권의 안위를 지키는 데 사용했다.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유통을 불허한 책과 노래는 수도 없이 많아 헤아리기가 힘들 지경이었고, 이들은 별의별 이유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국민과 괴리되어야 했다. 사람·책·노래 등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가두어 두었고, 혹여나 이런 책을 읽은 사람은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거나 간첩의 혐의를 뒤집어써야 했다. 경찰들은 자를 들고 무릎에서 20센티미터 위로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를 단속했으며, 가위를 들고 다니면서 장발을 자르거나 응하지 않으면 즉결심판에 넘겼다. 대중가요의 거장 신중현의 경우는 정부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요구를 수차례 거절했고, 반항하는 의미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찬양한다는 의미로 ‘아름다운 강산’을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6) 노동자의 횃불 아름다운 청년전태일

전태일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너무 중요한 인물이라 좀 깊게 들여 다 볼 것이다. 그가 한국 사회에 던진 화두와 울림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전태일은 그의 몸을 빌려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불쏘시개가 된 인물이다. 태어나서 평생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 한번 제대로 자보지 못한 그가, 10대 초반의 어린 여공들이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과 각종 직업병에 시달리면서도 억지로 참고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까워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고 노동운동에 자신을 내던진다.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의 미명 아래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 했고, 인간다운 삶을 얘기하는 것은 국가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경제는 발전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지금부터 전태일의 고뇌와 울분을 따라가 보자.


근로감독관에게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씩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 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왔습니다. ······· 그들은 모든 생활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해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

존경하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이렇게 편지를 쓰고, 여러 차례 근로감독관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탄원서를 남겼지만, 전달이 되지 않은 편지이다.     


존경하시는 대통령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써 의류 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여 명이 됩니다. ·····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 또한, 2만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 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서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피 끓는 청년으로서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서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 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 어린 시다공 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 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전태일의 심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글인 것 같아 길게 싫었다. 어찌 전태일의 울분이 가슴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가?

전태일은 이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일기에서      

 

전태일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철벽 같은 세상에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았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 땅에 힘없는 노동자는 경제발전의 소모품일 따름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태우면서 전태일이 마지막까지 외친 말이다.

끝내 그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고, 어머니는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 이룰게”하고 답을 하였다. 

그가 마지막 눈을 감기 전 했던 최후의 말은 “배가 고프다·····”였다.

그의 나이 향년 22세였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 3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유지를 받들어 평생을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이 땅의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박정희공화국 주요 사건     


1961.05 5·16 군사쿠데타 발생

            국회·지방의회 해산, 전국에 비상계엄령 공포 및 군사혁명위원회 구성(05.16)

            군사혁명위원회, <혁명공약>, <11개 포고문> 발표(05.16)

            군사혁명위원회,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05.20) - 혁명내각 구성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 제6호 공포(05.22) - 정당 및 사회단체 강제 해산

            국가재건최고회의, 각 도지사 및 9개 시장 발령

1962.01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62.03 윤보선 대통령 하야(03.22)

            빅정희 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03.24)

1962.11 김종필·오히라 외상회담(11.12) - 대일청구권 문제 합의

1962.12 제5차 헌법개정안 공포(12.26) - 대통령직선제 환원(임기 4년, 1차 중임)

1963.02 민주공화당 창당(02.26)

1963.12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12.17) - 제3공화국 출범

1964.06 한일회담 반대 시위(6·3 항쟁) - 비상계엄 선포

1964.08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 사건 발표(1차 인혁당사건)

1965.06 한일협정 조인(06.22)

1965.10 ‘맹호’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10.16)

             가족계획 사업 시작

1966.08 금성사, 국내 최초 흑백 TV 생산

1966.10 간호사 251명, 서독에 첫 파견(10.02)

1967.0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67.05 제6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당선(05.03)

1967.06 7대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06.08) - 공화당 129석, 신민당 45석(3선 개헌 목적 부정선거 자행)

1968.01 북한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사건(01.21) - 김신조 생포

1968.02 경부고속도로 착공(02.01)

1968.04 포항제철주식회사 설립(04.01)

            국방부, 전국 고교·대학생에 주 3시간 군사훈련 실시 결정 - 1.21 사태로 도입

1968.05 주민등록법 개정(05.29)

1968.09 1·21 사태로 <주민등록법 시행령 개정안> 결의 - 주민등록번호 부여

1968.12 국민교육헌장 선포(12.05)

            이승복, 무장공비에 피살(12.09)

1969.01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 제정(01.16) 

1969.09 민주공화당, <3선 개헌안><국민투표법안> 변칙 통과

1970.04 서울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 사망 33명, 부상 40명

            ‘새마을 가꾸기 운동’ 실시

1970.07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1971.04 제7대 대통령선거 실시 – 박정희 당선(53.2%), 김대중(45.2%)

1971.05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 –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

1971.08 ‘광주대단지’ 사건 발생

1971.12 박정희대통령, 유신체제를 위한 국가비상사태 선언

1972.03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출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 – 대통령에 긴급조치권 부여

1972.05 이후락 중정부장 평양 극비 방문, 북한 박성철 부수상 서울 방문

1972.07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08 ‘국기에 대한 맹세’ 제정 – 전국 학교에 시행 

1972.10 <10월 유신> 발표, 국회 해산 및 전국 비상계엄 실시      

1972.11 <유신헌법> 국민투표(투표율 91.09%, 찬성 91.5%) 

1972.12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 의장 박정희선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8대 대통령으로 박정희선출(2,359표 중 2,357표 찬성, 무효 2표)

            북한, 국가주석제 신설 및 김일성 국가주석으로 선출

            <유신헌법> 공포 및 시행

            북한, <사회주의 헌법> 채택

1973.08 일본 도쿄서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1974.01 긴급조치 1호(헌법논의금지), 2호(비상군법회의 설치) 발효

            긴급조치 1호 위반 장준하·백기완 구속

1974.04 긴급조치 4호 발효(민청학련 활동금지, 학생 집단행동 금지)

1974.07 군법회의, 2차 인혁당사건 관련 8명 사형선고(2007년 재심서 무죄선고) 

1974.08 육영수여서 피격 사망(08.15)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1975.05 긴급조치 9호 발효(유신헌법 비방·반대·개정 주장 금지)

1978.07 통일주체국민회의, 제9대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 선출(찬성 99.09%)

1978.10 국기하강식 실시(~1989.1.22.)

1979.01 만화영화 ‘똘이장군’ 제3땅굴 편 개봉

1979.08 YH무역 강제진압 중 김경숙 사망

1979.10 부마항쟁 발생(10.16~10.20) - 유신반대운동

            박정희 대통령 사망, 김재규 중정부장에 총격 피격(10.26)

1979.12 최규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

            전두환 보안사령관 주도 12·12 군사반란 발생(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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