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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X세대론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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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Sep 25. 2024

3-3. 전두환공화국

X세대 거의 모두가 세상에 태어났던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까지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역사적인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10월 16일 부마항쟁으로 시작된 정국은 열흘 뒤 10월 26일 박정희사망이라는 18년 통치의 절대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사태를 겪게 되고, 뒤이어 47일 후인 12월 12일에는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을 무력으로 끌어내리는 군사반란이 일어난다. 절대권력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유신의 종말을 알림과 동시에 혹한의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봄 햇살에 녹아내리듯 그동안 억압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전 국민의 가슴에 뜨겁게 타오르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따뜻한 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또 한 번의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자국민을 상대로 총을 쏘는 만행을 저지른다.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박정희와 유신의 후예, 전두환이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찬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민중의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또 한 번의 암흑기로 빠져들었다.      


축구에 비교하자면 3 공화국은 전반전, 4 공화국은 후반전, 전두환이 집권한 5 공화국은 연장전 같은 분위기였다. 5·16 쿠데타와 비슷한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1972년 친위쿠데타와 비슷한 5·17 내란이 발생했다. 국가 재건 회의 대신 국가 보위 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입법권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모든 권력을 장악했으며, 구악 일소를 내세우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강제 구금과 폭력을 일삼았다.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비판적인 언론인을 강제로 내쫓았으며, 반공을 국시로 삼아 각종 조작사건을 만들어 정통성 없는 권력의 재물로 만들었다. 

X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에 빛을 본 후 유·소년기를 지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에 관한 한 한 치의 앞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기나긴 군사통치의 끝도 다가오고 있었다. 1987년 6월, 국민은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활화산처럼 표출하기 시작했다. 6월 민주항쟁의 성취로 대한민국의 헌법이 바뀌었다. 이는 국민이 억압받는 피지배자 위치에서 국가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조합이 활성화되면서 노동자의 권리가 신장되었고, 전교조가 탄생하면서 참 교육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당정치가 되살아났고, 새로운 세상에 맞은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 

또한, 지구의 반을 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위협적이었던 세력은 차츰 그 힘을 잃었고, 세력이 큰 나라일수록 빨리 무너져 내리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이념전쟁이 약해지고 냉전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힘 있는 나라들은 세계화를 외치며 나라마다 꽁꽁 잠긴 문을 열라고 강요했고, 점차 세계는 하나가 되어갔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 속에 X세대는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이 시기는 X세대가 가치관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 10·26, 박정희공화국의 최후와 12·12     


그럼 전두환 정권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부산대학교에서 시작해 부산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시위가 불길처럼 번지게 되자 박정희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시위의 불길은 마산으로 옮겨 붙었다.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가 시민과 노동자들까지 가세하게 되면서 불길은 더욱 크게 타올랐고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위수령을 발동했다.

1970년대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을 다룬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도 1985년에 개봉을 해, 학교에서 반공 영화라며 표를 나누어 주고 단체관람을 권장했다. 나도 당시 우리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부산시민회관에 가서 영화관람을 했다. 당시 어린 나이에 보기에는 잔인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경호 실장 차지철이 한 이야기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긴급조치 9호가 서슬 퍼렇게 살아있던 시기라 이런 분위기가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는 이렇게 박정희와 유신의 종말을 매듭지었다. 

43살에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8년 5개월의 통치를 끝으로 부하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렇다. 1979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의 권력에 공백이 발생한 날이다. 유시민 작가는 그의 책에서 “해방 후 권력의 공백기를 이승만이 잘 활용해 권력을 잡았다”라고 쓰고 있다. 그 표현을 빌리자면 10·26 이후의 권력의 공백기를 전두환은 잘 활용해 권력을 잡았다. 중요한 것은 비정상적이고 잔인하게, 자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다.           




- 5.17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제5공화국     


 박정희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자신의 롤모델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전두환은 박정희를 롤모델로 삼은 듯하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전두환은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이로 인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동안 주요 요직에 두루 기용된다. 박정희사망 후 전두환이 빠르게 군사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도 평소에 박정희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연구해 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과 방법이 박정희와 아주 많이 닮아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박정희사망 후 계엄령이 전국으로 발동되었다.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참모총장이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박정희 시해 당시 궁정동 안가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는 보안수사대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를 이유로 전두환이 수장이며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는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12월 12일에 일으켜 군을 장악하게 된다. 

박정희사망 후 군은 전두환의 반란으로 신군부가 장악했지만, 사회 분위기는 달랐다. 유신독재에 억눌려 있던 민심은 정치권에서는 개헌논의로, 대학에서는 학원 민주화를, 언론계는 언론자유를,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각계각층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1980년의 봄은 날씨만큼이나 따뜻하고 평안해 보였지만, 잠잠해 보이던 권력의 심장부는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이 장악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4월 14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중앙정보부 서리까지 겸임함으로써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평온했던 봄은 이때부터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권력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고, 그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이 들고일어났다. 5월 15일 10만 명이 운집한 대학생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쳤다. 하지만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아직도 논란이 있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전두환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보안사는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 26명을 합수부로 불법 연행하고, 학생·정치인·재야인사 등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5월 17일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는 계획을 실시한다. 전국주요 지휘관 회의를 통한 전군의 일치된 결정사항임을 내세워 정부에 시국수습방안으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를 강요했고, 통신을 끊고 총을 든 군인들을 배치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아무런 토의도 없이 국무회의에서 전국 비상계엄을 의결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신군부는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 포고 10호로 정치 활동 금지·대학 휴교령·언론 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조치를 발령했다. 다음날 새벽 2시 국회를 점령해 무력으로 봉쇄하면서 헌정을 중단시켰다.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조치에 따라 계엄군이 투입되었고, 계엄군 대부분이 전국 대학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앞서 서울역 회군에서 본 것처럼 전두환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대학생으로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상황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는 민족의 아픔을 만들어냈다.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 부산·경남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이 원인이 되었다면,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전남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 김대중의 구속이 있었다. 

부마항쟁은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발동되었지만, 광주민중항쟁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계엄군이 미리 들어가 있었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과정에서 계엄군의 과격진압에 격분한 시민이 합세하면서 시위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공수부대가 중심이 된 계엄군은 더 많은 병력을 광주로 내려보냈고, 애국가연주가 갑자기 울려 퍼지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 철저한 언론통제와 외부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함으로써 광주는 고립되었고, 신군부의 무참한 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자국민을 살해했다.   ‘5·18 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었다. 

내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복무했던 20사단도 당시 하나회 출신 사단장의 지휘 아래 광주민중항쟁 진압에 투입되었다. 내가 근무할 당시는 광주민중항쟁이 14년이 지난 후였지만 부대 내 2·4종 창고에는 진압에 사용되었던 헬멧과 진압봉이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군대에 있을 물건이 아니라 의아했었는데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된 후, 그 당시 내가 군 복무를 했더라면 나 또한 진압군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에 몹시 씁쓸했었다.     

“광주는 빨갱이로 물들어 있다.”

이 말은 어느 보수 인사가 한 말이 아니라, 부산이 고향인 내가 어릴 적 항상 어른들에게 듣고 자란 이야기다. 광주는 북한과 동일시되었고, 김대중은 김일성과 의형제 같은 인물이었다. 아직도 부산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로 알고 있는 어르신들이 꽤 존재한다. 확실히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출신답게 언론통제만큼은 박정희를 능가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때부터 지역감정은 극에 달했다.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과 언론은 지역감정을 부추겼고, 그 벽은 너무나 견고했다. 전라도에 가면 경상도 번호판은 기름도 안 넣어 준다고 했고, 전라도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독실한 불교와 기독교 신자가 결혼하는 것만큼 금기시되었다. 해태타이거즈와 롯데자이언츠의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선수 차량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1990년 부산·경남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대구·경북의 지역 연고를 둔 민주정의당 노태우, 충청도를 지역 기반으로 둔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의 ‘3당 합당’은 전라도를 완전히 고립시킴과 동시에 빨갱이 도시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는 대한민국을 남북에 이어 동서로 다시 한번 분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권력자들은 이것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고, 국민은 그들의 놀음에 잘도 놀아났다.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장악한 것처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었다. 명목상 최규하 대통령이 국보위 의장이었지만, 실권은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이 쥐고 있었다.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국보위를 만들어 통치기반을 마련한 전두환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숙정 작업을 시작했다. 정치인은 정계를 은퇴시키고, 고위공직자는 사임을 시켰다.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쓰는 기자는 해직을 시켰고,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법적 근거도 없이 국민을 무작위로 잡아 가두고, 반인륜적인 가혹행위와 인권유린을 강제했다. 이는 초법적 징벌기구로 신군부 앞에 국민을 벌벌 떨게 만드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4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끌려가 전후방 부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이로 인해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이 부상이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신군부의 총구는 종교계도 예외가 없었다. 10월 27일 새벽 2시 전국의 조계종 주요 사찰에 계엄군이 진입해 총무원장 등 46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김대중 등 내란음모 사건의 재판을 앞두고는 대법원 판사를 일괄 사직하도록 강요했으며, 이후 김대중은 군사재판 항소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무의미한 대통령직을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8월 16일에 사임한 대통령직은 8월 27일 제4공화국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신군부는 대통령 단임제와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확정해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10월 27일에는 제5공화국 헌법을 공포한다. 이와 동시에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임시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바꾼 후, 189개 달하는 법안을 정권 입맛에 맞게 바꾸고 통과시킨다. 

 

신군부는 5 공화국 출범을 앞서 정치기반 다지기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한 일은 전두환의 주특기인 언론 길들이기였다. 정보기관을 동원해 언론사를 협박해 강제로 언론을 통폐합시키고,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정치 활동 규제조치를 발표하고 유력정치인들은 정계에서 퇴출당했다. 

 1981년 1월 15일에는 전두환을 총재로 하는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어 전두환을 제12대 대통령에 지명했으며, 1월 24일 부마항쟁 이후 1년 3개월 만에 비상계엄령이 전면 해제되고, 2월 25일 일명 체육관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3월 3일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제5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제5공화국이 왜 박정희의 제3·4 공화국의 연장전인지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통치기반이 약했던 전두환은 국민을 억압하거나 다른데 눈을 돌리게 만들어 정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친구까지 대통령을 하고 난 뒤, 1995년 말경 시작된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구속이 되고, 그들은 나란히 법정에 서게 된다. 

1996년 8월 서울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해 12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며,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지징역으로 최종 확정판결을 내렸다. 전두환의 죄목은 ‘반란수괴죄’,‘내란수괴죄’,‘내란목적살인죄’ 등이었고, 특히 반란수괴죄의 경우 사형밖에 다른 형량이 없었지만, 상급재판부는 16년이나 지난 일이며,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됨과 동시에 사면되어 무기징역의 전두환은 2년만 복역함으로써 그 죄를 씻어버렸다. 그에 의해 죽어간 수백 명의 국민과 구타·고문 등의 인권유린은 국민의 가슴 한구석 응어리로 묻어버려야 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두환에 대해 깊이 다룬 이유는 이후 6월 민주항쟁과 X세대 탄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 군사독재의 골이 깊을수록 더 큰 국민적 저항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두환공화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X세대가 유소년기나 청소년기일 때 일어난 사건이지만,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노태우에 이르는 30여 년간의 군사통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많은 흔적을 남겼으며, X세대는 그 흔적 위에서 성장했다.           




전두환공화국 주요 사건과 X세대 유·소년기의 추억들     

전두환공화국 때 있었던 주요 사건을 정리해 본다. 더불어 X세대 유소년기일 때가 대부분이라 추억할 만한 내용도 함께 나열해 본다. 이때부터는 X세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많을 것이므로, 읽어 보며 과거로의 추억여행을 떠나보기 바란다.      

1980.04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 권력장악 위한 기반 마련

1980.05 대학생 10만 명, 서울역 시위 및 계엄령 철폐 요구 – 서울역 회귀(05.15)

             5.17 쿠데타 발생 및 전국으로 비상계엄 확대(05.17)

             5·18 광주민주화운동 발생(05.18~05.27)

1980.08 삼청교육대 ‘순화교육’ 실시(3만 9천여 명)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첫 공판 ‘사형선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전두환 당선

1980.10 제5공화국 헌법 공포(대통령 7년 단임제, 간선제)

               MBC, 전원일기 첫 방영(2002.12)

1980.11 KBS, 전국노래자랑 첫 방송

1980.12 컬러 TV 첫 방송

            만화영화, '보물섬' 첫 방영(1981.05)

1981.01 삼보컴퓨터, 한국 최초 개인용 컴퓨터 SE-8001 생산

1981.02 KBS, ‘가요톱 10’ 첫 방송(~1998.02)

               MBC, 어린이 프로그램 ‘모두 모두 즐겁게’ 첫 방송(~1984.10)

            대통령선거인단 투표에서 전두환 제12대 대통령에 당선

1981.03 MBC, ‘호랑이 선생님’ 첫 방영(~1986.10)

            한국청소년연맹 발족

1981.05 MBC,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 첫 방송

1981.07 서울신문사, <TV가이드> 창간(1995년 폐간)

            교육세 부활 – 콩나물교실, 2부제수업 등 교육환경 개선 목적 재원 확보

1981.08 해외여행자유화 조치 시행

            영화, ‘13일의 금요일’ 개봉

1981.09 KBS2, ‘퀴즈로 배웁시다’ 첫 방송(1985.02)

               IOC, 1988년 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 ‘서울’ 결정

1981.10 산울림, ‘산할아버지’ 발표

            문교부, 초등학교 영어교육 결정 – 영어 조기 교육 방침 도입

1981.11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출판

            첫 대학입학학력고사 실시 – 필기시험 320점, 체력장 20점

            86 아시안게임 개최지 ‘서울’로 결정

1981.12 한국프로야구 창설 – MBC(서울)·롯데(부산)·삼성(대구)·삼미(인천)·해태(광주)·OB(대전)

            최불암·정여진, ‘아빠의 말씀’(작사 지명길, 번안곡) 발표

1982.01 중고생 교복자율화 발표

               MBC, ‘은하철도 999’ 첫 방영(~1983.01)

            야간 통행금지 37년 만에 전면 해제

            제4차 교육과정 발표–개인교습·보습학원 금지, 자율학습 허용, 대학본고사 폐지

1982.03 MBC, ‘모여라 꿈동산’ 첫 방송(~1988.05)

            현대자동차, ‘포니 2’ 출시(348만 5천 원, 1400CC)

1982.04 EBS, ‘딩동댕 유치원’ 첫 방송(2018.08)

1982.06 정광태, ‘독도는 우리 땅’(작사·작곡 박인호) 발표

1982.07 잠실야구장 준공(1980.04~)

1982.09 KBS2, ‘TV유치원 하나·둘·셋’ 첫 방송(~2014.01)

1982.10 KBS1, ‘미래소년 코난’ 첫 방영(~1983.06)

               MBC, ‘어린이 명작동화’ 첫 방영(~1983.06)

            프로야구, OB베어스가 삼성라이온즈 꺾고 한국시리즈 첫 우승

               KBS, ‘개구리 왕눈이’ 첫 방영(~1983.03)

1982.11 김득구, WBC 라이트급 챔피언전서 의식불명

               KBS1,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 첫 방송

            농심, ‘육개장사발면’, ‘너구리’ 첫 출시

1982.12 영화, ‘ET’(감독:스티븐 스필버그) 개봉

            강병철과 삼태기, ‘삼태기메들리’, ‘행운을 드립니다’ 발표

            영화, ‘록키 3’(감독·배우:실베스터 스탤론) 개봉

            삼성전자, 8비트 퍼스널컴퓨터 SPC-1000 개발 – 1983.02 시판

1983.03 중·고교생 복장 자율화 실시

               KBS2, 만화영화 ‘요술공주 밍키’ 첫 방영

1983.04 KBS2, ‘유머 1번지’(출연:임하룡, 심형래, 김형곤 등) 첫 방송(~1992.10)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개최(첫 천하장사:이만기)

            ‘아기공룡 둘리’ 탄생, 월간지 <보물섬> 연재 시작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1983.05 과외단속 기준지침 마련–과외지도 삼촌까지 허용, 학습내용 비디오테이프 판매 금지

            현대자동차, ‘스텔라’ 출시 – 1,439CC

1983.06 KBS, 이산가족 찾기 운동 생방송 시작(~11.14)

1983.07 보건사회부, 2자녀 갖기 운동 → ‘2자녀 이하 갖기 운동’으로 변경 시행 발표

            대우자동차, ‘로얄프린스’ 출시 – 1,897CC

1983.08 여의도 ‘만남의 광장’ 24시간 개장 – 이산가족 만남 장소

1983.09 농심, ‘안성탕면’ 출시

            윤시내, ‘공부합시다’ 발표

1983.10 롯데제과, ‘꼬깔콘’ 출시

            정수라, ‘아! 대한민국’ 발표

            창경원 동물,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동 시작

            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 – 대통령 수행원 등 17명 사망, 15명 부상

            농심, ‘양파링’ 출시

1983.11 KBS2, 만화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첫 방영

1984.03 37개 품목의 거래 단위, ‘미터법’으로 표준화

            문교부, 중고교 보충수업 주 5시간 허용

            농심, ‘짜파게티’ 출시

1984.04 KBS1, ‘가족오락관’ 첫 방송(~2009.04)

               KBS2, ‘연예가중계’ 첫 방송(~2019.11)

1984.05 서울대공원 동물원 개원

1984.07 MBC 제5회 강변가요제 – 이선희 ‘J에게’ 대상 수상

1984.08 미국 LA올림픽 개최

            김원기·유인탁(레슬링), 안병근·하형주(유도), 신준섭(복싱), 서향순(양궁) 금메달 획득

1984.09 나미, ‘빙글빙글’ 발표

            잠실올림픽 주 경기장(69,950석 규모) 준공 – 착공(1976.11~)

1984.10 KBS,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첫 방송(~2004.10)

1984.12 영화, ‘터미네이트’(감독:제임스 캐머런, 배우: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개봉

            영화, ‘고스트버스터즈’(감독:아이번 라이트먼, 배우:빌 머레이) 개봉

1985.01 ‘구정’을 ‘민속의 날’ 공휴일로 지정

            이선희, ‘아! 옛날이여’ 발표

1985.05 여의도 대한생명 63 빌딩(249M) 준공(1980.02~)

1985.06 영화, ‘킬링필드’(감독:롤랑 조페) 개봉

            서울신문 자매지, <스포츠서울> 창간

1985.10 혜은이, ‘열정’, ‘파란 나라’ 발표

               MBC, 애니메이션 ‘컴퓨터 형사 가제트’ 첫 방영

               MBC 외화드라마, ‘출동! 에어울프’ 첫 방영(~1988.01)

            현대자동차, ‘소나타’ 출시

1985.11 한국축구대표팀, 아시아 최종예선서 일본 꺾고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KBS1, ‘가요무대’ 첫 방송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첫 방송(1997.03)

            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허공’ 발표

1985.12 문교부, 초등학교에 교과전담교사제 도입

1986.04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준공

1986.06 멕시코월드컵에서 ‘축구의 신’ 마라도나 등장

1986.07 다섯 손가락, ‘풍선’ 발표

1986.08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감독:이장호, 배우:안성기·최재성) 개봉

1986.09 공중전화카드 첫선 – 5천 원권·1만 원권, 시내통화료 50원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개막 – 한국 2위 금 93·은 55·동 76

1986.10 부활, ‘희야’ 발표

            조정래, 『태백산맥』 출판

1986.11 MBC드라마, ‘꾸러기’ 첫 방영(~1988.05)

               MBC외화드라마, ‘맥가이버’ 첫 방영(~1992.08)

               MBC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 첫 방영(~1994.11)

            정부, ‘평화의 댐’ 건설계획 발표 – 북한 금강산댐 위협 대비

1986.12 영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 개봉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출판

1987.01 영화, ‘용형호제’(감독·배우:성룡) 개봉

1987.02 북한의 금강산댐에 맞서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 착공(~2005.10)

1987.03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작사·작곡:유재하) 발표

1987.04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 출판

1987.05 88 서울올림픽 대비 차원 서머타임제 실시(05.10~10.11)

               KBS1, ‘사랑이 꽃피는 나무’(출연:최재성·손창민) 첫 방영(~1991.07)

            영화, ‘영웅본색’(감독:오우삼, 배우:주윤발·장국영) 개봉

1987.06 김수희, ‘남행열차’ 발표

1987.07 태풍 셀마 한반도 상륙 – 사망·실종 345명, 이재민 10만 명

            영화, ‘백 투 더 퓨쳐’ 개봉

            제5차 교육과정 발표 – 과외금지해제, 학력고사실시 

1987.11 북한, 대한항공 858기, 미얀마 안다만해 상공서 폭파 – 115명 전원 사망

1987.12 영화, ‘탑건’(감독:토니 스콧, 배우:톰 크루즈) 개봉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서울로 이송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당선 – 노태우(36.6%)·김영삼(28%)·김대중(27%)·김종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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