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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X세대론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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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Sep 25. 2024

3-4.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제6공화국 탄생

앞의 전두환공화국이 X세대가 유·소년기일 때의 대한민국 상황이라면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은 X세대가 청소년기 때의 대한민국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청소년기임을 비추어 볼 때 지금부터 살펴볼 대한민국은 X세대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며, X세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될 것이다. 

  

전두환공화국의 최후     

 

그럼 이제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인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박정희가 총기피습으로 사망하고 유신헌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년 3개월이라는 긴 비상계엄기간을 보내고 제5공화국이 들어섰지만, 국민은 좀 더 업그레이드된 박정희 정권의 시즌Ⅱ를 맞이했다.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제5공화국 헌법이 출범했다. 전두환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는 ‘선진조국 창조’와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88 서울올림픽과 86 서울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고, 3S(Sports·Sex·Screen) 정책으로 국민을 즐겁게 하고,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해외여행의 단계적 자유화 조치, 과외 금지 및 교복 자율화 그리고 컬러 TV 보급 등 국민을 최대한 정치로부터 멀리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론에는 보도지침을 내리고, ‘땡전뉴스’라고 할 만큼 뉴스에서는 전두환에 대한 찬양뉴스가 낯 뜨거울 만큼 연일 보도되었다. 삼청교육대로 대표되는 인권유린과 반정부인사에 대한 고문과 탄압은 극에 달했다. 각종 유화책을 쓰고 겁박을 해도 쿠데타와 자국민 학살로 만들어진 정권의 정당성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 초반 숙정과 정화로 반정부·반사회인사들에 대한 억압정책을 펼쳤다면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1983년부터는 유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정치사범이나 공안사범 등의 사면과 복권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정치 활동 규제자를 해금시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유화정책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정치권과 재야운동권 세력에게 또다시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1984년부터 학생·노동자·정치권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세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는 김영삼·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고 1985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치러졌던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은 정치 활동을 금지해 손발을 꽁꽁 묶어 둔 채로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151석)과 정부 주도로 만든 관제 야당 격인 민주한국당(82석)과 한국국민당(25석)이 국회를 차지했다. 하지만 1985년에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는 달랐다. 신민당은 총선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창당되었지만, 선거유세가 시작되자 그동안 억눌려둔 국민의 열망은 신민당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때 신민당이 내세운 선거구호 중 하나가 ‘대통령 직선제’였다. 

 12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 여당인 민정당이 147석, 신민당이 67석이었지만 득표율은 민정당 35.25%, 신민당 29.26%로 한 달도 안 된 신생정당이 30%에 육박하는 지지를 얻으면서 제1야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총선에서 신민당이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과는, 민주화의 열망인 동시에 희망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탄생의 최대 피해자인 광주는 국민과 재야 운동 세력에게 아픔이었고, 미안함이었으며, 죄책감이었고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분노였다. 매년 5월이면 미안함과 분노가 표출되는 시기였고, 1985년의 5월은 더 크게 타올랐다. 그 분노는 전두환 정권을 향해 있었지만, 묵인하고 한편으론 조력했던 미국에도 표출되었다. 5월 23일에는 대학생 76명이 미문화원을 기습 점거하며 미국에 대해 광주사태 공개사과를 요구했고, 이를 계기로 정부는 다시 강경책으로 돌아서 고문과 조작을 일삼는 공안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하지만 민주화 열기는 예전처럼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의 세력에게는 광주의 교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립은 패배라는 것을, 다시는 그런 아픔과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광주의 영령들은 말해주고 있었다. 


1985년 말부터는 반정부투쟁과 더불어 개헌문제가 사회적 논점으로 떠올랐다. 권력 창출의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국민은 권력자의 하수인 노릇만 하게 된다는 자각이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는 개헌과 더불어 대통령 직선제 관철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화 세력과 정부 간의 강대강(强對强) 대치가 계속 이어졌고,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지만,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있던 학생들도 쉽게 굴복하거나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에서 시행된 탄압과 고문은 당장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국민의 가슴속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이 용암처럼 폭발하는 순간 정권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개헌 협상을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과 동시에,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탄압의 중심에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다.      




- 6월 민주항쟁     

 

이제부터는 1987년의 이야기다. 광주로부터 국민의 가슴에 켜켜이 쌓여온 응어리가 몇 차례의 계기로 인해 6월에 폭발하는 사건이 연초부터 발생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다.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하게 된다. 당시 경찰은 사망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발표를 했다. 전두환 정권은 고문 경찰을 구속하는 등 조기 수습을 하려 했지만, 민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2월 7일에는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가 전국에서 열렸고, 이때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종철이를 살려내라”,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였다. 

두 번째는 4·13 호헌조치다.

전두환 정권은 지금까지의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제도를 통한 민주화를 열망한 국민의 바람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발표였고, 이는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는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당국의 은폐·축소 조작이었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가 있었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고문 경찰이 더 있고, 윗선에서 조작했다는 폭로를 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5월 27일 전국의 민주화운동연합조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만들어지게 된다. 국본은 재야세력뿐 아니라 정치권과 종교계까지 아우르는 범국민적 연합기구였다. 


국본이 내세운 민주화운동의 방침은 이러했다.

첫째, 전국에 걸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감행하고, 둘째, 재야와 종교계 그리고 정치권에 이르는 대연합 전선을 추구하고, 셋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최저 수준의 강령을 내세워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참여하여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항쟁을 준비한 것이다. 

이는 분명 광주가 가르쳐준 교훈이었으며 명령이었다. 국본은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를 6월 10일에 열 것을 결정했다. 6월 10일은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6월 항쟁은 6월 10일에 시작을 하고 6월 29일에 막을 내리게 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는 이 20일간의 기록을 살펴보자. 

6월 10일 오전 10시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같은 시각 시내 곳곳에서 6·10 대회를 시작했다. 오후 6시를 기하여 성공회대 성당에 집결한 후 국민대회식이 거행되었다. 이 시각 학생과 시민들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서울 도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날 저녁 경찰에 의해 명당성당으로 밀려난 시위대는 농성투쟁을 전개했고, 이는 6월 항쟁을 지속하게 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역할을 하였다. 

 6월 항쟁의 두 번째 불길은 6월 18일에 타올랐다. 그 불길에는 불쏘시개를 한 또 한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 6.10 대회 출정을 앞둔 하루 전 ‘범 연세인 총궐기 대회’가 열린 시위에서 경찰이 직격으로 쏘아댄 최루탄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었다. 이를 계기로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가 전국에서 150만 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때 부산에서도 30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전국의 중소도시까지 항쟁의 불길이 번졌다. 이에 경찰력이 무기력해지기 시작하자 전두환 정권은 위기를 느끼고 계엄령을 검토했다. 하지만 정권 내부의 자중지란에 대한 우려와 미국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에서 보인 전 국민의 참여에 힘입어 국본은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했다. 전국 33개 도시에서 15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해 전두환 정권을 더욱 압박해 궁지로 내몰았다.

 6월 29일 정부는 결국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6·29 선언’을 발표하는데 이는 국민에 대한 국가 권력의 항복(降伏)을 선언한 것이고, 권위주의 정권의 퇴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봉건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넘어올 때도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국가를 상대로 얻어낸 최초의 승리였으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확실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6·29 선언’의 내용은 이러했다.

1.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의미하는 대통령선거법 개정

2.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사범 석방

3. 국민 기본권 신장

4. 언론자유 창달

5. 지방자치제 실시

6. 교육 자율화 실시

7.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정화 조치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발표한 이 선언은 이후 전두환이 수용 의사를 밝혔고, 제6공화국 헌법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이렇게 1987년의 6월은 마무리되었고,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 민주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화의 성취를 뒤로하고 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7월 5일 마침내 사망했다. 7월 9일 연세대에서 출발한 운구행렬에는 100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다.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불꽃은 이한열의 영결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야 정치인들이 모여 협상한 끝에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만들어졌고,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직선제에 의한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노태우 36.6% · 김영삼 28% · 김대중 27%의 득표율로 전두환의 친구이자 군사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양김(兩金)은 끝내 분열했고, 둘의 득표율을 합치면 55%가 되었음에도 다시 쿠데타 세력에게 정권을 헌납하는 꼴이 되었다. 이를 두고 6월 민주항쟁이 민주정권 수립의 실패로 인해 미완의 성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사람(지도자)도 중요하지만,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87 체제’라고 하는 제6공화국 헌법은 4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대로 살아있지 않은가? 6월 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구현한 확실한 성공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하듯 6월 민주항쟁이 뿌려놓은 민주주의 씨앗은 시간이 흐를수록 뿌리를 깊게 내려 이후로 권위주의 세력이 아무리 힘차게 흔들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민주주의로 성장했다. 이는 노무현이라는 권위주의와 가장 대척점에 있던 사람의 대통령 당선으로 표출되었으며, 권위주의 세력의 후광과 후원을 받으며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근혜의 탄핵으로도 증명되어진다. 이제는 누구도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를 시도하려 하지 않으며, 권위주의 세력이 과거로 회귀하려 들면 국민은 언제든지 민심의 회초리인 투표권을 행사해 그들을 응징한다. 이 모두가 6월 민주항쟁이 결실이고, X세대를 비롯한 이후 세대에게 윗세대가 안겨준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양김(兩金)의 분열로 민주세력의 정권 창출은 실패했지만, 국민은 이듬해 4월에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야당의 압도적 지지로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 만들어 주었다. 노태우의 민정당이 125석, 김대중의 평민당이 70석, 김영삼의 민주당이 59석, 김종필의 공화당이 35석으로 125:174라는 여야 의석구조를 만들었다. 이 수치는 뒤에 한 번 더 언급될 것이니 기억해 두기 바란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 헌법 쟁취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6월 민주항쟁 이전에는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민주화를 쟁취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고 모든 민주화 세력이 여기에 집중되었다면, 6월 항쟁 이후는 각자의 민주화 세력이 자신들이 소속된 단체나 조직에서의 권위주의와의 싸움으로 확대되고 전문화되어 갔다. 이때부터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민주화와 부조리에 대한 개선의 요구가 일어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대학생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만들어 정부를 견제하는 전국조직으로 거듭났고, 노동자는 7·8·9월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자의 인권 향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이는 노동조합의 수를 급속하게 늘려 현 민주노총의 모태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참 교육을 외친 선생님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만들었고,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전국빈민연합(전빈련)’,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이 6월 항쟁의 뿌리를 통한 자양분으로 가지를 뻗어갔다. 이후 경실련, 민변, 환경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생겨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이는 6월 항쟁이 남긴 또 하나의 성취였으며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취는 국민이 힘을 합치니 국가 권력과 맞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국가의 주인은 국민임을 분명히 자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제6공화국 헌법’의 쟁취였다면, 국민 가슴에 새긴 주인의식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튼튼한 민주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X세대는 6월 항쟁이 뿌려놓은 민주화와 다양화 그리고 자존감이라는 자양분을 골고루 섭취한 세대이다. X세대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기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즉 유·소년기는 권위주의 사회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다면, 청소년기 이후는 민주화된 사회에서 교육받고 성장해 온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생겨나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는,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국가와 국민이 종속의 관계였다면 6월 항쟁 이후 한반도는 드디어 국민이 국가의 지배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국가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X세대가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X세대는 결코 개인이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깨닫고 실천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X세대가 6월 항쟁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것은 별로 없거나 크지 않지만, 6월 항쟁의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X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항쟁 이후의 민주화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를 향유 한 첫 세대가 X세대이기 때문이다. 


 X세대의 사고는 개방적이었고, 행동은 진취적이었다. 기존의 사회관습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사회와 어울려 나갔다. 어찌 보면 이것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가 X세대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전두환의 절친이며 12·12의 또 다른 주역인 노태우가 새로 바뀐 헌법의 직선제 선거에서 양김의 분열로 인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6월 항쟁으로 인해 변해버린 세상까지 어찌하지는 못하였다. 6월 항쟁 이후에도 과도기적 과정을 거쳤지만, 국가폭력으로 국민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하는 일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학생·노동자·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으며, 사회 약자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은 세상이 왔음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대통령직선제는 대통령이 국민의 눈치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제도로서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제든지 국민의 선택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주주의는 최고의 지도자를 뽑는 제도라 아니라 최악의 지도자를 선출하더라도 나쁜 짓을 마음대로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6월 항쟁 이후에도 공안 사건이나 간첩 조작사건 등이 발생했지만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만큼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시스템으로서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정착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6공화국의 탄생과 보통사람 노태우대통령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X세대는 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직선제로 어느 때보다 열기가 대단했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투표권이 없던 X세대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전국을 돌며 어느 후보가 더 많은 사람을 모았는지도 경쟁의 대상이었고, 후보들의 제스처나 퍼포먼스도 화젯거리였다. 더구나 각 후보를 대표하는 말과 이미지도 전 국민의 관심거리였다. 

노태우는 신군부나 전두환의 ‘이인자’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고,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이미지 변신에 큰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임기 후 수천억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는 것을 보고 흔치 않은 보통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가 시작할 때쯤 X세대 대부분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의 성취로 민주 헌법이 만들어졌고, 제6공화국이 탄생했다.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민주 정부는 들어서지 못했지만 급변하는 세계의 정세와 국내의 변화에 신군부 세력이었던 노태우도 역사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전두환이 좌고우면 하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면, 노태우는 다소 온건하며 경청을 잘하고,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노태우는 주변 사람뿐 아니라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과도 꾸준히 만나 국정을 논하고 현안에 대해 경청했다. 

노태우는 신군부 세력이라는 것과 전두환의 친구라는 이미지 때문에 평가에서 제외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지만, 근래에는 역대 대통령 중 저평가된 대통령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과거의 저지른 잘못은 있지만, 본인이 말한 것처럼 6·29 선언은 국민의 뜻에 따라 항복한 것이었고, 권위주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을 그런대로 잘 수행했다고 본다. 


대한민국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 있었다면, 세계는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냉전 분위기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989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지중해 몰타에서 자리를 마련했다. 이 몰타회담에서 각 진영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는 ‘동서가 냉전 체제에서 새로운 협력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선언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에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으며 모스크바 푸쉬킨 광장에는 맥도널드가 개점하더니,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 체제로 바뀌었다. 

노태우 정부는 무엇보다 북방외교에서는 상당한 성과와 진전을 보였다. 소련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를 비롯해 동구권 여러 나라와도 국교를 수립하고 경제교류도 확대했다. 더불어 남북관계에서도 1988년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 선언)>을 필두로 1991년에는 남북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하는 성과도 낳았다. 이는 이후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과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의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1991년 9월 18일에는 UN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남북이 동시에 UN에 가입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반공을 국시로 배우고, 반공 관련 창작물 숙제에 골머리를 앓고, 명절 때마다 방영되던 ‘똘이장군’ 만화영화를 보고 또 보았던 X세대에게 혼란을 주었다. TV에서는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프로가 방영되었고, 북한은 ‘적(敵)’이 아니라 언젠가는 하나 될 ‘한민족’이라고 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도 여전히 고문과 강경 진압이 자행되었고,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등과 같은 조작사건이 있었다. 출판·상영물에 대한 검열도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존재했다. 전교조를 탄압했으며 우리는 교복을 입게 되었다.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부동산값이 폭등해 그다지 체감하기는 힘들었다. 미국의 수입개방 요구는 갈수록 거세어졌고, 농민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민중문화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노래방이 생겼고, ‘뉴키즈 온 더 블록’이 내한공연을 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다양한 장르의 책과 음악이 범람했고 X세대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부산에서는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졌는데,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사람이 나쁜 짓 하는 것을 도청했다고 더 나쁘다고 했고, 언론은 그 말이 맞는다며 맞장구를 쳤다. 

결국,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나는 필기 320점·체력장 20점 해서 총 340점 만점의 마지막 학력고사를 치렀다.           




노태우정부 주요 사건     


노태우 정부에서 일어난 일들도 X세대가 청소년기일 때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좀 자세하게 나열할 것이다. 시계열 순서대로 읽어 보면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혹여나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 있었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1988.02 김기훈, 캘거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시범종목) 금메달 획득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취임 – 제6공화국 출범

1988.03 맥도날드, 압구정동 1호점 개점

1988.04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 여소야대 정국

1988.05 문교부, 보충수업 사실상 전면 허용

               MBC, 장편만화 ‘머털도사’ 방송

            서울올림픽 관련 서머타임제 실시(05.08~10.09), 이후 폐지

            《한겨레신문》 창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결성

1988.06 국민주 1호, 포항종합제철주식 증권거래소 상장

            안철수, ‘브레인바이러스’ 퇴치용 프로그램 백신 개발

            변진섭, ‘홀로 된다는 것’ 발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올림픽 공식노래 ‘손에 손잡고’ 발표

1988.07 노태우 대통령,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선언) 발표

            ‘중공’ 명칭, ‘중국’으로 개칭

            영화, ‘영웅본색 2’ 개봉

            영화, ‘폴리스스토리’ 개봉

1988.08 MBC 강변가요제, 이상은 ‘담다디’ 대상 수상

               KBS2, 만화 ‘달려라 하니’ 첫 방영(08.15~11.20)

            여성매거진, 《우먼센스》 창간

1988.09 이문세, ‘붉은 노을’·‘광화문연가’·‘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발표

            잠실 롯데월드 개관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 – 한국 4위, 금 12·은 10·동 11

1988.10 탈주범 지강헌 등 4명, 북가좌동 가정집서 인질극 – 3명 사망, 1명 생포

            신달자, 『백치애인』 출판

1988.11 국회, 친족 범위 8촌 이내, 동성동본 금혼 8촌까지 ‘가족법 개정안’ 접수

            국회, 5공 광주청문회 시작 –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활동

            보건사회부, 1989년 신학기부터 결식아동 1만 5천 명에게 점심 무료제공 결정

            전두환, 대국민사과 발표 후 백담사에 은둔(~1989.12)

            문교부, 대학생 군사교육 1989년 1학기부터 폐지 결정

            전국언론노조(위원장 권영길) 창립

            이문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출판

1988.12 이충희선수, 88 농구대잔치 1차 대회에서 3천 득점 돌파

            <해외여행 연령제한> 폐지 발표(1989.01.01. 시행)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의 모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창립

               MBC 대학가요제, 무한궤도 ‘그대에게’ 대상 수상

1989.01 국기 강하 시·영화 상영 시 ‘애국가’ 폐지

            중앙교육심의회, 1989년 여름방학부터 초·중·고교 재학생 방학 과외 전면 허용

            정부, 구정 연휴를 3일로 확정하고 명칭을 ‘설날’로 변경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출판

1989.02 동구 공산권 국가 헝가리와 첫 국교 수립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방북 후 북한과 금강산 개발 합의 발표

1989.03 문익환목사,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평양 방문, 김일성 주석과 회담

1989.04 이찬진 등, 아래아 한글  1.0판 출시

            주택 2백만 호 건설 위한 성남 분당·고양 일산 등 신도시 건설계획 발표

               MBC, ‘우정의 무대’ 첫 방송(~1997.03)

1989.05 동의대 학생들과 경찰 대치 상황에서 화제로 전경 7명 사망(5·3 사태)

            영화, ‘레인맨’(배우:더스틴 호프만·톰 크루즈) 개봉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1989.06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출판

               KBS2드라마, ‘무풍지대’ 첫 방영(~09.07)

            전대협대표 임수경,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임정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출판

            [중국] 천안문 사태 발생

1989.07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발기인대회 개최(11.04 창립)

            전교조 활동 관련 구속 41명, 파면·해임 267명, 직위해제 626명, 면직 48명

1989.08 전교조 결성을 계기로 ‘참 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협의회’ 결성

            김흥국, ‘호랑나비’ 발표

            노사연, ‘만남’ 발표

1989.09 노태우대통령, 신뢰구축협력·남북연합·단일민족국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제시

1989.10 해외여행 전면자유화 – 관광 여권, 발급 제한 완전 철폐 등

            변진섭 2집, ‘너에게로 또다시’·‘희망사항’·‘로라’ 발매–최초의 밀리언셀러 싱글 음반

            이승환, ‘텅 빈 마음’ 발표

            강인원·권인하·김현식,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발표

1989.11 공업용 우지(牛脂)로 라면·마가린 등 제조한 5개 업체 대표 10명 구속

            서울시철거민협의회·전국철거민연합 등 6개 단체, ‘전국빈민연합’ 결성

1989.12 목동아이스링크 개장

               MBC대학가요제, 전유나 ‘사랑이하는 건’ 대상 수상

            이승철, ‘마지막 콘서트’ 발표

            영화, ‘시네마 천국’ 개봉

            [미국-소련] 부시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 몰타회담

1990.01 MBC 청룡의 후신, ‘LG 트윈스’ 창단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 선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장 단병호) 창립 – 현 민주노총

            김지연, ‘찬바람이 불면’ 발표

            데이콤 PC-Serve(PC통신) 상용화 시작

1990.02 민주자유당 창당(노태우·김영삼·김종필)

            김민우, ‘사랑일 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발표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개봉

            20여 개 인문고에 실업계 학과 설치 – 대학진학 과열 완화 및 고교직업교육 강화

1990.03 <시장평균환율제도> 도입 – 외환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환율 결정

            강호동, 제18대 천하장사에 최연소 등극

            이은성, 『소설 동의보감』 출판

               MBC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첫 방송

            《스포츠조선》 창간

1990.04 전국농민운동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으로 재결성

            강수지, ‘보랏빛 향기’ 발표

1990.05 MBC시사프로그램, ‘PD수첩’ 첫 방송

            민자당 첫 전당대회 – 총재 노태우, 대표 김영삼 선출

            서울 도심에서 반 민자당 시위 2만 명 참여

            정부, 5개 항의 <청소년헌장> 선포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개봉

            문교부, 1991년부터 초·중·고에 월반 및 유급제도 도입 허용

            문교부, 전국 645개 초등학교에 ‘컴퓨터교실’ 개설

1990.06 한국 네트워크, 인터넷에 처음 연결 – 한국 인터넷 시대 개막

1990.07 015B, ‘텅 빈 거리에서’ 발표

            한국정신대연구소 발족 – 일본위안부 문제 해결 연구소

            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개봉

1990.08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남북한 실제적 교류 목적

1990.09 농수산물 수입 개방 10년 계획 추진 – 120개 농수산물 3년간 단계 개방

            폭우로 한강 범람, 65년만 최대 – 163명 사망·실종, 18만 명 이재민 발생

1990.10 윤석양 이병, ‘보안사의 민간인사찰’ 폭로

            ㈜한글과 컴퓨터 설립 – 창립자 이찬진

            노태우대통령, ‘범죄와의 전쟁’ 선포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첫 방영(~1994.04)

1990.11 영화, ‘사랑과 영혼’ 개봉

1990.12 교육방송국, EBS 개국

            국군보안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 변경

1991.01 우루과이라운드 대책 확정 – 극소수 품목 제외 대부분 수입 개방

            신승훈,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발표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발표

1991.02 남북 간 ‘화해·불가침·교류협력 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비준 교환

            김광석, ‘사랑했지만’ 발표

1991.03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 발생 – 경북 구미 두산전자 페놀 원액 누출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발생 - (2002.09 성산고 신축공사장 부근 유골 발견)

            구·시·군 기초의원 선거 – 31년 만에 지방선거 부활

1991.04 화성 연쇄살인사건 마지막 사건(10차 사건) 발생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 –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전문 상담소

            신민주연합당 정식 출범(총재 김대중) -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

            두산전자, 2차 페놀유출 사고 발생

            명지대생 강경대, 시위 중 구타로 사망 – 이후 분신정국 전개 

               015B, ‘이젠 안녕’ 발표

            부산 로열오락실에서 ‘노래방’ 첫 등장

               MBC, ‘몰래카메라(일요일 일요일 밤에)’ 첫 방송(~1992.11)

1991.05 방위소집대상자 산업기능인력 활용–매년 1만~1만 5천 명, 5년간 산업체근무(병역대체)

             대우자동차, ‘티코’ 출시(2001.03)

1991.06 MBC드라마, ‘질투’ 첫 방영(~07.21)

            영화, ‘양들의 침묵’ 개봉

1991.07 영화, ‘나 홀로 집에’ 개봉

            영화, ‘ 터미네이터 2–심판의 날’ 개봉

            한국통신, 하이텔 서비스 시작(2007.02 서비스 종료)

1991.08 김학순할머니, ‘일본군 종군 위안부’ 첫 증언 기자회견

            남북한 UN가입 권고 결의안, UN안보리 만장일치로 통과

1991.09 병역개선책 발표 – 1993.01 이후 현역병 복무기간 2~5개월 단축, 방위병제 폐지

            남북한 UN 동시 가입(09.18)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출판

1991.10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첫 방영(~1992.02)

1991.11 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 발표

            신성우, ‘내일을 향해’ 발표

            이재운, 『소설 토정비결』 출판

               MBC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첫 방영(시청률 64%) - 최초의 한류드라마(~1992.05)

            새만금간척사업(군산·김제·부안) 착공

1991.12 서울방송 SBS 개국 – 11년 만에 민영방송 부활

            국제노동기구(ILO) 가입 – 151번째 회원국

               MBC대학가요제, 김경호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대상 수상

            김정일, 북한 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

1992.01 이주원, ‘아껴둔 사랑을 위해’ 발표

            외국인 주식투자 허용

            일본대사관 앞 첫 수요집회 개최 – 2011.11 1천 회 수요집회 때 소녀상 건립

            이덕진, ‘내가 하는 한 가지’ 발표

            김종서, ‘지금은 알 수 없어’, ‘대답 없는 너’ 발표

1992.02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 중 압사 사고 발생 – 여중생 1명 사망

1992.03 육군 9사단 이지문 중위, 군 부재자투표 공개투표 등 선거부정 폭로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환상 속에 그대’ 발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 – 민자당 149석, 민주당 97석, 국민당 31석

1992.04 UR농산물협상 이행계획서, GATT에 제출(보리 등 14개 품목 수입, 쌀 제외)

               KBS1,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첫 방송(~1994.04)

1992.05 통일국민당, 정주영대표 14대 대통령 후보 선출

            민주자유당, 김영삼대표 14대 대통령 후보 선출

            영화, ‘원초적 본능’ 개봉

            민주당, 김대중대표 14대 대통령 후보 선출

            황인경, 『소설 목민심서』 출판

            전교조 전·현직교사 및 시민 1만 5천여 명, 교육대개혁·해직교사 원상복직 요구

1992.06 MBC드라마, ‘질투’ 방영

            유승범, ‘질투’ 발표

            방위병제도 점진적 폐지 발표 – 1994.06 폐지

1992.07 예민,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발표

1992.08 황영조, 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획득(2시간 13분 23초)

            과학위성, ‘우리 별 1호’ 발사 성공

            한국-중국, 국교 수립

            현진영, ‘흐린 기억 속에 그대’ 발표

1992.10 MBC드라마, ‘아들과 딸’ 첫 방영(~1993.05)

            김원준, ‘모두 잠든 후에’ 발표

            윤금이, 동두천에서 주한 미군에 피살 – 주한미군주둔협정(SOFA) 개정운동 본격화

            김건모, ‘첫인상’,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발표

            『즐거운 사라』 작가 마광수 연세대 교수, 음란문서제조혐의로 구속

            6차 교육과정실시(~1997.12) - 초등학교로 개명 · 대학수학능력시험 신설

1992.11 파크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출판

            인천국제공항 착공(~2001.03 개항)

            민주당과 전국연합, 김대중후보를 ‘범국민 단일후보’로 확정

            피노키오, ‘사랑과 우정사이’ 발표

1992.12 위기철, 『반갑다 논리야』 출간

            영화, ‘보디가드’ 개봉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 발생 – 부산기관장 등 대통령 선거 개입 모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 김영삼(42%) 당선, 김대중(33.8%), 정주영(16%)

            1993학년도 대학입시학력고사 실시(필기 320점, 체력장 20점) - 마지막 학력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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