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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X세대론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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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Sep 25. 2024

3-5. 3당 합당과 김영삼

- 3당 합당의 주역 위대한 민주인사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같은 제목, 다른 느낌의 두 노래 가사를 한 번 음미해 보자.


대한민국

박건호 작사김재일 작곡정수라 노래, 1983

1절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2절 

도시엔 우뚝 솟은 빌딩들 농촌엔 기름진 논과 밭

저마다 자유로움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는 곳

도시는 농촌으로 향하고 농촌은 도시로 이어져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세계로 뻗어가는 곳

후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아아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대한민국...

정태춘 작사정태춘 작곡정태춘 노래, 1990

1절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 거리는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2절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 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3절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너무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4절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일지 않나

양심과 정의가 넘쳐흐르는 이 땅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5절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첫 번째 노래는 아마 가사를 읽는 중에도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을 만큼 익숙한 노래일 것이다. X세대가 유소년기인 1983년에 발표된 노래로 어린이들이 가요를 부르면 별로 좋게 보지 않던 시절인데도 이 노래만큼은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떨며 노래 부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노래는 1983년 전두환 정권에서 국민의 주인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목적하에 만들어진 건전가요로 정부와 방송사에 의해 전 국민의 인기곡이자 애창곡이 된 노래이다. 

 두 번째 노래는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알려진 정태춘의 5집 앨범 타이틀곡이다. 이 음반은 1990년에 발매되었지만 6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공연윤리위원회(공윤) 측의 심의 따른 가사 수정을 거부하고 제작해서 배포했다. 물론 불법이라 공식적인 유통경로로 판매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은 이런 노래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그릇이 되지 못했다. 정태춘은 이때부터 음반 사전심의 폐지 운동으로 헌법소원을 재기해 6년 만인 1996년, 헌법재판소에서 ‘가요사전심의 위헌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노래이다.

기회가 되면 노래를 직접 들어보길 권한다. 

후렴 부분인 정수라가 부른 “아아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과 정태춘이 부른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은 목소리도 음률도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을 노래하고 있다. 국가의 강요로 만들어진 노래와 국가에 저항해 만들어진 노래의 차이점을 넘어, 우리가 듣고 싶은 노래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강요되고 유통된 노래를 훨씬 많이 듣고 자랐다는 것이 조금 서글픈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 노래 4절 가사에 있는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란 사람과 사건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발표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정태춘은 1990년에 이 노래 가사를 섰고 노래를 만들었다. 그해 1월 22일 우리 정치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모여 ‘3당 합당’을 발표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국민의 1/3밖에 되지 않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25:174라는 최악의 여소야대국면을 맞이해야 했다. 정부는 나라를 이끌어갈 국정 동력을 야당과의 합당으로 모색하려 했다. 먼저 김대중에게 손을 내밀어 이제 편하게 정치도 하고 대권도 잡으라며 했지만, 김대중은 광주의 원흉인 신군부 세력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다며 뿌리쳤다. 다음은 또 다른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인 김영삼에게 손을 내밀었고, 제2야당으로 입지가 다소 약했던 김영삼은 차기 대선을 바라보며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종필 역시 유신정권의 본당으로서 여당의 제의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때 김영삼이 ‘3당 합당’ 할 당시 명분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였다. 잡았는지 잡아 먹혔는지는 역사가 평가할 문제다. 이제 계산을 해보자.

 

앞서 기억하라고 한 수치를 잠시 가져와 보자.

제13대 총선 성적표 기억하는가?

노태우의 민정당이 125석, 김대중의 평민당이 70석, 김영삼의 민주당이 59석, 김종필의 공화당이 35석으로 여당이 125석, 야당이 174석이었다. 

이제 3당 합당 후 다시 계산해 보자.

민정당은 총선 이후 무소속 2명이 합류해 127석이 되어있었고, 민주당은 3당 발표 후 노무현 등 5명이 탈당해 54석, 공화당은 1명이 탈당해 34석이었다. 또한, 3당 합당이 알려지자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등 2명이 추가 입당했다. 

그러면 127석(민정당)+54석(민주당)+34석(공화당)+2석(무소속)=217석(민주자유당)

이렇게 독자 개헌까지 가능한 한 지붕 세 가족,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때 내세운 합당 명분이 ‘보수대연합’이었고, 이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힘 있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때 ‘보수대연합’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은 선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신한국당(1996~1997)-한나라당(1997~2012)-새누리당(2012~2017)-자유한국당(2017~2020)-미래통합당(2020)-국민의힘(2020~)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보수 제1당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1987년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당시 대선 주자들은, 세(勢) 몰이하며 전국을 지역감정으로 산산조각 내 버렸다. 제13대 대선에서는 지역을 기반으로 노태우는 대구·경북, 김영삼은 부산·경남,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에서 대부분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3당 합당 후 전국이 호남대 비호남의 구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에서 이야기한 “하루아침에 배신의 칼을 찬 민주인사”는 바로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대한민국 정치를 10년 이상 후퇴시켜 버렸다. 아니 그로 인한 후유증까지 고려하면 더 길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후술 하겠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IMF 구제금융을 들여옴으로써 경제도 10년 이상 후퇴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하고 넘어가자.

나는 부산에서 꽤 이름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다. 난 잘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잘난 선배들과 야구부 덕분에 유명한 학교였다. 그중 한 사람도 앞에서 이야기한 위대한 민주인사였다. 1992년 내가 3학년 일 때 개학을 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기억한다. 대선을 앞두고 모교 방문 행사가 있었다. 우리는 이틀 전부터 선배님 맞이 예행연습을 했다. 선배님이 교문 앞에 도착하면 전교생이 양옆으로 길게 서 있으면서 큰 박수와 함성으로 맞이하고, 선배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따라 재학생이 뒤따라 붙으면서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팔을 하늘로 높이 치켜올려 “영삼 영삼”을 계속 연호하면서 따라가는 것이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선배님이 도착할 때의 아우라에 압도되었다. 구덕산 골짜기 밑에 있는 조그만 도로에 생전 처음 본 까만 리무진 13대가 일렬로 줄지어서 교문을 향해 오고 있었다. 역시 거대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재학 당시에는 민주인사 외에도 많은 선배가 다녀갔다. 그럴 때면 우리는 운동장에서 한두 시간씩 선배님의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국회의원, 장관, 쓰리스타 등 주로 정치권이나 정치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러고 나면 책상 위에는 대학노트 80매짜리 1권이 올려져 있었다.           




롤러코스터 지지율을 탄 김영삼정부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초에 90%를 넘는 지지율을 기록할 때도 있었지만, 임기 말에는 최저 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의 정치 역정(歷程)도 임기 때의 지지율만큼이나 다이내믹하다.

1954년 이승만의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들어온 그는 만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데, 이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이다. 그런 그가 이승만의 장기집권 계략이었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으로 당적을 갈아탄다. 이후 그는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야권 지도자로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신군부 및 유신 본당 세력과 손을 잡음으로 인해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산은 모두 잃었지만, 대통령 자리는 얻을 수 있었다. 30여 년 동안 이어진 무신정권이 끝나고 문신 정권이 탄생했지만, 군인과 손을 잡은 것은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국민과 민주 세력에게 배신행위였음을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라고 했고, 취임 초 그의 호랑이 잡는 솜씨에 국민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하나회 해체부터 시작한 그의 칼날은 금융실명제 실시·역사바로 세우기·조선총독부건물 해체· 공직자 재산공개 등 권위주의와 적폐청산을 위한 거침없는 칼 솜씨에 국민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나회의 청산으로 대한민국에서 군부 쿠데타의 위협이 사라졌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정경유착과 부패 등 검은돈의 고리를 끊는 기반을 만들었다. 역사바로 세우기와 조선총독부 건물해체로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이것만으로도 김영삼 대통령은 대단한 업적을 이룬 대통령이 맞다.


하지만 측근의 정경유착과 끊임없이 발생하는 대형사건사고, 그리고 임기 말 터진 국가 부도 사태와 전두환·노태우 사면까지, 그의 임기 말에 국민은 절망을 경험해야 했다. 마침내 그는 호랑이를 잡은 듯 보였지만 총칼이 아니라 밥줄로 국민을 옭아매는 더 큰 호랑이를 길러낸 것이다. 게다가 몸집이 엄청나게 큰 수입 호랑이도 함께 데려다 놓았다. 

 그의 정치 역정만큼이나 대통령 임기도 화려했다. 만남보다 헤어짐이 중요하고, 처음보다 끝이 중요하듯 국민의 머릿속에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되지는 않는 듯하다. 

 X세대는 그가 만들어 놓은 IMF 구제금융 이후의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이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는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이는 박정희 정부부터 이어져 온 개발독재와 안전불감증 그리고 정경유착과 관료 안일주의 등 그동안 켜켜이 쌓인 부조리가 이 당시에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는 김영삼 정부의 관리책임을 물어 지지율 폭락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인명 피해가 컸던 대형 사고만 살펴보도록 하자.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사고(사망 29명, 부상 48명)

1993년 3월 28일 부사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사망 78명, 부상 140여 명)

1993년 6월 10일 연천 예비역 훈련장 폭발 사고(사망 20명)

1993년 7월 26일 목포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사망 68명, 부상 5명)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사망 292명)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고(사망 32명, 부상 17명)

1994년 10월 24일 충주 제5호 화재사고(사망 25명, 부상 33명, 실종 1명)

1994년 12월 7일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사망 12명, 부상 65명, 실종 1명)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사고(사망 101명, 부상 202명)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20명)

1997년 8월 6일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사망 228명, 부상 26명)          




김영삼정부 주요 사건     


1993.01 한호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출판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 29명 사망, 48명 부상, 370여 명 이재민 발생

               MBC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 첫 방영(~03.09)

            장현철, ‘걸어서 하늘까지’ 발표

1993.02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

            프로야구 양준혁, 사상 첫 억대 타자 등극 – 1억 1천2백만 원에 삼성 입단

1993.03 김영삼대통령, ‘궁정동 안가’ 철거 후 시민공원 조성 결정

            김영삼 대통령, 군 사조직 ‘하나회’ 청산 시작

            강산에, ‘... 라구요’ 발표

            부산 구포역, 무궁화 열차 탈선 사고 – 사망 78명, 부상 140여 명 발생

            김종서, ‘겨울비’ 발표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출판

1993.04 시민단체, 환경운동연합 창립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추대

            영화, ‘서편제’ 개봉 

            신승훈, ‘널 사랑하니까’ 발표

            전국 200여 개 대학 총학생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결성

1993.05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출판

1993.06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발표

1993.07 이인화, 『영원한 제국』 출판

            영화, ‘쥬라기공원’ 개봉

1993.08 대전엑스포 개막(08.07~11.07)

            김영삼대통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발동

            ‘대학수학능력시험’ 첫 실시(08.20)

1993.09 영화, ‘도망자’ 개봉

               MBC드라마, ‘파일럿’ 첫 방영(09.13~11.02)

            홍정욱, 『7막 7장』 출판

            김건모, ‘핑계’ 발표

1993.10 서해 페리호(110톤급) 침몰 – 292명 사망

            부활, ‘사랑할수록’ 발표

1993.11 ‘무소유’ 성철(1912~1993) 스님 입적

            국무회의, <병역법개정안> 의결 – 방위병 폐지, 상근예비역·공익근무요원 제도 신설

            2차 대학수학능력시험 실시

            박진영, ‘날 떠나지 마’ · 윤종신, ‘오래전 그날’ · 황규영, ‘나는 문제없어’ 발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1993.12 영화, ‘투캅스’ 개봉

1994.01 MBC드라마, ‘마지막 승부’ 첫 방영(01.03~02.22)

               MBC드라마, ‘서울의 달’ 첫 방영(01.08~10.15)

            박찬호, 미국 메이저리그 첫 진출(LA다저스 입단)

            정태춘, 음반 사전심의 거부로 불구속 기소

            이우혁, 『퇴마록』 출판

1994.02 1995학년도 대학입시제도 개선안 발표 – 수학능력시험 연 1회 실시

            박상민, ‘멀어져 간 사람아’ 발표

1994.03 전교조 해직교사 1,135명, 4년 만에 교단 복귀

1994.04 우루과이라운드 비준반대 집회 – 전국 3만여 명 가두 행진

1994.05 강산에, ‘넌 할 수 있어’ 발표

1994.06 MBC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첫 방영(06.06~07.26)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결정 – 1995.08.15.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북한, IAEA 탈퇴 – 생필품 사재기 열풍, 미국 핵시설 공격 계획 수립

            김광석, ‘서른 즈음에’, ‘일어나’ 발표

            공지영, 『고등어』 출판

            김영삼대통령, 남북정상회담 합의(06.28) – 07.25 평양방문 예정

            가톨릭농민회,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 창립 – 농산물수입개방 반대

1994.07 전여옥, 『일본은 없다』 출판

            북한, 김일성(1912~1994) 사망 – 남북정상회담 무산

            김일성 ‘조문파동’ 전개

               MBC드라마, ‘느낌’ 첫 방영(07.20~09.08)

            더 클래식, ‘마법의 성’ 발표

1994.08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발표

            서강대 박홍 총장, ‘주사파’ 발언 논란

1994.09 참여 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 창립

            지존파 7명 체포 – 엽기 연쇄 살인 조직

1994.10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 개봉

            조관우, ‘늪’ 발표

            대입 본고사, 14년 만에 부활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영화, ‘포레스트 검프’ 개봉

            성수대교 붕괴 – 32명 사망자 발생

1994.12 국군평시작전통제권, 유엔사령부로부터 환수

            국회, WTO 비준동의안 통과 – 찬성 152, 반대 58

1995.01 방위병(단기사병) 제도 30여 년 만에 폐지 – 공익근무요원제 실시

            쓰레기 종량제 실시

            김건모, ‘잘못된 만남’ 발표

            케이블 TV 첫 시험방송 개시

               SBS드라마, ‘모래시계’ 첫 방영(01.09~02.16)

            세계화추진위원회 발족

            [국제]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1995.02 포털, ‘다음커뮤니케이션’ 설립

1995.03 5개 직할시, ‘광역시’로 변경

            케이블 TV 20개 채널 개국

            한국통신, 발신전용 휴대전화 시티폰 서비스 실시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 설립

            룰라, ‘날개 잃은 천사’ 발표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출판

1995.04 4·19 묘역, 국립묘지로 승격

            대구지하철 공사장 도시가스 폭발사고 – 101명 사망, 부상 202명

               DJ DOC, ‘머피의 법칙’ 발표

1995.06 영화, ‘다이하드 3’ 개봉

            영화, ‘브레이브 하트’ 개봉

            제1차 동시지방선거 실시 – 민자당 참패, 조순(민주당) 서울시장 당선

            삼풍백화점 붕괴 – 502명 사망, 937명 부상, 20명 실종

1995.07 부동산실명제 실시

1995.08 양귀자, 『천년의 사랑』 출판

            국내 최초 위성, ‘무궁화 1호’ 발사

            윈도 95 출시

1995.09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 총재 김대중

1995.10 수출 1,000억 달러 돌파

1995.11 교육부, 4가지 기본요건 충족 시 대학설립 가능한 『대학설립준칙안』 발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노태우, 수천 억 비자금 사건으로 서울구치소 구속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개봉

            윈도 95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2.0 최종 버전 출시

1995.12 전두환, 수천억 비자금 사건으로 안양구치소 구속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개칭

            국회,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의결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돌파     

1996.01 일제 말 사용된 ‘국민학교’ 명칭, 50여 년 만에 ‘초등학교’로 변경

            한국이동통신 세계 최초 CDMA 디지털 휴대전화 상용서비스 개시

            김광석(1964~1996) 자살(01.06)

            전두환·노태우 등 5·18 관련자 8명 기소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1996.02 모든 재난신고 ‘119’로 일원화

1996.04 영화, ‘꽃잎’ 개봉

            박찬호, 메이저리그 첫 승

            15대 총선거 실시 – 신한국당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민주당 15석

1996.05 클론, ‘쿵따리 샤바라’ 발표

               FIFA, 2002년 월드컵 한국·일본 공동개최 결정

1996.06 국내 첫 인터넷쇼핑몰, ‘인터파크’ 설립

            음반 사전심의제 폐지

            교육부, 1997년부터 전국 읍·면 소재 중고교 학교급식 실시 발표

            서울 시내버스, 버스 카드제 실시

            영화, ‘미션 임파서블’ 개봉

1996.08 서울지방법원, 전두환·노태우에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무지징역 선고

               HOT, ‘캔디’ ‘전사의 후예’ 발표

1996.09 프로야구 박재홍, 국내 프로야구 첫 ‘30(홈런)-30(도루)’ 달성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1996.10 MBC, ‘남자 셋 여자 셋’ 첫 방영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출판

1996.11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 이경규가 간다’ 첫 방송

            조선총독부 건물 완전 철거(11.13)

1996.1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번째 공식회원국으로 가입

            서울고법,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 선고

            국회, <노동관계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 민주노총 파업 시작

1997.01 신창원 부산교도소 탈옥 – 1997.07 체포(2020.10. 출소)

            첫 공군사관학교 여성생도 20명 입학

            한보철강(재계자산 순위 14위) 부도

            박상민, ‘무기여 잘 있거라’ 발표

1997.02 한국프로농구 출범

            영화, ‘타이타닉’ 개봉

1997.04 DJ DOC, ‘DOC와 춤을’ 발표

            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 확정

            황장엽(전 북한노동당 비서), 서울 망명 – 북한의 개혁·개방 촉구

1997.05 젝스키스, ‘사나이 가는 길’ · ‘학원별곡’ 발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97.07 쌀·쇠고기 제외 농수산물 수입시장 개방

            쿨, ‘해변의 여인’ 발표

            서울지방법원, 12·12 관련 재심선거공판에서 계엄사령관 정승화 무죄 선고

            이회창,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임재범, ‘고해’ 발표

            자동차 보유 1,000만 대 돌파

1997.08 영화, ‘넘버 3’ 개봉

1997.09 이인제 경기지사, 신한국당 탈당 및 대통령 출마 선언

            영화, ‘접속’ 개봉

1997.10 KTF(016), LG Telecom(019), 한솔 PCS(018), PCS 상용서비스 개시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한국형 뮤지컬 ‘난타’, 호암 아트홀에서 초연

            주가지수 500선 붕괴

            새정치국민회의-자민련, 대통령 단일후보로 김대중 결정(DJP연합)

1997.11 신한국당-민주당, 이회창·조순 총재 후보단일화 및 양당통합 합의

            신한국당·민주당 통합 – 당명 ‘한나라당’으로 결정

            정부,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11.21)

            영화, ‘편지’ 개봉

1997.12 캉드쉬 IMF 총재와 긴급자금지원 합의서 서명 – 총 210억 달러 승인

            김영삼대통령, 국가부도사태 관련 대국민사과 담화 발표

            제15대 대통령에 김대중(40.3%) 당선, 이회창(38.7%)·이인제(19.2%)

            전두환·노태우 사면복권

            원화 환율 사상 최고치 기록 – 1,99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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