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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X세대론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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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Sep 25. 2024

3-1. 대한민국 이전 50년 동안의 한반도 정치변화

군주정·식민지·미군정·민주정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     

X세대가 태어나기 100년 전, 조선은 대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발전에 힘입어 인류의 생활습관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경제·문화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더불어 각각의 나라마다 역학관계도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무기와 선박, 신식문물 등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기술은 동서남북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영국과 가까이 있는 나라 순으로 산업혁명은 전파되었고, 산업화를 빨리 이룩한 국가는 제국주의가 되고, 늦게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국가는 식민지가 되었다. 비서구권 국가 중에서는 일본이 산업화를 빨리 받아들이며 유일하게 산업화에 진입하게 되었다.

 

조선은 영국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나라였고, 더군다나 청나라 외에는 담을 쌓고 사는 나라였다. 또한, 당시 조선은 2500년 전의 공자님 말씀을 받들기에 여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는 등한시했다. 유교 사상을 거스르거나 반하는 것은, 모두 이단으로 취급받거나 배척당했다. 예수님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문물은 오랑캐의 것이라 치부되었고, 전념된 사람은 죽이고, 새로운 기술과 문물은 배척당했다,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산업혁명을 일찍 받아들인 나라들은 동쪽 대륙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나라를 수시로 드나들며 괴롭혔고, 한반도 인근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였던 일본, 러시아, 청나라도 서로가 자기들이 조선을 보호해 준다면 거들먹거렸다. 

공자님 말씀이 곧 법이었던 조선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외세에 국운을 맡기고 운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조선을 버리고 제국을 선포했다.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전 세계에 당당한 독립국임을 알렸다. 하지만 이는 외교권과 더불어 국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한반도의 마지막 전제군주국가였던 대한제국은 13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대한제국의 모든 권한은 ‘한일합방’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이 가져갔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36년간 우리는 일본의 발밑에 엎드려 살아야 했다.     

 

대한제국이 사라진 날 마지막 황제(순종)의 일성은 이러했다.

“.... 짐이 이에 결연히 스스로 돌이켜 보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전국)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나라의 형편과 사정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 순종 3년(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실록』 황인희 P393     

 

한반도에서의 전제정치 즉 군주제는 국민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주 자신이 일본에 무릎을 꿇으면서 끝이 났다. 전제정치는 그랬다. 나라의 주인은 왕이었고, 왕이 나라를 바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한반도에서 쫓아내고, 러일전쟁 승리로 러시아를 한반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무혈입성하다시피 대한제국을 집어삼켰다. 그 어디에도 국민은 없었다.      

 

다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큰 영향을 미친 <대동단결선언>의 핵심내용을 살펴보자. 이는 1917년 신규식·박은식·신채호·조소앙·신석우·박용만·한진교 등이 참여했고 조소앙의 작성한 선언문이다.

“융희(순종)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들이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사이에 순간의 쉼도 없다. 우리 동지들이 주권을 완전히 상속하였으니,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하는 때요, 구한국 최후의 하루는 곧 신한국 최초의 하루다..... 그러므로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곧 우리 국민 동지들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우리 동지들은 당연히 주권을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조소앙, <대동단결선언>, 1917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의 500년의 케케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통쾌하지 않은가?     

 다음은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와 상해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비교해 보자.


<대한국 국제> 1899년 8월 17일 공포

제1조 대한국은 세계가 공인한 자주독립의 황제국이다.

제2조 대한국 정치는 오백 년을 이어 왔으며 만세불변할 전제정치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4조 대한국 신민이 군권을 넘볼 경우, 행동을 했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신민이 아니라 할 것이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군, 해군을 통솔하며 편제를 정하고, 계엄령을 내리거나 해제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1919년 4월 11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모두 평등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서신 교환, 주소 이전 및 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가짐.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짐.     


 <대한국 국제>와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첫 다섯 조항만 비교해 보았다. 

 불과 20년 사이에 한반도에 일어난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자리에서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처음 탄생했다. 


전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왕권 대신에 민권이 국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대동단결선언>에서 이야기하듯 대한제국의 전제군주는 일본 황제에게 나라를 바치다시피 헌납했다. 그 어디에도 국민은 없었다. 하지만 대동단결선언에서는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때라고 천명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시피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민주 공화정은 1919년에 시작된 것이 맞다. 하지만 여전히 일제강점기 아래 있었고, 임시정부는 타국에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해방 그리고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3일 뒤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미국과 소련의 사전 약속대로, 소련은 만주국을 점령하고 한반도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는 한반도의 또 다른 불행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미국은 국내외의 어떠한 독립운동 단체도 인정하지 않았고, 9월 9일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군정을 시작하게 된다. 참으로 기구한 한반도의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미군정’의 법률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랭켈’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앞세워 ‘미군정’의 한반도 점령을 정당화했다.

1. 조선의 해방이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파기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고, 합병 이전의 조선을 부활시킨 것이 아님.

2.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 의한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음

3.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연합국의 결의에 따른 것이므로 현재 한반도는 어떠한 세력도 영향력이 없는 주인이 없는 땅임.     

 

소련의 신탁통치를 등에 업은 김일성과 미국의 신탁통치를 등에 업은 이승만은 통일된 조국에는 관심이 없고 개인의 권력을 앞세웠다. UN은 한반도 내에서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 안이 가결되었으나, 소련의 반대로 결국 남한 단독 선거 수립 안이 결정되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태평양전쟁 당시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까?

남북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고 끝까지 통일을 고집했다면 한반도는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그럼 지금 한반도는 어떤 국가가 되어있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     


여하튼 대한민국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남과 북이 다른 정부를 세우면서 탄생했다. 

힘 있는 나라의 영토에서는 절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은 힘 있는 나라에 의해 침략을 당하든, 강대국 사이의 싸움에서 전장을 빌려주든 힘없는 나라의 영토에서 일어난다. 6·25 전쟁 역시 북한이 남침한 것은 사실이지만, 냉전 속에서 강대국끼리의 싸움에 전장을 제공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대한민국에 크나큰 시련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고, 한민족 통일을 요원하게 만드는 사건이 되었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정치적인 사건, 국민에 대한 탄압, 기득권의 체제 유지 등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주홍글씨를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60만이라는 대군이 필요하게 되었고,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 징병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으며, 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큰 집단이 되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군부는 두 번의 쿠데타와 30여 년이 넘는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X세대는 이 모든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에서 자유로운 것이 없다. 반공교육을 받고 징집을 당했으며 항상 머릿속에 불온한 생각이 있지는 않은지 검열을 받으며 살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노회 한 대통령은 오로지 권력 유지에만 심혈을 기울였고, 1960년 갖은 부정선거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기발한 논리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영구집권이 가능하다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이승만 정권 몰락의 단서를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해방 이후 주요 사건     

1945.08 일본 패망, 한국 광복

1945.09 연합군사령관 맥아더,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분할점령책’ 발표

1945.12 모스크바 3 상회의, ‘한국 5개년 신탁통치’ 실시 발표

1948.04 제주 4·3 항쟁 발발(04.03) - 사망자 2만 5천~3만여 명/제주도민 11%가량(~1954.09)

1948.05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05.10)

1948.07 제헌국회, 국호 ‘대한민국’으로 결정(07.01)

            제헌국회, ‘대한민국헌법’ 공포(07.17)

            제헌국회, 초대 대통령 이승만 선출

1948.08 대한민국 정부 수립(08.15)

            북한,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08.25)

            국회, ‘반민족행위처벌법’ 의결(09.07)

1948.09 북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수립(09.09)

1948.12 국회, 국가보안법 공포(12.01)

1950.04 농지개혁 시작

1950.06 북한군 남침, 한국전쟁 발발(06.25)

1952.08 제2대 대통령 선거, 이승만 당선

1953.07 <휴전협정> 조인(07.27)

1954.11 초대 대통령 무제한 중임 개헌안 의결 - 사사오입 개헌

1956.05 제3대 대통령 선거, 이승만 당선

1960.03 제4대 대통령 선거, 이승만 당선(03.15)

             3·15 부정선거 마산봉기(03.15) - 4.11 마산 앞바다 김주열 시신 발견

1960.04 4·19 혁명 발발, 이승만대통령 하야(04.26)

1960.06 국회, 제3차 헌법개정안 ‘의원내각제 의결·공포’(06.15)

1960.08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윤보선’ 선출(08.12) - 제2공화국 출범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에 ‘장면’ 인준(08.19)-장면 내각 정부 수립(08.23~1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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