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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Mar 01. 2024

순수하고 잔인했던 우리 어린 시절과 톡식 매스큘리니티

클로즈(2022)

    레미와 함께 푸르른 들판을 자유롭게 달린다. 저 멀리 농장에서 가족들이 일하는 소리가 들린다. 근처 공터에서 마음껏 뛰놀다 레미와 함께 가족들이 일하고 있는 농장을 향해 내달린다. 늦은 오후 햇볕은 따사롭고 상쾌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풀냄새와 흙냄새가 콧가를 맴돈다.

    레미와 나는 절친한 친구다. 나는 레미와 모든 것을 공유한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우리 둘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레미의 방은 내 방처럼 익숙하다. 그 방에서 우리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 하고, 놀고, 웃고, 잔다. 가끔 나는 오보에를 연주하는 레미의 유일한 관객이 되기도 한다. 오보에를 연주하는 레미는 아름답다. 레미는 분명히 훌륭한 오보에 연주자가 되어서 세계를 여행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중학교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우리 세계가 완전히 변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등교 첫날을 기억한다. 레미와 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학교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이 그룹을 지어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리 지르는 아이, 손바닥 치며 웃는 아이,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아이… 아마 레미와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긴장은 했지만 동시에 새 학교생활이 기대되었다. 레미도 내 옆에서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미가 있어서 안심이었다.

    레미와 나는 학교에서도 꼭 붙어 다녔다. 함께 등하교하고, 점심 먹고, 쉬는 시간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우리는 함께 했다. 내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교실에 한 아이가 우리 사이에 관해 물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쉬는 시간, 반 여자애 하나가 레미와 내가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보았다. 단순히 호기심 어린 질문이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여자애의 표정과 말투에서 가시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마치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 여자애 옆에 선 다른 여자애들도 모두 짓궂은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미와 나는 형제처럼 가까운 친한 사이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그 애들은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답답했고, 이상하게도 부끄럽고 불편했다. 얼마 전 반 남자애 하나가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치고 지나가며 게이라고 놀린 적이 있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레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레미네 집에 놀러 가는 횟수가 줄었고 학교도 혼자 등교하기 시작했다. 또 활달한 남자아이들이 하는 아이스하키부도 가입했다. 레미와 나는 점차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세계는 세포 분열하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나만의 세계에서, 그는 그만의 세계에서 성장할 것이다. 모든 게 그렇게 다 잘 지나가리라 믿었다. 하지만 레미는 거리를 두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세포 분열하기 시작한 우리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내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말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치유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피가 흘러 멎지 않을 것 같은 상처도 언젠가는 딱지로 굳어지고 새살이 돋는다. 피가 흐르고 따갑기만 한 내 마음의 상처도 흉터가 남을지언정 아물 것이다. 계절이 가고, 꽃은 다시 핀다. 나는 다시 웃을 것이고, 가족들이 일하는 농장에서 푸르른 들판을 다시 달릴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슬픈 눈으로 뒤돌아볼 것이다. 저편에 있는 상실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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