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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pr 20. 2023

‘문화역서울284’에서 구보를 생각하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고

  35년 전이었다. 그때 우리는 추석 귀성열차 표를 구하지도 못했다. 표는 구할 수 없어도 고향엔 가야만 했다. 왜 가야 하는지 고민할 것도 없이 가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과감히 무임승차를 선택하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지금은 전철로도 갈 수 있는 평택, 그곳을 지나가는 기차는 서울역에서만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기차에 올라타서 내릴 때 역무원에게 기차표값을 내기로 작정했다.

   서울역 2층 대합실에 들어섰을 때, 짐을 이고 지고 온 인파 속에서 과연 기차를 탈 수 있을까 고민해야 했다. 서울이 고향이었기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광경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 빽빽한 인파를 뚫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인 것은 역무원이 기차표를 검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좁은 개찰구 앞에서 남편은 내 등을 잡고 밀어 사람 틈새로 쑤셔 넣었다. 박민규의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 등장하는 푸쉬맨 같았다.  등이 아픈 것도, 가슴이 답답한 것도 느낄 틈이 없었다. 온몸이 구겨진 채로 개찰구를 빠져나와 기진맥진한 상태로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도 콩나물시루였다. 숨 쉴 틈 없는 상황 속에 나타난 행운은 바로 눈 앞의 빈 좌석 하나. 무조건 앉아서 숨을 내쉬었다. 수원역에서 탈 사람의 자리였다.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수많은 군중 틈에서 경험도 해보지 못한 6·25전쟁의 피난 길이 떠올랐던 건 지나친 상상이었을까?

   그때의 서울역은 가슴 따뜻한 추억의 장소가 아니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타향살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찾는 곳이었고, 도시의 화려함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와 첫발을 내딛는 곳이었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1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독을 느끼고,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 구보가 경성역에서 발견한 것은 오히려 고독이었다. ‘구보가 한 옆에 끼어 앉을 수도 없게스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그것은 자기네가 타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은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었다.’ 그곳에서 구보가 발견한 사람은 ‘늙고 쇠잔한 노파, 부종이 있는 중년의 시골 신사, 바세도우씨병이 있는 40여 세의 노동자, 아이 업은 젊은 아낙네, 황금을 찾아 떠도는 금광 브로커’였다.

   100여 년을 길을 찾아 떠나는 서민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던 곳,  일상생활의 터전이었던 서울역이 바뀌었다.  다시 찾은 옛 서울역의 건물은 복합 문화 공간인 ‘문화역서울284’가 되었다. 전시, 공연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내부는 옛 경성역 때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때마침 수리 중이라 볼 수 없었다. 아쉬웠다.

   건물의 외관은 거의 변함 없었다. 초록색 돔과 빨간 벽돌, 아치형 나무 창문틀이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었다. 건물 한가운데 위치한 대형 시계는 경성역이 생긴 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을 보고 듣고 흐르며 지내왔으니,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제가 경성역을 공들여 지은 이유가 중국, 러시아, 유럽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병참기지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서울역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면서 우리의 아픈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서울역 정초석 왼쪽에 새겨진 3대 조선 총독 사이토마코토의 이름을 훼손한 그 누군가의 마음을 응원하고 싶다. 오른손에 수류탄을 쥐고 서울역 광장에 서 있는 강우규 의사의 동상도 눈으로 쓰다듬어 본다. 경의중앙선 플랫폼 사이에 파란색 지붕의 창고가 있는데, 조선통운창고였던 이곳에서 최초 우리말 사전의 초석이 된 말모이 원고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서울역은 단순한 생활 공간만은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었다.

   광장에서 ‘서울로7017’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집시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지붕 없는 그곳이 집인가 보다. 철제 난간에 이불도 널어놓았다. 건강해 보이지 않는 얼굴에 순진한 웃음과 공격적인 표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의 삶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현재 서울역의 한 조각을 차지하고 있는 노숙자에게서 구보 씨가 경성역에서 보았던 병자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1930년대나 1980년대, 2022년인 현재 서울역에서 느끼는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도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울로7017’로 올라가니 ‘문화역서울284’의 건물과 숭례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층 빌딩 사이에 끼어 있는 그들의 자태가 처연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역사적 흔적과 전통이 잘 보존된 듯도 하지만, 한편으론 화려한 현대 문명 속에서 간신히 한 자락을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서울역 옥상 정원까지 가니 서울스퀘어 건물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화려한 그 건물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주인이었던 기업들이 줄줄이 하향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인생도 이런 게 아닐까? 겉과 속이 다르고, 아는 것과 실재하는 것이 다르고, 살고 싶은 인생과 살아가는 인생이 다른 것 같다.

   아래로 눈길을 돌리니 철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고, 넓은 도로를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세월도 그렇게 이어지며 지나가겠지? 구보 씨가 하루를 보낸 마음과 현재 나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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