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아이는 누구일까.
파친코 소설 속 주인공 선자의 첫째 아들 노아가 죽음을 택했다. 일본 속 조선인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3대에 걸쳐 보여주는 이 책에서 나는 다른 것보다도 노아의 죽음이 가장 안타깝고 인상 깊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워 눈물이 계속 흘렀다. 노아가 살아온 삶이 아까워서, 그렇게 참아왔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다니..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나는 한동안 책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노아가 어떤 아이인가.
노아는 선자가 오사카로 건너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아이였다. 사생아로 태어나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면서 어릴 때부터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고 순종적이었으며 엄마가 속상할까 봐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던 아이였다. 가난도 절망도 멸시도 꿈을 꾸며 참아냈다. 노아의 꿈은 일본인으로 사는 것.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좌절과 멸시를 받으면서 꾸게 된 꿈이었다. 그랬던 노아가 야쿠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며 어머니의 곁을 떠난 뒤 16년 만에 찾아온 엄마를 만나고 난 후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모든 것을 견뎠지만 야쿠자의 피가 자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바꿀 수 없다는 것에 절망했던 것일까. 아니면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아온 세월 동안 낳은 자녀들에게는 끝까지 자신이 살아온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왜 그래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노아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하면 감히 상상하기조차 죄스러웠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힘들어도 잘 이겨내는 노아가 기특하다고만 생각했지 그 마음을 다 알지는 못했다. 소설의 내용 중에는 한인 소년의 자살 사건을 통해 노아의 죽음을 암시해 주는 장면이 있다. 그 소년이 자살을 택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의 따돌림과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된 일상에서의 멸시들은 노아의 인생을 통틀어 괴롭혀 왔다. 경계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버텨내야만 했던 것이다.
엄마인 선자는 그런 노아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지만 노아의 아픔을 다 알아차려주지는 못했다. 선자는 좋은 엄마였고 강인했고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였지만 노아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둘째인 모자수는 달랐다.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는 임신한 선자를 위기에서 구해주기 위하여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고 오사카로 선자를 데리고 온 이삭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이삭은 모자수가 어릴 때 고문후유증으로 죽게 되어 모자수를 키울 수 없었고 따라서 이삭의 선한 가르침과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던 아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모자수는 참지 않았고 표현했다. 그 표현이 과격했다 할지라도 모자수는 노아와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내었다. 표현을 했기 때문에 지옥 같았던 학교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모자수는 학교를 나와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고 크게 성공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인재인 모자수의 아들마저도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일본인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파친코에 종사하는 것을 선택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노아와 모자수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자녀가 노아처럼 착하고 똑똑하고 순종적인 아이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인 우리의 욕구는 채워줄지 몰라도 아이가 정말 원하는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참고 내색하지 않는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노아와 모자수가 나의 아이들과도 성격이 닮았다고 느꼈다. 첫째는 바르고 순종적이지만 둘째는 늘 다루기 힘들고 골치를 아프게 하는 아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나 편하자고 내 자랑삼으려고 아이의 힘듦을 모른 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지 않다. 자신의 욕구를 겉으로 표현하는 둘째가 오히려 더 건강한 마음을 가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많이 대화하고 강요하지 않되 절망하지 않도록 다독여주는 엄마로 자라나길,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가 되어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