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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an Jun 06. 2023

환경의 날에 더욱 외로운 비건

저탄소 식사와 비건 생활의 애로 사항

어제였던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이었다. 비거니즘은 동물권 문제와 직결되지만, 저탄소 식단으로 환경적인 의미도 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덜 조리한 식단으로 저탄소 오브 저탄소 식단을 챙겨 먹어야지 다짐하고 뉴스를 읽어 내렸다. 그러다가 다음날인 현충일을 육육 데이라고 부르며 고기 소비를 촉진하려는 마케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쌀 소비량보다 고기 소비량이 많은 나라인데 굳이 또 이걸 현충일에...라고 생각하며 밥이나 먹었다.


생채소가 많은 식단을 먹다 보면 미각이 오히려 예리해지는 느낌이 든다. 재료 각각의 맛을 더 잘 이해하게 되기 때문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날카로워진 미각은 작은 맛의 차이도 감지해 낸다. 그러니 요리할 때 너무 좋다. 그래서 특별한 요리를 준비하는 기간에는 한 끼를 생채소가 많은 식단으로 챙겨 먹기도 한다.


미처 거르지 못한 옥수수수염도 등장한다.


내가 어제 먹은 이 저탄소 샐러드는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초당 옥수수, 엄마 아빠가 밭에서 기른 제철 완두, 토마토, 기름 없이 오븐에 구운 버섯과 레몬, 굵은소금과 백후추, 청양고추가 전부인 단순한 한 끼지만 정말 맛있었다. 6월의 땅이 주는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하지만 나는 술도 좋아하는 비건이다. 퇴근하고 저녁이 되자 친구들과의 술 한 잔이 그리워진다. 예전의 나였다면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니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쉽게 그런 욕망을 포기한다. 장소를 정하는 것도 문제고 1차 자리를 정한다 해도 2차를 가는 것도 문제다. 골치 아프다. 그냥 집에서 원래 계획했던 레시피 연구에 몰두하기로 한다. 요리는 즐겁지만 지금의 나 조금은 외롭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었던 일들, 따르던 가치들이 틀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류가 확실하게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미련이 남더라도 나는 그 믿음을 버리는 편이다.


비건 지향인의 생활은 4년을 채워가는 중인데, 나는 비건 지향이 내가 추구할 일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 생활을 버릴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처음엔 깊이 숙고해 본 적 없는 과학적인 근거-동물은 고통을 느낀다. 고통이 포유류의 것이라고 쉽게 짐작하지만 해양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예컨대 낙지와 문어의 다리에는 뉴런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살아있는 낙지나 문어 다리가 잘려 나가 꿈틀거리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문어가 소리를 내진 않겠지만 그 모습이 처절한 고통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과학적 판단이다. 관습적으로만 보던 장면의 의미가 과학적 연구와 사실로 인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로 새롭게 세상을 보며 동물 착취의 현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동물성 단백질은 맛있다고 여전히 생각했다. 과학이 던져 준 새로운 인식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어쨌든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이 사실을 곱씹다 보면 윤리적인 행위의 문제를 맞닥뜨린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괴롭히는 게 옳은 일인가?” 사람은 본래 잡식성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답변이 가장 그럴듯해 보였으나 자연주의적 오류-어떤 사실에 대한 명제를 근거로 도덕적 가치 판단에 대한 명제를 도출하는 것. 예를 들어 가부장제는 존재하는 현상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덕적 당위를 갖춘 제도가 아니다. 이때 현상을 근거로 당위를 주장하는 게 자연주의적 오류다.-라는 반박을 접하게 된다. 그 뒤 나는 감정과 논리가 혼합된 판단을 내린다. 나는 남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행위가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온 것이라 해도, 그 행위의 주도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비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 결국 내려졌다. 나는 비건이 되어버렸다. 한순간에 모든 동물성 식품을 끊고 유제품과 달걀도 먹지 않기로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후 나는 다소 외로워졌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순간 외로움을 느끼지만, 나는 늘 편하게 볼 친구들이 있는 편이었다. 물론 비건 지향만이 이 외로움의 원인은 아니다. 가까운 친구들 몇몇은 일을 시작했고 해외에 가면서 보는 것 자체가 연례행사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볼 친구들은 있었다. 어느 날 그중 한 명인 꽤 오랜 기간 가까이 지냈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비건 베지테리언까지 포함하는 사업 하면 어때?

-응? 나는 유제품도 달걀도 안 먹는데 친구야 무슨 소리야^^?

-아니, 비건만 하면 너무 폭이 좁잖아.

-그래도 내가 의도적으로 먹지 않는 음식을 파는 건 불편할 거야.


(그리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종종 그 친구는 비거니즘 내지는 채식을 돈이 될만한 아이템이나 콘텐츠로 보는 모습을 보였다. 비거니즘은 당연히 재밌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비건인 내게 비거니즘을 사업적으로만 보는 모습이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이 보는 비건은 예민함과 유별남 그 자체인데 더 유난을 떨어 좋을 게 뭐가 있냐고 자신을 검열해버리고 말았다. 우리 사이가 늘 화목했던 건 아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적어도 내쪽에서는 어떤 거리감 내지는 불신이 생겼다. 그게 시작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불화하다가 이제는 서로를 안 본다.


이 일뿐만 아니라, 친구들은 자신이 고기를 먹는 이유를 계속 내게 설명하면서-내가 특정한 누구에게 딱히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육식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나를 신기해하기도 하고, 은근히 만날 장소 선정을 내게 맡겨 버린다. 여러모로 편안하지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불편함을 느끼다가도, 친구들이야말로 나를 의식하느라 불편할 수도 있다는 자기 검열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니 만남은 내게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단비는 내린다. 어쩌다가 논비건 메뉴 천지인 술집에 갔을 때, 내가 먹을 게 있는지 먼저 살피고 물어봐주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엔 내가 민망하고 미안해서 다음엔 안 오는 게 낫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채식 내지는 채식 프렌들리 한 삶을 시작한 친구들도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또 만감이 교차한다.


친구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그들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나를 대하고 받아들이는데 그들도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고마운 마음도 든다. 아무리 리버럴 한 친구들이 많은 나라고 해도, 우리는 모두 다름을 대하는 방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사회에서 컸다. 반대로 내가 논비건이었고, 누군가 비건이 되었다면, 나도 그 다름을 완벽하게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참고로 연애도 쉽지 않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혼자라고 느낀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이 나를 고립시키는 걸까?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멀어져 가고

나는 심술궂고 친구가 없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까 봐 심각하게 걱정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외로워지고 고립되는 건

네가 비건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네 문제야.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여러 몸짓으로, 말로, 눈빛으로 말하던 “너는 우리와 같을 수 없어.”를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쉬운 말이기도 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비건을 하지 말던가 좀 유연해져.


이 말은 일리도 없다. 이미 비인간 동물의 고통을 자각한 인간에게 오늘 하루쯤은 누굴 죽여도 괜찮지?라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럼 비건 친구를 사귀면 되잖아?



이 질문의 답변은 다음 편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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