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김치말이국수와 채수 레시피
나는 할 줄 아는 게 많이 없는 채로 어른이 되었다. 머릿속에 든 이렇다 저렇다 할 지식은 있었지만 어디에 쓸지 모르니 현명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나당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게 좀 있었지만, 해외 주식을 매도한 뒤 들어온 달러를 어떻게 환전해서 내 계좌로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달콤하고 프루티한 향을 플로럴한 향보다 선호한다는 사실을 18살쯤 확신했지만, 22살까지 세탁기를 제대로 돌려본 적이 없었다. 밥도 안 지어봤다. (대단한 집에서 자란 건 아니고 아빠가 힘든 일을 좀 못하게 했다. 엄마도 부엌에 좀처럼 나를 들여보내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 오히려 남동생이 그런 일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하루키가 싫었지만, 나의 하루키 불호는 이 세계에서 크게 쓸모가 없었다. 술자리에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남자애들과 괜한 논쟁으로 술과 시간을 낭비하기나 했다. 철학을 남들보다 조금 더 알았지만, 사람들 인생에 좋은 충고 하나도 던져줄 수 없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해 놓고 대학원에선 고대 그리스어를 배웠으니까. 유용성, 실용성과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졌다. 예전엔 지적 허영심이라도 채울 수 있었지만, 자기 밥벌이를 해야하는 나이가 찾아온 뒤, 내가 배운 것들이 이 세상의 관점에서 정말 가차없이 무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주 무용했다고 볼 순 없다. 데이팅앱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일지 추측해 보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앱에서 매치가 성사된 후 보통 상대 쪽에서 무슨 일 하는지, 뭐 공부했는지 묻는데, 그때마다 나는 러시아어, 고대 그리스어, 철학, 플라톤, 아리스토렐레스와 어쩌고 저쩌고, 자영업자로 이어지는 비슷한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반응은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
오, 대단해요, 멋있어요. (예의 바른 외국인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힙스터 추정 한국인)
고대 그리스랑 고대 로마를 구분 못함. (노코멘트)
어떻게 “그런 것들”만 골라서 배우고 살았나요? (주로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답변. 빈정대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론 유머가 살짝 가미된 말이다.)
사람들을 이렇게 분류하려니 죄책감이 들지만, 답변만 놓고 보자면, 정말 저 세 가지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세 번째 답변을 한 사람과는 만나게 되는 편이었다. 재밌으니까. 그런데 사실 경제학과 출신의 여자와 대화를 했어도 위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세 종류의 답이 나올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내가 공부한 것들이 데이팅 앱에서 조차 딱히 다른 것에 비해 유용하다고 말할 수 없다.
큰 일이었다. 예컨대 어떤 산업이 유망한진 알고 그걸 가지고 돈이 안되는 토론은 몇 시간 할 수 있지만, 투자의 방법도 재무 관리의 방법도 모르는 채로 자본주의 사회를 부유하는 나이만 어른인 존재가 되어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텅 빈 존재가 아닐까 하는 끝없는 의심과 자기 환멸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다가 비건이 되었고, 지향하는 게 있는 삶을 살면서 활력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존재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허는 외부에서 가져온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나를 채워주는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리였다. 나나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직접 요리하는 건 내 외부의 것으로 나를 채우려는 행위와는 거리가 좀 멀다.
이런 이야기가 김치말이국수와 딱히 관련되어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나름대로 연관성이 있다. 이 김치말이국수는 채수를 사용했다. 채수는 아직은 만만찮은 K-비건의 삶에서 익혀야 할 중요한 요리 스킬이다. 비건 다시다나 미원이 있지만, 시간을 들여 채수가 낼 수 있는 깔끔한 감칠맛으로 자기 안의 공허를 살짝 달래는 거 그렇게 나쁘지 않다. 나를 어느 정도 순수하게 채울 수 있는 게 요리라면, 그리고 비건을 지향한다면, 채수 내기는 중요한 “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채수 레시피가 포함된 김치말이국수 레시피를 소개하겠다.
1인분 김치말이국수용 채수 재료와 레시피
다시마 2 조각, 통마늘 2알, 당근 1 조각, 말린 버섯 2(표고나 포르치니), 말린 호박 1조각, 청양 고추, 대파 흰 부분, 양파1/4, 무 1조각, 물 500ml
을 다 넣고 끓이면 완벽하겠지만, 없을 땐, 다시마와 말린 버섯 그리고 대파 정도만 넣어도 꽤 괜찮다. 이 채수 재료는 어디에 써도 좋다. 참고로 서양식 채수를 내고 싶으면 셀러리를 넣어주면 좋다.
이 재료들을 다 넣고 끓이다가 30분쯤 지나면, 김치국물 100ml 정도, 후춧가루 조금, 간장 2큰술을 넣고 10분 정도 조금 더 끓인다. 너무 오래 끓일 필요 없다.
재료를 식힌 뒤 용기에 옮기고 냉장고에 둔다. 하루 전날밤에 하는 게 오히려 편하다. 다음날 차가운 채수가 준비되어 있으니 뭔가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다른 재료들
비건 김치 한 컵, 소면 1인분, 참기름 1큰술, 고명용 쪽파와 버섯, 식초 1큰술, 유기농 설탕 1/2큰술, 소금
비건 김치를 꺼내고 면을 삶는다, 고명들을 준비한 뒤, 면이 다 익기 전 채수를 꺼내 소금과 식초, 설탕을 더해준다. 면이 익으면 꺼내서 차가운 물에 헹군 뒤, 참기름을 더해 골고루 발라준다. 김치에 발라도 되는데 면에 바르면 면이 탱글탱글하게 유지가 잘 된다. 김치랑 면 둘 다 바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너무 기름질 수도 있다. 아무튼 면기에 재료들을 담아주면 완성이다.
이 글을 우연히 대충이든, 진실되게 최선을 다해 읽었든 간에 사람의 삶에는 어떤 공허가 있을 것이다. 이미 스스로 잘 채워가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애꿎은 것들로 헛되이 채워보려다가 더 큰 공허를 느끼는 당신, 채수도 내려보고 국수도 말아보세요. 재밌고 맛있고요. 차가운 요리지만 마음 어딘가가 뜨끈뜨근해질 수도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