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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23. 2023

폭풍처럼 몰아치던 사랑의 소용돌이

비디오를 너무 많이 본 청소년 4

illustrated by 조대리

1989년 여름, 시민 게시판에 붙어 있던 어느 한국 영화 포스터 하나에 흠뻑 반해버렸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영화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연소자 관람 불가’를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신세. 그러다 어느 비 오던 밤, 귀가 중이던 나는 주변에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포스터를 과감하게 뽑아서 품에 넣고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다, 행여라도 빗방울이 튈까 걱정하면서. 내 기억에 A4 크기의 마분지에 인쇄된 포스터엔 기모노를 입은 여성과 멜빵과 넥타이, 그리고 베레모 차림의 남성이 희뿌연 배경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영화는 바로 이황림 감독, 김구미자, 임성민, 박영규, 진희진 주연의 <애란>이었다. KMDb 크레디트를 보면,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정성일 선생님이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분께 이와 관련한 질의를 할 기회는 여태 없었다.



아무튼 당시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던 <애란>을 보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걸렸고, 역시나 ‘나 상가’ 비디오 가게 사장님이 나의 구세주였다. 또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비디오 대여 기간은 (특히 신작이라면) 이삼일 정도도 안 됐던 것 같은데, 그 틈에 <애란>의 분위기에 반해버린 나는, 얼마 안 되는 대여 기간 동안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이후에 몇 번은 더 대여해서 봤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어느 외딴섬의 바닷가. 네 명의 남녀 간에 벌어지는 치정 멜로극인 영화 <애란>의 극장 흥행 성적은 크게 좋지 않았던 것 같고, 주변에서도 나를 제외하고는 이 영화를 본 사람도 별로 없고, 큰 관심도 얻지 못한 비운의 영화이다. 하지만, 신병하 음악 감독의 스코어가 감싸고도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풍광, 그 속에 펼쳐지는 치정극이 주는 긴장감과 서스펜스로 가득한 이 영화의 퇴폐적인 매력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좋겠다고 늘 바란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두 주연 김구미자, 임성민 배우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다행이라 여기며, 조금이라도 위안 삼아 본다. 그리고 이 영화엔 이황림 감독의 전작 <깜보>로 데뷔한 박중훈 배우가 일본군에 잡혀가는 한국인으로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일종의 발견하는 즐거움까지 특별부록처럼 품고 있는 영화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비디오 시대가 저문 이후 그냥 볼만한 수준이긴 했어도 DVD가 출시되었을 땐 뛸 듯이 기뻤다. 안타깝게도 최근 이사를 하면서 하필 <애란> DVD가 분실되어 너무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중이고, 아직 그 상실감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제작사 극동 스크린은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겼지만,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된 영화 <애란>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비 오던 날 시민게시판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떼어내고 냅다 달렸던 그날의 간절함은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고, 클릭 몇 번과 얼마간의 결제를 통해 비교적 깨끗한 화질의 <애란>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다시 보니 뭔가 예전의 감흥과 달라, 거기에 더 놀랐다.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22년 7월 30일 발간한《아카이브 프리즘 #9 Summer 2022 "리와인드 - 비디오 시대의 어휘들》에 기고한 원고를 바탕으로 재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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