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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30. 2023

컴페티션, 서바이벌, 어워즈 마니아 조대리

동굴의 우상의 우상

프랜시스 베이커 경이 만들었다는 '동굴의 우상'을 내 맘대로 해석했다고 친다면, 아주 어릴 때부터 TV를 끼고 살았던 나는 특히 각종 시상식을 보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말 가요대상, 연기대상, 지금은 사라진 서울국제가요제, 모종의 이유로 한국에 유치했던 1980년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 가요톱텐 1위 발표 직전 등 최종 우승자나 수상자를 발표하기 직전, 소파 위에 올라가 방방 뛰며 대체 누구의 이름이 불리는 거냐며 흥분했고, 결과에 크게 관심이 없던 식구들은 정작 그 결과보다 방방 뛰는 나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 이후 자라면서, 크게 재미있지 않았던 영화라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거나, 내 귀에 별로 즐겁지 않은 노래더라도 빌보드 싱글차트나 가요톱텐 1위에 오르거나,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지 않았던 어느 배우의 연기도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거나 하면 일단 차트의 권위, 상의 권위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며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중 1 때 체육 담당이었던 담임 선생님이 하루는 나를 불렀다. 학부모 면담 때 듣자 하니 VHS에 녹화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반복해서 본다고 어머니께서 걱정이 많으시다며, 대체 그걸 반복해서 보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셨다. 당시 1번부터 57번까지 참가자들의 면면을 몽땅 외울 정도로 보고 또 봤던 것은 분명한데, 그렇게 반복해서 보는 이유를 물어오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외울 정도로 계속 봤던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했던 것은, 맨 마지막 우승자인 '진(眞)'을 발표하기 전, 최종 후보 두 명이 남아 있던 순간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해, '88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던 해에 전년도인 1987년 미스코리아 당선자들이 참가한 해외 미인선발대회에서 최종 등수에 드는 쾌거(?)를 거뒀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진'이었던 장윤정 씨가 참가한 1988년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는 올림픽 못지않은 흥분과 즐거움을 주었다. 우리나라 대표인 미스 코리아가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 최종 2인 중 한 명이 되다니! 당시 우리말 더빙으로 MBC에서 방영할 때 역시 놓치지 않고 VHS에 녹화한 후 몇 번이나 또 봤는지 모르겠다. 그쯤에서는 포기하셨는지, 중 2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는 왜 그렇게 반복해서 보냐는 질문은 받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어 이른바 'K-컬처'라 불리는 한국 영화, K-Pop 아이돌의 인기가 전 세계의 트렌드가 되다 보니, 아카데미상도 그래미상도 더 이상 남의 나라 잔치, 엄밀하게 따지자면 '미국인'들만의 잔치가 아니게 되었다. 요즘은 내게 그래미상 결과가 예전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제너럴 필드 General Field라 불리는 주요 4개 부문이나 팝, R&B 부문의 수상 결과에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던 때도 있었고, 아직까지도 해마다 아카데미 시즌이 되면, 아카데미 시상식 전 열리는 각종 시상식들의 결과를 두고 그해 아카데미상은 누가 받게 될지 난리를 친다.


한때는 한국의 아카데미상이 아니냐며 핏대를 세웠던, 하지만 이제는 그 위상이 전혀 전 같지 않은 대종상 시상식도 마찬가지. 1987년, 한국 배우 최초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전까지는 아역배우 출신의 하이틴 스타이자 갓 성인이 된 라이징 스타였던 강수연 배우가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3년 연속 수상하던 순간마다 생중계로 시상식을 지켜보며 기뻐하기도 했다.


이제는 데뷔 30년을 훌쩍 넘긴 머라이어 캐리의 그래미 신인상 수상 때도, 캘빈 클라인 핑크 드레스를 입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훌쩍거리던 기네스 팰트로의 수상 장면도, 일단 트로피를 손에 쥐게 되면 그 상의 권위와 함께 수상자에 대한 신뢰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다.


실제 내 인생에서는 어떤 종류의 경쟁이더라도 불편하고 싫어해서인지, 치열한 경쟁을 거쳐 트로피를 손에 쥔 수상자의 영예로운 모습에서 대리 만족과 희열을 얻는 게 아닐까. 스스로 그렇게 진단해 본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취화선(2002>이나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2019)>, 강수연 배우가 한국 배우 최초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씨받이(1986)>를 비롯, 대종상 여우주연상 3년 연속 수상에 빛나는 그의 대표작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등 그 영화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영화가 성취한 수상 결과가 뒤따라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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