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무굴 제국의 공주

— 황금새장안에 갇힌 공주의 삶

by 김별



체크인 알림이 사라지자, 시야가 천천히 열렸다.
메타버스 호텔의 로비는 없었다.





대신 눈부시게 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1670년, 아그라성의 아침 속에 서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공기가 무거웠다.


장미였다. 수천 송이의 장미를 우려낸 물이 은쟁반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시녀들의 손이 나를 해체하듯 움직였다.

“공주님.”

그 말이 내 이름을 대신했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규정된 존재였다.

차가운 물이 발등을 타고 흘렀다. 향기는 달콤했지만, 이상하게 숨이 가빠졌다.
이윽고 실크가 어깨 위에 얹혔다.


얇고 부드러웠지만, 한 겹 한 겹 쌓일수록 몸은 점점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는 사람이 아니라 보석으로 만든 제단 같았다.
이마에는 다이아몬드 티카, 목에는 주먹만 한 에메랄드, 팔과 발에는 황금 뱅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쇳소리가 울렸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소유의 증명이었다.


나는 제국의 자산이었다.

내 이름은 제분니사.
아우랑제브 황제의 장녀.
그리고 이 제나—여성 전용 구역—의 가장 똑똑한 죄수.





서재로 들어가자 숨이 조금 쉬어졌다.
책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어, 아랍어, 수학, 천문학.
나는 일곱 살에 코란을 외웠고, 별의 궤도를 계산하며 밤을 보냈다.

하지만 창문은 늘 같았다.


대리석 격자 너머로 들려오는 시장의 소음.
웃음, 다툼, 사랑 고백, 욕설.
살아 있는 세계의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보지만 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왜 저 창을 그렇게 촘촘히 만드셨을까.”

혼잣말은 늘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그날, 나는 금지된 시집을 펼쳤다.


사랑을 말하는 문장, 자유를 갈망하는 은유.

가슴이 뛰었다.
나는 펜을 들었다.





나의 영혼은 황금 새장 안에서
날개가 꺾였다
세상은 나를 태양이라 부르지만
나는 빛을 잃어가는 달의 그림자

이름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명을 적었다.


마피(Makhfi)
— 숨겨진 자.

그 이름은 나 자신을 숨기기 위한 마지막 피난처였다.


며칠 후, 정원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주웠다.
내 시에 대한 화답.

당신의 고독을 읽었습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문장에서 처음으로 여인으로 숨을 쉬었다.

우리는 격자창 너머로, 시녀의 손을 빌려 시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곳은 무굴의 궁전이었다.
꽃에도 귀가 달려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근위병들이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내 시를 들고 있었다.

“너는 제국의 명예를 이 종이 몇 장과 바꿨느냐.”

나는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는 보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었다.

살림가르 요새의 방은 작았다.
천장 위 작은 구멍 하나.
그곳이 내가 세상을 보는 전부였다.



보석은 사라졌고, 침묵만 남았다.
장미 향기 대신 곰팡이와 강물 냄새.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내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다.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종이가 없으면 벽에, 벽이 차면 마음속에 시를 썼다.


오 마피여
너는 왜 아직도 노래하는가
너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1702년, 나는 조용히 숨을 멈췄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체크아웃 시간입니다.”

목소리에 눈을 떴다.
헤드셋을 벗자, 방이 나타났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왜 내가 평생 엘리베이터를 타면 숨이 막히는지,
왜 작은 방에 들어가면 이유 없이 가슴이 조여 오는지.


그건 지금의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한 생애를 담장과 벽 속에서 끝내야 했던 기억이
몸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평범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아마도 제분니사가
그토록 갈망했던 건
보석도, 찬사도 아닌
이 한 조각의 자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숨 쉬며 걷는 이 순간이
그녀가 끝내 누리지 못한
다음 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참고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rroVyKikZEY

금요일 연재
이전 03화플루트가 비를 건너오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