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봉쇄 수도원의 수녀, 나의 전생을 호출하다
기억의 살롱 전생호출 이야기가 독자반응이 좋아 몇 편 더 써 가 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거실의 조명을 천천히 낮춘다.
“루미, 기억 아카이브 실행.”
벽면의 홀로그램이 조용히 열리고
공기 속에 낯선 향이 스민다.
라벤더 대신
차갑고 묵직한 냄새.
대리석.
나는 미소 짓는다.
“그래… 오늘은 그 생이군.”
2045년의 나는
디지털 자아 복원 시스템을 통해
과거의 가능성을 호출한다.
이 장치는 단순히 기억을 재생하지 않는다.
내가 평생 남겨온 일기와 메모, 감정 패턴과
사고의 흔적을 분석해
내 삶과 닿아 있는 기억의 가능성을 복원한다.
오늘 호출된 기록은
봉쇄 수도원의 수녀.
루미가 말한다.
“기억 재현 확률 63%.
신뢰 가능한 전생 패턴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기억은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공간이 천천히 변한다.
거실의 벽이 사라지고
차가운 돌벽이 나타난다.
높은 천장, 작은 창문 하나.
그 아래에
검은 수도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다.
어깨에는 두꺼운 숄,
손에는 묵주.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아… 역시 당신이군요.”
이 기억을 처음 의심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유럽에서였다.
대리석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와 본 곳인데도
마치 오래 살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익숙함.
현관의 돌계단,
차가운 벽,
높은 천장.
그 순간마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듯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여기 살아본 적이 있나?”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나는 스카프를 좋아한다.
겨울뿐 아니라
봄과 가을에도 늘 스카프를 두른다.
거실 소파에도
책상 의자에도
언제든 걸칠 수 있는 숄이 하나씩 놓여 있다.
이건 단순한 패션 취향이라기보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에 가깝다.
나는 추위를 유난히 경계한다.
대리석 바닥의 서늘함,
두꺼운 돌벽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공기.
어쩌면
그 수도원의 차가운 온도를
몸이 아직도 기억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폐소공포증이 있다.
터널을 싫어하고
엘리베이터도 가능하면 타지 않는다.
몇 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에 들어갔을 때
나는 거의 패닉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다.
좁은 통로,
낮은 천장,
숨 막히는 공기.
그 공포는 지나치게 깊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몸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좁은 돌벽 안에서 오래 살았던 기억이 있구나.”
봉쇄 수도원은
한 번 들어가면 거의 나오지 않는 곳이다.
높은 돌벽 안에서
세상은 아주 작아진다.
나는 상상한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던 젊은 수녀를.
그녀에게 가장 간절했던 것은
어쩌면 자유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해방’과 ‘탈출’이라는 말에
유난히 마음이 움직인다.
집을 구할 때도
내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앞이 탁 트인 공간이다.
유난히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그런 관련이 있지않나 싶다.
그런데 수도원도
결국 인간이 사는 곳이다.
나는 갑자기 웃으며 말한다.
“루미, 데카메론 데이터도 열어줘.”
14세기 피렌체.
흑사병을 피해 모인
열 명의 귀족 청춘 남녀.
그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열흘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이야기집이 바로
**데카메론.
그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녀원에 취직한 벙어리 정원사.
수녀들은
“말을 못하니 소문을 낼 리 없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수도원에서 **가장 바쁜 남자**가 된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역시 인간은
어디에 있어도 인간이네.”
루미가 대답한다.
“수도원도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의 가장 오래된 질문도 늘 같았다.
영혼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의 삶은 있는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이번 생에서도
그 질문을 따라 꽤 먼 길을 걸어왔다.
교사로 살며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여행자로 살며
세상의 넓이를 배웠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의 밑바닥에는
늘 같은 질문이 흐르고 있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 질문은 오래전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홀로그램이 천천히 사라진다.
돌벽 대신
다시 내 거실이 나타난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나는 잠시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여러 시대를 건너는 긴 여행인지도 모른다.
어떤 생에서는
침묵 속에서 기도하는 수도원이 있었고
이번 생에서는
교단과 여행길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질문하는 마음.
나는 오늘의 기록을 남긴다.
2045년,
나는 봉쇄 수도원의 수녀를 호출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내 삶 깊은 곳에서 오래 살아온 질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좁은 공간을 싫어하고
스카프를 좋아하며
자유를 사랑한다.
아마도
그 수도원의 문은 이미 오래전에 열렸고
나는 지금
그 문을 나와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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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는 종교적 경건함 뒤에 숨겨진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풍자한 수녀원 관련 에피소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벙어리 행세를 한 정원사 마제토다.
젊고 건장한 청년 마제토는 벙어리인 척 연기하며 정원사로 취직한다.
수녀들은 그가 말을 못 하니 소문을 낼 리 없다고 생각하여
한 명씩 그를 유혹하기 시작하고, 결국 원장 수녀까지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결국 마제토는 수많은 수녀를 상대하느라 힘이 부치자 말을 하게 되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수녀원은 추문을 막기 위해 마제토를 계속 머물게 하며 적절히 보살폈고,
그는 평생을 부유하고 평안하게 노후를 보냈다.
*폐소공포증이 나타난 나의 이집트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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