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살롱 : 전생 아카이브」③

별을 따라 사막을 건너던 여인

by 김별


2045년
나는 또 하나의 기억 기록을 호출한다.

“루미, 기억 아카이브 실행.”

거실의 조명이 부드럽게 낮아지고
홀로그램 화면에 사막의 모래빛이 번진다.


잠시 후
데이터가 하나 떠오른다.

기억 재현 가능성 71%

실크로드 대상단을 이끌던 여인

나는 조용히 웃는다.


“아, 그 기억이군.”

사실 이 전생의 단서는
꽤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



“실크로드 대상단을 이끌던 여인.”


루미가 조용히 말한다.

“기억 데이터 분석 결과,
당신의 감각 패턴은
사막 환경과 높은 친화성을 보입니다.”


공기가 바뀐다.
거실의 벽면이 천천히 열리고
모래빛 풍경이 나타난다.

나는 사막의 바람을 느낀다.

그리고 곧 깨닫는다.


나는
낙타 위에 앉아 있다.

해가 기울어가는 사막이다.

모래 위로 길게 늘어진
낙타 행렬이 움직인다.

은빛 방울이 달린 안장이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낸다.


나는 그 행렬의 맨 앞에 있다.

대상단의 길잡이.

내 뒤에는

비단, 향료, 청금석, 유리잔,
그리고 먼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있다.


누군가는 페르시아 말로 말하고
누군가는 투르크어로 대답한다.

이 길은
언어가 섞이는 길이다.

그리고 문명이 교차하는 길.


사람들은 나를
“별을 읽는 여자”라고 불렀다.


나는 낮에는
바람의 방향과 모래의 결을 보고

밤에는
별의 길을 보며
대상단을 이끌었다.


사막의 밤은 빠르게 온다.

해가 사라지면
하늘이 갑자기 깊어진다.

그때 비로소
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낙타에서 내려
모래 위에 앉는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사막에서는
별이 아주 가까이 있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나는 북극성을 찾고
별자리의 이동을 계산한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내일 우리는
동쪽으로 반나절을 더 간다.”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길을 모르지만
나는 별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왜 나는
이 풍경이 이렇게 익숙한 걸까.

낙타의 걸음,
모래의 냄새,
텐트 안의 따뜻한 차,

그리고 밤마다
별을 올려다보는 습관.


그때 나는 깨닫는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김별”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도.


바람이 천천히 불어온다.

모래가 살짝 움직인다.

대상단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본다.

별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


그러나
길은 늘 바뀐다.

사람들은 그 길을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명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세계를 배우는

긴 대화의 길이었다.


실크로드 대상단의 여인


몽골 제국(13~14세기) 시기 나는 푸른 타일이 눈부신 실크로드 상인들의 중심도시 사마르칸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이름난 거상(巨商)이었고, 나는 어머니의 젖보다 낙타 젖을, 집의 안락함보다 장막의 펄럭임을 먼저 배웠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낙타 등에 올랐고, 말문을 트기도 전에 열두 개의 언어와 서른 개의 방언을 귀로 익혔다.


나의 눈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폭풍 너머 오아시스를 꿰뚫어 보았고, 나의 머릿속에는 장안(長安)에서 타브리즈(Tabriz)까지, 몽골의 파이자(牌子)가 통하는 모든 길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지도를 좋아하고 자주 들여다 본다.


나는 상단의 맨 앞에서 방울을 울리는, 오직 나에게만 복종하는 거대하고 검은 낙타를 탔고 나의 허리춤에는 은으로 장식된 가죽 띠가 매여 있으며, 그곳에는 각기 다른 문양이 새겨진 수십 개의 청동 열쇠 뭉치가 묵직한 소리를 내었다. 이 열쇠들은 상단의 가장 귀한 보물상자와 각 오아시스 도시의 창고를 여는 것이었다.

나는 통역가 없이 몽골어, 칸어(한어), 페르시아어, 돌궐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언어야말로 내가 협상의 테이블에서 언제나 우위를 점하게 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나와 대상단앞에서 몽골의 기병들도 예를 갖췄으며, 거친 소그드 상인들도 나의 눈빛 한 번에 분쟁을 멈췄다. 나는 단순히 짐을 나르는 상단의 주인이 아니었고 '팍스 몽골리카(Mongolica)'의 혈관을 잇는 한 피의 지류였고, 동과 서를 연결하는 지혜의 가교였다.




별을 좋아하던 아이


나는 어릴 적부터
밤하늘의 별을 보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별을
그저 반짝이는 점으로 볼 때

나는 늘 궁금했다.


저 별을 따라가면
어디로 갈까.

지금 생각하면
이 질문은 조금 이상하다.

보통 아이들은
별을 보는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나는
별을 따라 가고 싶어 했다.




모로코에서 깨어난 기억


몇 해 전
나는 모로코를 여행했다.

마라케시의 메디나(Medina)
그리고 그 안의 시장 수크(Souk).

좁은 미로 같은 골목.

가죽 냄새
향신료 향
양탄자와 도자기
손으로 짠 직물들.

그곳을 걷는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 온 곳인데
길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어디쯤에서 향신료를 팔고
어디쯤에서 카펫을 팔고
어디쯤에서 은 장신구를 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시장에서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돌아온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오래된 숙소의 밤


그날 밤
나는 메디나 안의 오래된 리아드 숙소에 묵었다.

높은 벽 안의 작은 정원
타일로 장식된 분수
조용한 중정.

이상하게도
그곳에 앉아 있자
마치 오래전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나는 왜 이곳이 편하지?”



하맘에서의 기억


다음 날
나는 모로코 전통 목욕인 *하맘(Hammam)을 경험했다.

증기실에서 몸을 불린 뒤
올리브로 만든 블랙 비누를 바르고
거친 장갑 키스(kessa)로
묵은 각질을 벗겨낸다.


마지막으로
아르간 오일 마사지.

그리고
뜨거운 민트차.

그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좋았다.

몸이 가벼워지고

마치 집에 온 거 마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낙타 위에서


사막에서
나는 처음 낙타를 탔다.

낙타가 일어나는 순간
몸이 크게 흔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
균형을 잃는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앞을 바라봤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동물 위에서 여행해 온 사람처럼.


사막의 밤


베두인 친구가
나를 사막으로 데려갔다.

모닥불이 피어 있고
별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어떤 남자가
낙타 가죽으로 덮인 악기를 연주했다.

세 개의 현이 달린
사막의 기타.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박하차를 마셨다.


그 순간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마치
아주 오래된 기억이
내 안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것처럼.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밤을
어디서 이미 살아본 것 같아.”


대상단의 여인


그날 밤
나는 사막의 별을 보며
이런 상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실크로드 대상단의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낙타 행렬을 이끌고
향신료와 카펫과 유리와 비단을 싣고

사막을 건너던 사람.

밤이 되면
별을 보며 길을 찾고
모닥불 곁에서 차를 마시던 사람.


그래서 나는
별을 보면
괜히 마음이 움직이고

낙타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세우고

수크의 물건들을 보면
마치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로 돌아오다


홀로그램 화면이 서서히 꺼진다.

다시
2045년의 거실.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밤하늘에
별 하나가 떠 있다.

나는 기록을 남긴다.


“2045년
나는 사막의 기억을 호출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생의 증거가 아니라
내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별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 길은
사막을 건너는 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시간을 건너는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루미에게 말한다.

“다음 기록 준비해줘.”

잠시 후
새로운 데이터가 떠오른다.

기억 재현 가능성 64%

르네상스 화가의 제자


나는 웃는다.

인생은 참 묘하다.

어떤 생에서는
사막을 건너고

어떤 생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어떤 생에서는
그 모든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또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은
훨씬 먼 훗날
르네상스의 한 공방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막을 건너 실어 나르던
청금석 가루와 비단, 그리고 양탄자들이
어떤 화가의 팔레트 위에서
깊은 푸른색이 되고
또 다른 그림의 배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맘(Hammam)~ 튀르키예와 중동 지역의 전통 공중목욕탕으로, 대리석으로 된 뜨거운 공간에서 땀을 빼고, 세신사에게 거품 마사지와 때밀이 서비스를 받는 문화다. 하맘이 과거에는 사교의 장 역할 했다.


나의 사마르칸트 여행기~*

https://brunch.co.kr/@c3e689f797bd432/63


나의 모로코 여행기~*

https://brunch.co.kr/@c3e689f797bd43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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