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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주 Jun 09. 2024

과거여행 4: 병원을 전전하다

틱장애, 강박장애, ADHD, 생의학치료, 한의원

의사 선생님에게 '자폐스펙트럼인 것 같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심란했다.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었고, 약을 끊을 생각도 없었지만, 확인을 받는 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그냥 발달이 좀 늦는 거예요. 아이들마다 발달 속도가 다르잖아요.'

'선천적인 불안이 높아서 그래요. 불안에 대한 인지치료를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부정적 피드백을 많이 받아서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입니다. 자존감 훈련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머리가 너무 좋아서 어머니의 심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가족치료를 받아보시죠.'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서 병원을 상담위주의 병원으로 옮긴 것 같다. 약이 아닌 상담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 아들이 당뇨가 생겼어요. 그래서 약을 타오는데 병원 원장님이 젊은 분이세요. 원장님이 '운동 좀 해요~ 근데 운동이 생각보다 쉽진 않죠~ 그래도 운동해야 돼요.' 이런 말을 했는데 아들이 그 원장한테 진료 보기가 싫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냐고 물으니, 자기를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을 하냐는 거예요. 아마 살짝 반말도 섞었던 것 같아요. 동생 같으니까. 반말했다고..... 싫다는 거예요.

- 자폐성향인 아이들은 상담할 때 감정선을 넘으면 안 돼요. 객관적인 얘기만 해야 돼요. 그게 선의인데, 선의인 줄을 잘 몰라요. 그 안에 있는 비언어성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데 문자로 해석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많이 조심스러워요. 저를 아직도 경계하거든요. 저랑 마주 앉아있을 때도 불안이 높아 보이고요."

그렇구나.... 멀쩡해 보이지만 미세하게 다른 것.

오해..... 수많은 오해......

학교에 적응할 수 없었던 수많은 오해들.

그게 문자로만 해석해서 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그래서 나는 벽에다 말하는 것 같았던 것. 

이런 건 훈련을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고쳐질 수 없는 건가? 뇌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초등 6학년 때 6개월을 기다려서 드디어 서울대 병원에 방문을 했다.

그날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급성백혈병으로 3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으셨는데, 그날 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도 어머니는 내 아들 병원 가는 날이라 나에게 말씀하지 않고 12시쯤 전화를 하셨다.(그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대병원을 예약해 놓고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막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내가 아들로 인해 마음을 끓이는 동안 내 어머니도 같은 세월 애면글면 마음을 끓이셨다. 그래서 속 시끄러운데 내려오지 말라고 아버지 병간호를 홀로 책임지셨다. 그 당시는 여러모로 상황이 힘들었다. 격주로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시골에 내려와 아버지 병간호를 했고 상황이 안 좋으면 2박 3일을 머물렀다.

예감이 좋지 않아서 남편을 조퇴시키고 아이들 옷을 챙겨서 부랴부랴 시골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6시에 돌아가셨다. 물론 대화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버지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6개월을 기다린 서울대 병원에서는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을 더 기다려서 명의님과는 10분 면담을 했다. 동네병원에서 했던 검사지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검사를 또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약처방.

항우울제인 프로작과 리스페달이었다.

- 약 잘 먹고 석 달 후에 봅시다.

아들의 종합검사, 보호자의 MMPI검사, 전화로 4시간 정도 심리상담사와 상담(아들의 어린 시절부터 행동특성 이야기 하기)

그리고 석 달 후에 병원에 갔을 때 나온 결과는 '선천성 불안으로 인한 강박'이 증상명이었고 프로작과 리스페달을 2배로 올려 3개월치 약을 처방해 주었다. 물론 상담시간은 5분이 채 안되었다.  

약은 꽤 잘 맞았다. 틱은 없어졌고, 강박과 예민함도 줄었다. 동생이 살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 당시 아들의 강박사고는 꽤 심해져서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는데, 중간에 동생이 작은 소리라도 내면 숫자를 다시 세야 하기 때문에 동생에게 짜증을 부렸다.(돌이켜보면 울 딸은 초등1학년 때부터 오빠의 강박사고에 대한 피해를 입고 살았다. 하!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왜 그렇게 약의 용량을 올리는지..... 서울대도 마찬가지였다. 3개월마다 약을 올렸다.

문제는 아이가 너무 외향형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게 약 문제인지 안다.(추측해 보자면 항우울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경조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엔 몰랐다. 아이가 조금씩 변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상담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 장난을 못 친걸 뒤늦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발달 단계에서 꼭 해야 할 일을 하는데, 하지 못하면 뒤늦게 라도 한다. 뭐, 이런 상담 이론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소심하고 학교에서도 없는 듯 있는 듯했던 아들이 너무 외향형이 되어 아이들을 틈만 나면, 너무 자주 놀린 게 문제였다. 학교에서 거의 날마다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들을 놀린다. 수업시간에 장난을 친다. 선생님이 얘길 해도 듣지 않는다. 등등

샘의 말을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면 ADHD 아이들이 하는 행동특성이었다.

그전엔 본인의 문제(틱, 강박, 불안), 가족의 불편이었다면 이제는 학교생활의 문제였다.

나는 아이가 외향형이 되고 밝아지고 틱도 줄어서 쫌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눈에 보이는 약 부작용이 나타났다. 프로작을 150밀리그램으로 올렸을 때,  아토피성 피부염이 나타난 것이다.

부랴부랴 포털을 검색했더니 부작용이 가려움증이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은 3개월을 기다려야 갈 수 있다. 울 아들보다 훨씬 더 심한 아이들이 많아서 상담도 5분밖에 못한다. 너무 답답했다. 아들은 밤마다 가려움증에 시달리고, 내 마음대로 약을 줄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포털을 뒤져서 병원을 찾기 시작했고, 강남에서 강박증 전문가인 개인 병원을 찾았다.  내가 처음 간 병원에서 얻은 교훈은 잘 알아보지 않고 병원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신중하게 병원을 수소문했다. 

집에서 지하철로 1시간 반, 자가용으로 1시간 10분 거리였다.

첫 상담을 받고 강박증 인지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시간당 15만 원씩 10회기인 150만 원을 결재했다.

하지만 그 병원 원장님은 소아과 전문의가 아니었다.

아들은 분명히 상담을 받겠다고는 해서 결재를 했는데 그다음 주부터 가지 않겠다고 떼를 부렸다.(이것도 자폐성향일까? 자기표현을 못하니 늘 알겠다고 하고 상황이 닥치면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물론 환불도 되지 않아서 놀이치료로 바꾸었다. 하지만 놀이치료도 맞지 않았다.(놀이치료샘이 엄청 어리신 분이었는데 아들을 제어를 못하셨다.)

결국은 그냥 내가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아마 나도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나에게 1시간에 15만 원이란 돈은 무척 큰돈이었지만, 원장이 친절했고, 원장과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틔였다. 

아들과는 약을 타러 갔다 오고, 나는 상담을 하러 다녔다.(아들이 내가 상담받는 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므로.)     

그래서 생전 가보지도 않던 강남을 일주일에 한 번,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다녔다.

의사는 처음에는 서울대 약처방에서 약 용량을 조금 줄여서 처방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ADHD가 의심된다며 검사를 해보자고 했는데, 서울대병원보다 두 가지 정도를 더 검사할 수 있는 최신 기계라고 했다. 

하지만 기계가 최신이면 뭐 하나? 

아들은 이미 4학년 때 한 번, 6학년 때 한 번 4시간 이상되는 검사지를 했고, 검사라면 지긋지긋해하는 상황에서 검사를 거부했다. 그래도 간신히 설득을 해서 검사방에 들어가긴 했는데, 컴퓨터로 하는 ADHD 검사를 하다가 뛰쳐나왔다. 했던 걸 왜 또 하냐고. 조금만 기다리면 그 뒤에 상위버전이 있는데 아들 입장에선 했던 걸 또 한다는 게 무의미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항우울제 때문인지, 아들은 본인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향형이 된 것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소심한 아이들에게 과한 장난을 치곤 했는데, 그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 했다. 물론 죄책감도 안 느꼈다.(자폐성향이라면 못 느낀 게 맞겠지.)  그게 나쁜 행동이라고 타이르고 꾸짖고 가끔은 종아리를 때려도 그때뿐이었다. (아, 그때는 왜 그게 항우울제의 부작용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까?) 

수업시간에는 자고, 선생님이 지적을 해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초등학교 때의 소심맨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불안이 높아서 오히려 선생님의 눈치를 많이 봤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를 당했었다. 하지만 약을 복용한 후에는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관심을 끌려하고 친구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못 해서 벽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가슴을 쳤는데 자폐성향이라면 이해가 된다. 

아무튼 본인은 강박증이 완화되어 본인이 괴로운 것은 없는 듯했다. 자폐성향으로 남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남이 괴로운 것은 이해하지 못한 게 문제였으니까.

ADHD 검사는 수포로 돌가 갔지만,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ADHD를 의심했고, 항우울제에서 ADHD약으로 조심스럽게 변경을 해 보자고 했다.

그 당시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서 전화가 왔고, 방과 후 동아리를 가지 않고 집에 오는 등, 주의집중력이 결여된 것은 맞는 듯해서 의사의 권유대로 약을 바꾸었다.

8시간 지속된다는 메틸페니데이트를 저용량에서 복용했던 것 같다. 약 변경 후 아들은 공부도 좀 하고 수업 후 동아리도 갔으며 아이들을 놀리지도 않았다. 동생도 놀리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약의 효과였다.(한 번은 부산에 놀러 갔는데 약을 먹기 전엔 10초마다 동생을 놀리던 아들이 약을 먹자마자 동생을 놀리지 않았다. 시크한 나쁜 남자처럼 말 수가 적어졌다. 단지 불안이 올라가서 빨리 집에 가자고 조른 것 같다.) 

하지만 자폐성향의 아이들에게 있는 극도의 불안을 예측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그 당시 자폐인줄 몰랐으니까)

어느 날, 학교에서 전화가 왔고, 학교에 가보니 아들이 교실 창문을 주먹으로 쳐서 창문이 깨져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 말로는 점심시간에 그냥 창가로 가서 주먹으로 창문을 쳤다는 것이다.

일단 병원으로 옮겨서 상처를 치료하고 왜 그랬는지 물어도 말이 없다.

한 참 후에 알게 되었는데, 몇 주전에 아이들이 했던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화를 억누를 수가 없어서 창문을 깼다고 한다.

그래서 충동억제제인 리스페달을 더 올려서 함께 처방을 받았고 한 6개월 정도를 먹인 것 같다.

그런데 약 효과는 딱 8시간. 8시간이 지나면 아들은 마치 억눌려왔던 분노를 폭발하듯이 발작을 했다.

동생을 더 놀리고 작은 일에도 화를 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아빠가 나무라자 자기 방에 가서 유리창을 깼다. 이번에는 상처가 꽤 깊어서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다. (3년 전에 흉터 치료를 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 흉터 보면서 반성 좀 해라.'라고 아들을 혼냈던 것 같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 당시 나는 아들이 미웠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들에게 약을 먹이면서도 말하는 건 너무 똑똑했기 때문에 나를 골탕 먹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과 의논해서 24시간 지속되는 신약, 아토목섹틴으로 약을 바꾸었다.

일단 프로작보다는 학교생활을 잘했기 때문에 ADHD가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약이라서 기대를 했다.(아, 무슨 약 쇼핑도 아니고.... 정말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처음에는 아토목섹틴약이 잘 맞는 듯했다. 의사 선생님은 일정 주기로 약을 계속 올렸다.(그 당시엔 그게 정석이었는지 모든 샘들이 약을 점점 올렸다.) 천천히 효과가 나는 약이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천천히 나타나더니 부작용이 나타날 쯤엔 효과보다는 부작용만 보였다.

그때가 방학 때였는데, 아들은 하루종일 불안으로 서성댔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환청을 듣는 지경까지 되었다.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고 약을 서서히 줄였다.


아마도 그때 너무 답답해서 '아스퍼거 카페'에 회원가입을 한 것 같다. 

아스퍼거 카페에 들어가니 아들과 비슷한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아스퍼거 진단을 받은 사람보다 병명을 몰라 답답해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영재나, 상위권아이들이었고 드물게 울 아들처럼 성적이 바닥인 아이들도 있었다. (씁쓸한 게,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영재인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아무튼 나쁜 증상은 다 비슷했다. 특히 소리와 촉각에 예민한 것. 

생각해 보니 새 옷을 사도 안 입는다고 떼를 써서 늘 여러 번 빨아서 헌 옷처럼 만든 후에나 입었다. 소리에 예민해서 위층 피아노 소리 때문에 위층과의 전쟁이었고, 동생은 늘 작은 소리로 속삭여야만 했다. 텔레비전도 편하게 보지 못했다. 지금처럼 패드나 핸드폰이 있었다면 딸아이가 좀 나았을 텐데.... 엄마가 없는 날엔 늘 자기 방에서 조용히 있어야 했다. 딸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또 왜 일을 다녀서.... 울 딸을 힘들게 했을까? 

아무튼 나는 아스퍼거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폭풍 논문을 찾아보았는데, 한 가지에 집착하는 아이들에게 처방하는 약에 관한 논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논문에 처음 서울대병원 명의가 처방해 준 약이 바로 그 약이었다. 항우울제와 충동조절제의 콜라보. 그러니까 그 명의님은 울 아들 증상을 알지만 자폐는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완화하는 약으로 쓰신 건지, 그냥 강박증 치료제로 쓰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냥 그 조합이 가장 맞는 것 같았다. 

샘에게 논문 얘기는  하지 않고 아스퍼거 이야기를 했고, ADHD약은 안 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항우울제로는 프로작대신 그 당시 신약으로 나온 졸루프트와 충동조절제로 조현병치료제인 리스페달로 약을 변경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아주 소량을 먹이면서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했다. 소량이어서 그런지 아들은 친구들을 놀리거나 장난을 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고 수업시간엔 잠만 잤다. 그래서 나는 대안학교를 알아보았다.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결국 남편 반대로 아들은 대안학교에 가지 못하고 2년 동안 학교에서 잠만 자다 졸업을 했으니까.

남편은 너무나 야속하게도 '잠을 자든 말든 학교에서 말썽 안 피우면 된다고. 졸업만 하면 된다고.' 무책임하게 말했고, 나도 그냥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외면했던 것 같다. 아들이 학교에 있는 6교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지 않았고, 그게 그 아이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아들이 기억하는 가장 평온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들도 힘들었던 때를 생각할 때, 그때는 괜찮았다고 말했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아들은 고1 때 1년 동안 약을 끊었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본인이 우겨서 끊었기 때문에 나에게 말을 못 했을 뿐이었다고. 학교에서 너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고. 이 얘기는 다음에 하자. 


물론 그 당시 병원만 다닌 건 아니었다.

부작용이 나타날 때마다 약을 끊고 한의원에서 한약과 침치료를 했다. 브레인이 좌우균형이 안 맞아서 그렇다는 브레인 어쩌고 하는 한의원에서 엄청나게 비싼 상담도 받고 검사도 했다.

그런데 효과가 없었다. 강박증은 더 심해졌고 불안도 높아졌다.     

그러다 병원 원장님 딸이 아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여서 원장님이 생의학 치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당시 원장님의 자녀는 여섯 살이었는데, 내 아들의 어린 시절 행동과 너무나 비슷했다. 원장님은 본인 딸에게는 약을 먹이기가 싫었는지 논문을 찾고 학회를 다니면서 중금속이 원인일 수 있다, 영양 불균형일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고 화학이 전공인 나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우리 몸은 유기체니까.  

그래서 아들의 모발을 뽑아서 중금속 검사를 했는데, 알루미늄과 비소가 다량 검출되었다. 한약과 그 당시 떠다먹던 약수를 의심해서 비싼 한약을 다 버렸다. 그리고 양약치료를 하면서 영양제를 먹였고, 아들은 양약이 소량임에도 강박증이 완화되었다. 이후 너무 영양제를 의지해서 약을 끊은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집 근처 상담센터도 3개월 다녔는데, 아스퍼거 전문 상담사라는 분이었는데 그냥 아들과 게임하고 아들 감정 묻고 MBTI 검사하고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딸도 예방 차원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상담을 맡겼는데  딸에겐 좋은 상담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자폐스펙트럼이라는 게 그 당시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한의원이나 상담센터에서는 그냥 좀 예민한 아이가 심한 사춘기 증상으로 치부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아스퍼거 카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다른 학부모들과 대화를 하면서 아들의 증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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