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일없이사는사람 Jan 12. 2024

엄마가 아팠다 (2/3)

엄마가 아파서 가족 모두 힘들었지만 잘 버티고 엄마도 나아지셨다는 이야기




간병인이 오셨다


엄마가 정신을 차리시고 더 이상 안 되겠다 생각하셨던지, 전문 간병인을 사용하자고 하셨다. 엄마 말로는 그게 엄마가 더 빨리 퇴원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어설픈 딸 데리고 하느니 차라리 경험 많은 간병인과 함께 재활 훈련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고생하는 딸에게 미안해서인 것도 물론이고. 나도 거기에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같은 병실의 간병인 선생님 하시는 것을 보니 내가 하는 건 그냥 소꿉놀이 수준인 것이다. 몸을 씻기는 것에서부터 생리현상 보조하는 것,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도와주고 주기적으로 운동하게 해주는 것까지 역시 경험이 있는 전문가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도통 모르겠는 것들은 같은 병실에 계신 간병인 분한테 물어보고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그것조차도 아마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실제로 나중에 엄마한테 들었는데 엄마도 간병에 대해 이번에 많이 배우셨다고 한다.


병원에서 일하시는 간병인 분들은 조선족이 많다고 했다. 한국인 간병인은 수도 적고 구하기도 힘든 것 같았다. 환자 상태에 따라 몸을 써야 하는 일이 많을 것 같고 아픈 환자들을 상대해야 하니 감정 노동도 상당한 것 같았다. 상주 간병인은 출퇴근이 불가능하니 짧게는 며칠이지만 길게는 몇 달 단위로 환자와 함께 병원에서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장기 출장을 나온 셈. 실제로도 캐리어에 장기간 입고 먹고 쓸 것을 미리 준비해서 갖고 들어오신다.


잠깐이지만 며칠 입원실에서 지내면서 내가 직접 본 것은 대부분 50에서 70세 사이의 중년 여인들이 몸을 갈아서 일하신다는 거였다. 엄마 간병하러 오신 분도 중국에서 오신 분으로 엄마랑 비슷한 나이의 분이셨다. 간병인 분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솔직히 걱정도 됐었는데 현역으로 일을 하시는 만큼 체력은 튼튼하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엄마랑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딸인 나와 할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얘기들을 나누시는 거 같았다. 


하루 간병비는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른데 업체 수수료까지 하면 12만 원에서 14만 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귀신같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때 추천 영상에 ‘간병 파산’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뜨기도 했다. 환자가 입원해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간병비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힘들어도 가족의 노동력으로 간병비를 아끼게 되는 거 같다. 가족이 간병할 여력이 안되거나 차라리 지속적으로 수입이 있는 것이 환자의 치료에 더 도움이 되는 경우는 전문  간병인을 쓰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간병인보다 가족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아마도 심리적 안정감이겠지만 그것도 간병인이 환자를 잘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해탈해야 가능할 것 같다. 나도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성질이 꽤 날카로워진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때 스스로의 인격이 모자람을 보게 되는 거 같다. 그래도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건 항상 완벽할 수는 없으니 겉으로 표현만 안 하고 속으로 잘 삭이면 되지 싶다. 


이렇게 병원에서의 10일을 보내고 간병인 분과 교대한 후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10일간 하루는 낮에 몇 시간 동생네에서 쉬고 오기도 했고 주말 1박은 집에 와서 다시 개인 물품을 챙겨가기도 했다. 그동안은 아빠가 나 대신 들어가 계셨는데 원칙적으로 이렇게 상주 간병인을 수시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병원에 사정을 하기도 했었다. 




가족들은 의지가 된다


내 집으로 돌아오니 몸은 편한데 마음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내가 없다고 엄마가 또 밥을 제대로 안 먹으면 어쩌나, 간병인 분이랑은 서로 잘 맞을까, 어쨌거나 새로운 사람과 파트너가 되어 병원 생활을 해야 하는 거니 성격도 실력도 괜찮은 분이시길 바라며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다. 


물론 병원에 있는 나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집에서 홀로 식사를 해결하시며 노심초사 엄마 증상에 대해 공부하셨고, 동생과 올케는 엄마 상태를 체크하고 관련해서 앞으로 필요한 이것저것을 알아보느라 바빴다. 하루 종일 엄마 걱정하느라 일상생활이 안 되는 아빠를 위해 소일거리라도 하시라고 관심 있어하시던 수채화 입문 책과 스케치북을 갖다 드렸지만 엄마가 돌아온 이후에 하겠다고 한 쪽에 치워두셨다. 너무 걱정만 하지 마시고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도 하고 운동도 하시라는 그럴싸한 말로 위로를 했지만 아마 잘 들리지 않으셨을 거다. 그래도 이해가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집에서 그동안 멈춤 상태였던 내 작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으나 영 집중이 되지 않아 한동안 멍한 상태로 그냥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다. 가족이 아프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병원에서 앓고 있는 환자만큼이나 가족들도 같이 마음 아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래도 이번에 다들 각자 위치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잘 버텼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핸드폰에 구글미트 설정을 해드리고 처음으로 가족 간 화상회의를 해보기도 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나 내가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조달 요청을 드렸고 아빠나 동생, 올케가 병원까지 가져다주곤 했다. 센스 있게 올케가 미리 준비한 캠핑용 베개와 담요는 내가 아주 잘 썼다. 병원밥이 영 맞지 않아 많이 먹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잘 손질된 과일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옛날과는 달리 핸드폰이 있으니 병상에 누워서도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가족이나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이런 수단이 없었으면 병원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엄마가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고 휠체어를 타고 병원 1층으로 내려올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는 가족들이 짧게라도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증상이 나아져서 그대로 퇴원이 가능했으면 좋았으련만. 처음에는 3주 정도로 생각했던 입원 생활이 일주일씩 늘어나면서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없었지만 면역 수치가 너무 낮아져서 면회도 안되고 엄마도 집중치료받으며 침대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버텨야 했던 적도 있다. 항생제를 오래 쓴 것 때문에 부작용으로 나타난 증상이라고 했다.


12월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염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검사를 계속 주기적으로 시행했고 결과 심장 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판막에 균이 있고 제대로 역할을 못해서 피가 역류하고 있다는 것. 피를 통해 다시 나쁜 균이 온몸으로 퍼지게 되는 것은 막아야 했기에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유했다. 심장판막치환술. 3주 만에 퇴원은 불가하더라도 4주, 아니 5주 후에는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수술 얘기가 나와서 나도 엄마도 우리 가족들도 모두 당황하고 참담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문제가 있던 장기를 찾았으니 차라리 더 잘된 것일 수 있다.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퇴원했다가 똑같은 문제가 생기거나 갑자기 다른 증상이 나타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래도 심장 수술이라고 하니 다른 어떤 수술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당장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병원 측의 판단을 믿고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807d569527a64b4/7



작가의 이전글 엄마가 아팠다 (1/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