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들리는 소리의 영역이 다르다고 한다. 어느 방송에서 주파수에 따라 청력을 살피는 실험을 보았다. 호기심이 생겨 나도 따라 해보았다. 이어폰을 끼고 화면을 바라보며 소리에 집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씁쓸했다. 고주파 소리는 전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린다"고 했고, 중년과 노년의 얼굴에는 고요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물리학적으로 스무 살 무렵에는 2만 헤르츠까지 들린다고 한다. 마흔이 되면 1만 5천, 예순에 이르면 1만 2천으로 내려간다. 사람들은 이 자연스러운 변화를 담담하게 '노화'라고 설명한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를 과연 얼마만큼 들으며 살고 있을까." 세상에는 귀로만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있다. 나른한 바람이 등을 살짝 밀어주는 소리, 은근하게 스며드는 햇빛의 소리, 나뭇잎 하나 떨어질 때 잠시 멈칫하는 공기의 숨, 고양이가 땅을 밟으며 남기는 가벼운 체온 같은 소리들. 그런 소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나는 언제부터 그것들을 듣지 않게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들을 마음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이곳은 참 조용하다. 밤이 되면 '적막강산'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지나가는 차도 없고, 사람의 기척도 없다. 겨울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이 고요가 낯설었다. 마치 세상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이 조용함에도 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면 오직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린다. '째깍, 째깍.' 그 소리는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오늘 하루는 잘 흘려보냈니?" 나는 대답 대신 숨을 고른다. 바쁘게 흘려보낸 하루를 천천히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젊을 때는 세상이 늘 시끄러웠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들어야 할 소리도, 듣고 싶은 소리도 넘쳐났다. 그래서인지 정작 중요한 소리는 자주 놓쳤다. 누군가의 작은 한숨, 마음속에서 울리던 미세한 경고, 잠시 쉬어가라는 몸의 신호 같은 것들 말이다.
이제는 분명히 들리지 않는 소리가 늘어났다. 대신 느껴지는 것이 많아졌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여백이 생겼고, 그 여백에서 생각이 자랐다. "모든 소리를 다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 "지금 이 속도로도 충분하다"는 안도감도 그 여백 속에서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시계 초침은 오늘도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째깍, 째깍.'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한다. "지금 들리는 이 소리면 충분해."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소리를 잃는 일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소리만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고요가 점점 더 고마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