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이팝을 계속 듣게 되는 이유 1
생각해보면 제이팝은 정말 신기한 음악이다. 다른 음악들과 다르게, 제이팝은 중학교 때 입문한 뒤로 듣는 정도에서 지금까지 별다른 굴곡이 없었다. 지금도 적어도 하루에 한 곡은 무조건 제이팝을 듣는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인용하면, 하루라도 제이팝을 안 들으면 귀 안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다. 이제는 제이팝이 심신안정제처럼 느껴질 정도다. 일본어 가사를 들으면 못 알아들어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 들으면 어딘가 마음이 허전해진다. 평소에 변덕이 심한 사람 치고는 신기하게도 꽤 오래가는 취향이다. 그 정도로 제이팝은 나와 아주 잘 맞는 음악이라고 느낀다.
내가 제이팝을 좋아하는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시적이면서도 서정적인 가사, 두 번째는 마음이 벅차오르는, 특유의 밝고 경쾌하면서도 아련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운드이다. 그 중에서 오늘은 가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글에서 언급했듯, 처음에는 서정적인 가사와 분위기를 많이 좋아했다. 한자를 많이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국내 가요와는 또 다른 느낌의 시적인 표현이나 파워 F의 심금을 울리는 감성적인 표현들이 유난히 많았다. 물론 모든 일본 노래가 다 그렇지는 않고, 난해하거나 B급 정서가 기반인 노래들도 있었지만, 나는 가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특유의 소녀 감성이 잘 드러난 노래들을 더 좋아했다.
그 당시에 많이 들었던 노래들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곡을 하나 꼽자면, supercell의 ‘사요나라 메모리즈(さよならメモリーズ)’이다. 학창시절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끝내 전달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경쾌하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함께 아련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느낌이 있어 정말 좋아했던 곡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설렘과 안타까움이 점점 고조되는 기승전결을 잘 느끼는 게 포인트다. 아래에 첨부된 뮤직비디오와 가사 전문을 같이 보면서 특유의 학창시절 짝사랑 감성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그밖에도 ‘1초의 마법’, ‘Dear’, ‘꼭두각시 피에로’, ‘누덕누덕 스타카토’, ‘Fire◎Flower’ 등의 서정성이 짙은 보컬로이드 곡들을 많이 들었었다.
최근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아티스트 중에서도 가사를 뛰어나게 잘 쓰는 싱어송라이터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시적인 가사는 요루시카(ヨルシカ)가 압도적으로 잘 쓴다고 생각한다. 번역본으로도 그 가사가 뜻하는 바를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감상을 받을 때가 많다.
晴れに晴れ、花よ咲け
하레니 하레 하나요 사케
하늘이여 맑아져라, 꽃이여 피어나라
咲いて晴るのせい
사이테 하루노 세-
꽃이 핀 건 맑은 하늘 탓
降り止めば雨でさえ
후리야메바 아메데사에
그치는 비마저
貴方を飾る晴る
아나타오 카자루 하루
너를 밝게 빛나게 해
내가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개다(晴る)’의 후렴구 가사이다. 가사를 보면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맑게 갠 하늘과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들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렇듯 요루시카의 노래에는 소설 속 장면이나 자연 풍경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즐기는 재미가 있다. 그밖에도 ‘그저 내게 맑아라(ただ君に晴れ)’, ‘말해줘.(言って。)’, ‘히치콕(ヒッチコック)’, ‘퍼레이드(パレード)’, ‘구두의 불꽃(靴の花火)’ 등의 곡들을 꼭 가사와 비교하면서 들어봤으면 좋겠다. 여유가 된다면 앨범에 담겨있는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전곡을 들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최근에 내한 공연을 왔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는 아이묭(あいみょん)도 곡의 대중성만큼이나 명가사가 많다. 아이묭의 가사는 요루시카와 다르게 시집보다는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느낌이 든다. 일상적인 표현과 쉬운 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듣고 부르다 보면 결국은 나의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공감대를 형성해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히트곡 ‘너는 록을 듣지 않아(君はロックを聴かない)’, ‘사랑을 전하고 싶다든가(愛を伝えたいだとか)’, ‘마리골드(マリーゴールド)’ 외에도 솔직하고, 때론 저돌적이고, 가끔은 진지하기까지 한 노래 가사들이 꽤 있다. 그중에서 나는 ‘벌거벗은 마음(裸の心)’이라는 곡의 가사를 제일 좋아한다.
この恋が実りますように
코노 코이가 미노리마스요-니
이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少しだけ少しだけ そう思わせて
스코시다케 스코시다케 소우오모와세테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하게 해 줘
今、私恋をしている
이마 와타시 코이오 시테이루
지금,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裸の心抱えて
하다카노 코코로 카카에테
벌거벗은 마음을 감싸안으며
여기서 ‘벌거벗은 마음’이란, 상대를 향한 ‘진실된 마음’이다. 동시에 가장 취약한 상태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 상태로 기꺼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사랑을 말한다는 건 어쩌면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런 떨림과 설렘이 서정적인 기타 선율과 함께 진솔하게 전해지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그밖에도 ‘살아있었던 거구나(生きていたんだよな)’, ‘안녕을 말하는 오늘에(さよならの今日に)’,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空の青さを知る人よ)’ 등의 곡들도 통통 튀는 느낌의 곡들과는 또 다른, 솔직하고 진지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곡이다.
제이팝의 가사는 그 당시 후크송의 세뇌에 지쳐있던 청소년기의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즐기고 감상하는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그저 여흥구에 불과한 동어 반복이 계속되는 음악만 있는 게 아니라, 시집이나 수필, 일기장처럼 그 속의 감정과 상황에 공감하고,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음악도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갖는 의미가 크다.
한편으로는 이런 가사를 쓰고, 이에 공감하는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답고, 솔직하고, 마음이 저며올 만큼 감성적인 말을 노래에 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평소에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까. 그래서 스스로 일본어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 같다. 그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일본의 음악을 이상하고 낯설게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들의 노래를 먼저 찾아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들이 노래하는 청춘에, 우울하고 앞날이 불안한 사람들에게 던지는 위로에, 그들이 언어로 표현하는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봤으면 좋겠다. 언어의 장벽과 선입견을 넘어서면, 새로운 아름다움이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 오늘은 덧붙일 내용이 많아 예정 시간보다 늦게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안 늦도록 하겠습니다...
* 구독자 여러분의 최애 제이팝 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댓글로 많이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