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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음주생활

이것저것1

by Capy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장 먹자며 임금이 내린 은잔을 두들겨 팬 송강(松江) 정철. 고등학생 때는 그가 고전문학을 어렵게 한 알콜 중독 악당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성인이 되어 술 좀 마셔봤더니 나는 그 미약한 주량에 비해 술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퇴근하신 아버지와 오붓하게 마시는 소주, 친구들과 달리는 ‘소맥’, 그리고 약간의 활자에 곁들이는 싸구려 위스키의 맛을 시나브로 알아가고 있다. 언젠가 친구들과 각 지역 소주를 품평하며 지역통합도 이뤄냈다. 나의 술 사랑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겨울 혼자 독일 여행을 다녀왔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 해외여행이라 생각하고 <초급독일어> 수업까지 수강해서 갔는데 막상 가장 능숙하게 한 말은 “Einmal grosses Bier, bitte.(맥주 큰거 한잔 주세요.)” 였을 것이다. 금세 Einmal(한 잔)이 두 잔, 세 잔이 되고... 조금 어려보이는 한국인 남자는 맥주를 리터 단위로 마셔주는 아주 고마운 손님이 되었다. 베를린과 뮌헨의 겨울밤이 꽤나 길었음을 회상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유불급인 법. 자칭 애주가로서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할 따름이오나 지나친 술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을 해친다. 술과 관련된 각종 사건·사고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비둘기와 위장 속 안주를 공유하거나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건 예삿일이요, 인사불성 친구를 기숙사로 배송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누군들 그러고 싶었겠는가. 그렇지만 개인과 지역사회의 건강 문제를 해결해야 할 간호 학생으로서 마냥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술과 관련된 건강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나, 여전히 만인의 기쁨이 되는 술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건강을 덜 해치며 즐길지 고민하고자 한다. 간호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인 인간, 환경, 건강 그리고 간호의 측면에서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풀어보겠다.


첫째, 인간. 본디 간호의 메타패러다임(metaparadigm)에서 인간은 개인, 가족, 지역사회를 포괄하는 개념이나 이 글에서는 개인에 한정하겠다.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양(Quantity)’이다. 얼마 전 학과모임에서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선배가 생각하는 주량의 기준은 뭐예요?” 이른바 빠른년생 후배라 밖에서 술 먹는 것이 자유롭지 못해 본인 주량을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는 정도?”라고 어렴풋이 말했다. 오답이었다. 귀가는 장기 기억의 영역이다. 우리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셔도 눈 떠보니 침대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가출한 사이에도 대뇌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것이 가능하다. 귀소 ‘본능’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량을 정의할 수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주량이 ‘마시고 견딜 정도의 술의 분량’이라고 쓰여 있다. 견딜 정도라는 표현도 애매하긴 하지만 글의 취지에 맞게 기준을 보수적으로 생각한다면 행동이 흐트러지지 않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약 0.1%가 되면 말이 어눌해지고 균형 감각과 같은 운동 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사실상 이 단계까지가 온전한 인격체로서 남아 있는 마지노선이다. 술을 자꾸 흘리고 젓가락 떨어뜨리고 화장실 바닥이 움직인다면 그만 마시는 것이 좋다. 그리고 주량은 많은 변수들의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에 따라 합성되는 알코올 분해효소와 아세트알데히드 분해효소의 양 차이가 가장 결정적이지만 혈액량, 식사 여부, 컨디션 등 그날그날 달라지는 변수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음주량을 유동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환경. 슬기로운 음주를 논하는 데에 있어 환경은 물리적인 것보다는 ‘한 개인의 중요한 타인(The person’s significant others)’일 것이다. 팬데믹 이후 술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우리를 괴롭게 한다. 여기서 문득 우리 사회의 음주 문화를 꼬집고 싶어졌다. 개인이 사회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개인의 음주생활에 있어서도 그 주변 사람들이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하드웨어에는 ‘벼농사 협업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다. 두레와 같은 공동 노동 조직에서 중시되는 공동체 정신이 산업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술자리에서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일례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 '강권'이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면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마음속에 혼자 생각했다.”라며 세 번 증류한 소주를 붓 담는 통에 따라준 정조 임금을 묘사한다. 200년 뒤 후손들도 다들 정조 임금인 양 회사 생활의 윤활제라느니 학문 공동체의 화합이니 하는 명분으로 강권을 자행하고 있다. 화합과 결속이 아니라 지위와 위계의 우위에 의한 ‘폭력’이다. 이런 문화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다 같이 먹고 죽는 문화에서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문화로 바꿔갈 것을 제안한다. 술자리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조용히 술잔에 물을 따라주도록 하자.


셋째, 건강. 단순히 질병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개념은 아니다. 건강에는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 넓게는 영적 건강까지도 포함된다. 때문에 정량적 지표와 주관적 경험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신체적·정신적 관점에서 술은 당연히 적게 마실수록 좋다. 물론 적정량의 알코올(소주 1~2잔/1일)이 심장 보호에 좋은 HDL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음주와 관상동맥(Coronary artery) 질환이 J자형 관계를 갖는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알코올 관련 질환들은 알코올 섭취량과 선형적인 상관관계를 갖는다. 알코올과 그 분해산물 아세트알데히드는 국제암연구소(IARC) 지정 ‘1급 발암물질’이다. 또한 술은 신경안정물질 담당 중추를 바보로 만든다. 인생이 고달파 매일 강소주를 마시면 뇌는 신경안정물질이 넘쳐난다고 착각해서 안정물질 만들기를 멈추고 그 수용체마저 둔하게 한다. 때문에 갈수록 더 많은 양의 술이 필요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알코올은 중독성이 굉장히 강하다. 의존도와 독성이 대마초를 상회한다. 다만, 정신적·사회적 측면을 고려할 때 술이 가지는 긍정적인 면도 있을 수 있다. 사회적 동물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당신이 종강을 기념하여 친구와 ‘치맥’하고 싶은 것처럼.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것과 같이 술은 주관적인 영적 건강의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술은 충분히 주관적 웰빙(Well-being)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렵겠지만 양적 건강과 질적 건강 사이 균형을 찾아 궁극적으로는 술이 행복한 삶에 기여하도록 해야겠다.


넷째, 간호.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술기를 공유할까 한다. 술 먹기 전에는 어떻게든 배를 채우는 것이 좋다. 알코올은 80% 이상이 소장에서 흡수된다. 소장의 수많은 융모와 미세융모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소화 표면적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코올을 위에 오래 머무르게 하여 혈액으로의 흡수를 지연시키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혈중 알코올 농도의 급격한 상승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고, 다음날 알코올 저혈당도 예방할 수 있다. 식사 메뉴로는 고지방군 식품을 추천한다. 삼겹살도 좋고 감바스 알 아히요도 좋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위해 콜레시스토키닌(Cholecystokinin)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는 음식의 위 배출시간을 지연시키는 작용을 한다. 다음날 유산소운동 열심히 할 각오를 하고 밥을 든든하게 먹자. 술 먹는 중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의식적으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혈중 알코올 농도의 상승을 저지하여 술에 덜 취하게 되고 세포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 또 알코올이 항이뇨호르몬(ADH)의 작용을 억제하여 생기는 수분 손실을 보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빨리 마시지 않고, 섞어 마시지 않는 등의 방법을 적용해볼 수 있다. 주량보다 살짝 덜 먹는 센스를 발휘하면 좋다. 술 먹은 뒤에는 역시 물 많이 마시고 푹 자는 것이 최고다. 미 NIH(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자료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된 숙취 해소법은 없다고 한다. 같이 마신 사람의 귀가 여부가 확인된다면 물이나 이온 음료로 수분을 보충하고 재빠르게 잠에 들도록 하자.

여기까지 술을 사랑하는 한 간호 학생이 간호의 메타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네 가지 개념에 맞춰 ‘슬기로운 음주생활’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상해봤다. 일천한 주력(酒歷)과 과문한 지식 탓에 가치 있는 논의가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지성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술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싶었던 순수한 의도에서 이 글이 비롯되었음을. 독자께서 헤아려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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