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판도라의 항아리에 희망만이 남은 이유

이것저것2

by Capy

고통, 질병, 배고픔, 노화와 같은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간 판도라의 항아리에는 희망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그러나 희망이 앞서 빠져나간 것들과 같이 나쁘고 해로운 것인지, 그것들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최후의 수단인지에는 이견이 있다.

니체는 희망을 모든 악(惡) 중 가장 나쁜 것으로 보았다. 희망에서 오는 기대와 괴로움은 사람들을 절망케 한다. 줄기세포 황우석 박사가 그토록 비난 받은 이유는 학자로서의 연구윤리를 지키지 않은것도 있지만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차디찬 바다에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 ‘탑승자 전원 구조’라는 속보 자막을 보며 안도했을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미어졌을까.


희망은 사람들을 조종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그토록 아등바등 사는, 살아남는 이유는 언젠가 내 것을 갖게 될 것이란 희망 때문인 듯하다. 자본가는 그 심리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챙기고 각계의 기득권층은 두터워진다. 나아가 기성세대는 '좋은 대학-좋은 직장-좋은 가정'이라는 그 시절 희망을 자녀들에게도 희망한다. 현실은 명문대 나온 대감집 노비도 십수년간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굴비를 매단 자린고비와 같이,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때문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그 실현 가능성에 관계없이 언제나 힘이 있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먼저 빠져나간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 된다. 온종일 일하고 퇴근한 아버지는 자식들 갖다줄 한 마리 통닭에서 내일 출근할 힘을 얻고, 의료진은 살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붙들고 밤낮으로 씨름한다. 더 나아가 희망은 인류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희망은 인류가 자연계의 무정한 확률에 의존하지 않고 수많은 발명과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가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이 있었다.


인생은 고통이라고들 한다. 불교 철학에서는 그 고통이 바다와 같이 끝없다고 해서 ‘고해(苦海)’라는 용어까지 있다. 신은 아마도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이 세상을 견뎌나갈 ‘마약성 진통제’로서 희망을 항아리 바닥 깊숙이 깔아둔 듯 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증 환자에게 마약성 진통제 투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약물을 오남용할 경우에는 보상회로가 완전히 망가져 폐인이 된다. 맹목적인 희망과 망상은 인간에 해롭지만, 희망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오늘도 소소한 희망을 품고 우리는 살아간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 봐도 소용없었지

(...)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김광석 - 일어나 中



P.S.판도라의 ‘상자’가 아닌 항아리인 이유

판도라의 상자는 사실 오역이다. 에라스뮈스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항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Pithos를 상자라는 뜻의 라틴어 Pyxis로 번역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