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축제의 <귀신의 집>에 대한 변명
고등학교마다 교내 축제에 ‘귀신의 집’이 가장 인기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학교는 한 축제에 귀신의 집을 부스로 운영하겠다는 동아리가 서너 개나 된다. 동아리 담당 교사는 진땀을 뺀다. 뭔가 교육적이고 참신하고 다양하게 부스가 운영되면 좋으련만, 대부분 귀신의 집, 타로점, 타투, 보드게임 일색이니 누구에게 “우리 축제합니다.”하고 말하기가 민망하다. 21세기 과학 기술의 시대에, 괴력난신을 그토록 경계한 공자의 정신적 뿌리가 깊은 나라에서, 더구나 전 국민 중 기독교인이 절반 이상인 나라에서 귀신이라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적으로 귀신은 있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귀신을 멀리하라 하고, 종교적으로 귀신을 인정하면 안 되는, 그런 나라의 고등학생이 축제에서 '귀신 놀이'를 하는 것을 걱정하는 동아리 담당 선생님을 위해 이 글을 쓴다.
귀신의 집은 암막을 설치한 큰 교실에서 이루어진다. 칠흑같이 어둡다. 그런 어둠 자체가 매력이다. 요즘 한밤중에 눈을 감아서 얻는 어둠은 칠흑이 아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나, 각종 전기 기구에 붙어있는 작은 불빛 하나로도 방은 충분히 밝다. 그러나 귀신의 집을 꾸밀 때 아이들은 빛이 들어올세라 바늘구멍까지도 막는다. 이 어둠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칠흑' 같은 어둠이다. 이 어둠 속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우선 무섭다. 어디로 발걸음을 디뎌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칠흑에서 광활함을 느낀다. 교실 크기의 공간이 우주처럼 넓게 느껴지는 것에 놀란다. 무섭고도 놀라움, 이것이 경외감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에 나가봐야 느낀다는 그 경외감을 귀신의 집에서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조작된 어둠일지라도,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누구든 자유를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잡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숨어있는 동료 귀신이 어떻게 나를 놀래킬지 모른다. ‘알 수 없다.’, ‘모른다.’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온몸으로 깨우친다. 물리적으로 조작된 공간의 칠흑 같은 어둠만이 어둠인가?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름이 곧 어둠이고, 그 모름이 곧 무서움인 줄 모르고 얼마나 희희낙락 살아왔던가? 무의식이 그것을 무서워하는데도 무서워하지 않는 척 얼마나 용을 쓰며 살고 있는가? 귀신의 집 같은 조작된 칠흑 속에서 우리는 무서움의 본질을 알게 되고,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앎의 빛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아! 무엇보다 어둠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자유롭게도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 익명성과 익면성의 장점이 동시에 작동된다. 그래서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나는 무한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인다. 가슴은 설레다 못해 뛰고,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여기는 학교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임시로 만들어진 공간일 뿐이고, 모퉁이마다 귀신으로 변장한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자중하자.’ 이 세상 어디에도 무한 자유의 공간은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다.
귀신의 집은 모든 근심과 걱정, 긴장과 우울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강력한 놀이이다. 학업에의 긴장, 학업 포기의 절망, 무기력의 우울,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등, 고등학생들이 가진 모든 종류의 심리적 압박을 해소하려면 초강력 요법이 필요하다. 귀신의 집 체험은 5분 남짓 너무나 짧은 동안이지만, 생각을 멈추게 한다. 스트레스가 경감된다. 게다가 놀라면서 웃고, 웃으면서 비명을 지른다. 두려움을 견디고 어둠에서 탈출하여 나오는 친구들의 얼굴에서 '안도의 웃음'을 본다. 세상은 어쩌면 귀신의 집보다 더 무서운 곳인지 모른다. 지금 아이들은 그곳으로 가기 전에 미리 통과의례를 치르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