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연(2023)
너는 여기 왜 있냐고 물어야 하나, 너는 그대로라는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에 "오랜만이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10년도 더 지나 만난 도윤은 얼핏 어린 시절 얼굴이 보였다. 아니, 물론 이건 내 꿈이라 어린 시절 얼굴이 보이는 게 당연한 거지만.
도윤은 머뭇거리며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도윤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꿈치고는 생생하네. 나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도윤과 눈을 맞췄다. 도윤이 입을 열었다.
"나 7일 동안 같은 꿈을 꿨어. 네가 나온 건.. 아니, 사람이 나온 건 이번에 처음이야."
꿈속의 도윤은 여전히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사건 이후, 도윤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우리 둘 다 그 사건을 얘기하진 않았지만, 어떤 주제를 피하고 있는지는 서로 알고 있었다. 대신 다른 주제를 말했고 둘 다 대학생이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잘 통했다.
도윤은 현재 미국에서 경찰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방학이라 아르바이트와 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며 웃는 도윤이 낯설었다. 어릴 때의 도윤은 작고 왜소한 아이였던 기억이 있다. 늘 위험한 곳, 이상한 곳은 내가 먼저 가자고 했고 도윤은 한껏 울상을 지으며 나를 따라왔었다. 네가 가기 싫으면 혼자 갈 거라고 말하면 무서워서 눈물을 글썽이다가도 꾹 참고 따라가 줬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경찰준비를 하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어릴 때 도윤이를 넘 못살게 굴어서 그 죄책감에 이런 건장한 도윤이를 상상하는 건가?
"너는 뭐 해? 한국도 방학 아닌가?"
"나? 나는 사실 휴학생이야. 그냥 아르바이트하면서 다음 학기 복학할까 말까 고민 중."
"과는?"
"항공과."
"그래? 어릴 때는 체육선생님 하고 싶다더니."
도윤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항공과로 진로를 바꾼 이유는 도윤 때문이었다. 도윤이 미국으로 떠나고 나는 매일 밤마다 울었다. 내가 너무 울자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승무원을 하면 미국에 매일 가니 지금부터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승무원이 되면 도윤이를 볼 수 있다고 달랬었고,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난 그때부터 진로를 승무원으로 바꾸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도윤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공부했었다. 잊고 살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당사자를 만나니 기억이 확 몰려오네.
꿈속의 도윤과 같이 있으니 더 이상 꿈이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도윤이도 이 꿈이 뭔지 정확하게 모르고 어떻게 나가는지도 모른다. 물론 내 상상 속의 도윤이라 그럴 수도 있다.
"도윤아, 이 꿈은 여기서 자면 깨는 거 알아?"
"응, 나도 매번 그렇게 깼어."
"난.. 네가 사실 내가 지어낸 꿈이라고 생각해. 7일째 같은 꿈을 꾸니까 살짝 미쳐버린 거지."
도윤이 어떤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얼른 말을 가로챘다.
"그러니까 이게 꿈이 아니라면, 내일 일어나서 나한테 연락을 해줘. 미국에도 인터넷은 있을 거 아니야. 핸드폰이나."
"그렇지."
"이게 내 번호야."
도윤이 완벽하게 외웠다는 표정을 지을 때까지 내 번호를 반복해서 알려주었고, 혹시 몰라 도윤한테 말해보라고까지 했다.
"너 옛날 집번호랑 뒷자리 똑같잖아."
"그거 아직 기억해?"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그럼 그때 연락 왜 안 했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미국에 간 뒤, 도윤의 연락은 뜸하다가 결국 끊겼었다. 나는 도윤에게 꾸준히 이메일, 편지를 보내다가 중학교 입학을 기점으로 더 이상 보내지 않았었다. 그때의 나는 도윤보다 더 중요한 게 마구 생겨날 시기였다.
"잠에서 깨고 나면 이게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러자."
한참을 얘기 나눈 뒤, 도윤과 나는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조용한 방 가운데 가만히 도윤의 숨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침착해, 이건 그냥..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그래. 그리고 이게 진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잖아? 다 내 망상이고 다 내 꿈이야. 애써 마음을 달래고 양을 천마리 정도 세었을 때 드디어 잠이 오기 시작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감고 있을 때 나직이 들리는 한 마디.
"서연아. 나는 네가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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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내 방 천장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