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영화가 딱딱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는 평생 인간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 부분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하다. 이 영화는 사회의 모순 속에서 개인이 갈등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만드는데,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난 뒤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처음 만나는 자유>는 수잔나 케이슨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1960년대 미국이 그 배경이다. 영화에서 잠깐 비친 1960년대 미국의 모습은 불신의 시대였다. 그리고 성에 관련된 내용으로 보아 여성의 성생활에 개방적이진 않아 보인다. 이러한 시대에서 살고 있는 17살 수잔나는 내면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약을 복용해 클레이무어 정신병원에 가두어진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수잔나의 과거 행적들이 나온다. 수잔나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아 세상에 대한 고민이 많고 자신의 얘길 하고 싶어 하는 소녀다. 하지만 편견을 버리고 그녀와 깊은 얘길 나눴던 사람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으면 보통 마음의 벽을 쌓기 마련이다. 혹은 내게 손가락질 하는 자들에게 역으로 비웃음을 날려주는 것이다. 초반의 수잔나와 리사처럼.
하지만 정신병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잔나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 수잔나 역시 다른 소녀 환자들과 똑같을 뿐, 비난받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려는 엄격한 잣대는 정신이상자라는 판정만으로 금세 허물어진다. 그래서 소녀들에게 클레이무어 정신병원은 감옥이자 해방의 장소이기도 하다.
수잔나와 소녀들을 괴롭게 만드는 건 비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신들을 바라보는 삐뚠 시선들이 아닐까. 병원 밖 어른들은 소녀들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혼란을 겪는지 자세히 묻지 않는다. 그저 판단만 할 뿐이다. 모순된 사회에서 소녀들의 고민은 어른들의 눈에별로 중요하지 않나 보다.
리사는 성에 대한 관습이나 일반인에 대한 기준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그런 리사의 자유로운 모습은 수잔나에게 강해 보이면서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고민 없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다 보면 인간적인 면모와 존중하는 방법을 잊기 마련이다. 수잔나는 그런 리사를 보고 ‘마음이 차가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수잔나는 병원을 떠나며 생각한다.
‘나는 정말 미쳤던 것일까? 당신이나 나도 미친 사람일 수 있다.’
사회는 일반적인 기준을 들어 개인의 특성을 옭아맬 때가 있다. 그러나 애초에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평범하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수잔나의 말처럼 사람 한 명 한 명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다. 거짓말을 좋아하면 그런 사람이 되면 되고, 아이처럼 살길 바란다면 그렇게 살 수 있다. 인간에겐 어떤 삶을 살아갈지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선택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리사처럼 사회와 단절되어 욕구만 채우는 삶보단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도겪어보고 극복도 해보는 삶이 더 생명력 있지 않을까.
이런 말이 있다.
자유는 우리가 원했던 것을 무분별하게 즐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억제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힘들게 얻지만, 그만큼 자유를 행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욕구만 채워서 얻은 자유는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결코 타인으로부터의 자유까지 될 수 없다. 인생에서의 선택은 우리 몫이지만,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태어난 이상 이 안에서 스스로 통제하며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 자유라고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 던지는,진정한 자유에 대한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