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나무 Apr 12. 2023

《더 글로리》, 강현남의 빨간 립스틱

김은숙 극본, 안길호 연출, 화앤담픽쳐스

웹 드라마 16부작 - 넷플릭스 방영: 1부 2022.12. 30/ 2부 2023. 3. 10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여타의 드라마와는 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복수에 불타 동분서주하는 다른 드라마나 영화 속의 주인공과 달리 《더 글로리》 속의 복수 방법은 드라마와 스릴러, 호러를 넘나들면서도 동은의 목소리와 태도처럼 차분함을 입고 있으며 근엄하기까지 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꼭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듯이 잘 어울리지만, 그중 강현남은 동은이 '찬란한 영광(the glory)'을 이루는데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맞고 사는 년은 웃지도 않고 사는 줄 알았어요?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남편에게 맞고 사는 강현남의 얼굴은 매끈한 날이 드물다. 이는 동은의 몸에 있는 폭력의 상처와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 강현남의 얼굴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동은과 달리 강현남이 남편의 폭력 속에서도 "명랑"함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 폭력의 자국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동은의 몸에 깊이 새겨진 폭력의 상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덧나고 짙어진다. 따라서 동은의 얼굴과 목소리는 늘 감정이 없고 경직되어 있다. 

동은의 '최초의 가해자'가 그녀의 엄마였기에 동은은 누구를 쉽게 믿을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 보호받았던 적이 없다. 강현남은 무심하고 가혹하고 추운 동은의 세상에는 없는 엄마의 사랑을 준다. 만날 때마다 굶지 말라며 삶은 계란을 주고 배추를 사면서 동은을 생각하고 김치를 담가 주기도 한다.

삶은 계란과 김치는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삶은 계란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다. 소풍을 가거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거나. 김치는 밥상에 늘 오르는, 특별한 음식은 아니지만 없으면 단박에 표가 나는 반찬이다. 삶은 계란과 김치로 동은은 엄마의 사랑을 조금씩 알게 된다. 

동은이 강현남을 부르는 호칭은 '이모님'이다. '이모님'은 요즘 맞벌이 부부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를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인다. 이모는 엄마의 속성을 가진다. 그래서 '이모님'이라는 호칭이 예사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동은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그는 동은에게 엄마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딸을 위해 남편까지 죽일 수 있는 모성에서 동은은 엄마를 새로 정의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상이다." 

동은이 매번 삶은 계란을 거부하지만 굴하지 않고 계란을 삶아 온다. 계란을 까면서 하는 이 말에 동은은 웃는다. 고되고 매운 세상살이에서 언제나 차갑고 무표정한 동은은 강현남의 응원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게 된다.  

"당신이 아무리 날 망가뜨려도 난 이제 당신 무섭지 않아. 나, 빨간 립스틱 바를 거야! 가죽 잠바도 입을 거야! 그리고 아주 먼 나라의 도로를 끝도 없이 달릴 거야!"

동은과 '같은 편을 먹'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강현남은 '하나밖에 없는 기쁨'인 딸 선아를 남편의 폭력에서 구해낼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남편과 그의 폭력이 무섭지 않다. 그의 폭력성을 이용해 손에 '피 한방을 묻히지 않고' 남편을 죽인다.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 그리고 차디찬 바닷속에서 오래오래 썩어, 당신."

남편 이석재가 마지막으로 사준 '꽃가라' 원피스를 입고 해양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한 말이다. 남편을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미안해하지는 않는다. '오래오래 썩'으며 죽어서도 편치 말라는 저주를 한다.

동은과 강현남은 복수라는 목표를 이루자 더 이상 삶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 손에 피는 묻히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익 때문에 만들어졌던 관계는 정리할 수밖에 없다. 

동은은 자살을 하려던 중에, 여정의 어머니가 보인 아들에 대한 사랑에 감복하여 사는 것을 선택한다. 

강현남은 반찬가게를 하며 살고 있지만 활력이 없다. 색색의 반찬을 만들어 예쁘게 포장하고 냉장고에 가지런히 정리하지만 그 반찬들을 바라보는 얼굴은 무표정하고 색이 없다. 저녁에는 가게를 정리하고 불을 끈 상태로 구석에 앉아 이런저런 나물을 넣고 밥을 비벼서 먹는다. 나물의 조화로운 맛을 느끼기 위한 비빔밥이 아니라 밥상을 차리기 귀찮아서 대충 양푼에다 밥과 반찬을 섞어 먹는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모습이다. 

이때 문자가 왔다. "이모님 구합니다. 연락 주세요." 강현남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그는 서둘러 가게를 나간다. 

잠시 돌아서서 빨갛게 립스틱을 바른다. 자신의 얼굴에 만족하며 빙그레 웃고 길을 재촉한다.  

아마도 이번 미션이 끝나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가죽잠바를 입은 강현남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미국에서 가장 긴 50번 국도를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물론 뒤에는 치어리더가 된 선아가 타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이라는 줄을 끊기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