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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나무 Apr 12. 2023

일상이라는 줄을 끊기 위하여

내 침대의 이불은 흰색이다.


매트리스 커버와 시트뿐만 아니라 베개 커버까지 흰색이다. 레이스가 가로나 세로로 혹은 한 겹이나 두 겹으로 바뀌는 경우는 있지만 언제나 흰색이다. 출산 후 줄곧 그랬다.


계절이 바뀔 때 백화점의 침구 코너는 화려한 무늬와 형형색색의 이불로 시선을 끈다. 그런 이불들은 내 의지보다 앞서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럴 때면 울긋불긋 잔잔한 꽃이 쌀알처럼 뿌려진 이불이나 향기가 막 쏟아지는 듯한 발음하기도 어려운 지중해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이불을 사들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불들은 내 방이 아닌 아이들 방으로 보내지고 내 침대의 이불은 여전히 흰색이다.


몇 달 전에 친구 두어 명이 집에 놀러 왔다. 집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식사는 근처 생선구이 집에서 하기로 했다. 집들이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속까지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집을 보는 사람은 집주인의 안방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즐기는 동시에 가감 없이 드러내놓는 보여주는 이의 고충도 알듯해서 무조건적인 찬사를 늘어놓아야 한다. 암묵적인 약속이다. 그러나 안방의 내 침대를 본 친구의 첫마디는 ‘야, 이거 호텔 침대 같잖아. 그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집에서도 그 기분을 느끼려고?’였다.


그랬다. 쌀알 같은 꽃송이나 짙은 향기를 품은 듯한 꽃들이 내 침대를 덮을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여행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내게 여행이란 비행기를 타고 하얀 구름을 가로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호텔 방문을 열어야 비로소 여행을 떠났다는 실감이 난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다. 국내에서도 집을 떠나 산이나 바다, 종교와 무관하게 성당이나 사찰을 돌고 미술관을 가고 경치 좋은 카페에 앉아 커피 잔 속에 시간을 흘려보내며 무심한 나를 즐길 수 있는데 굳이 해외여행만을 여행이라 고집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 년에 한두 번씩 그것도 많은 금전적 지출을 요하는 해외여행이 나 역시도 가끔은 나의 기행(奇行)이거나 고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 여행이란 주위의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작동되는 기제이다. 숙박도 반드시 호텔이어야만 한다. 2017년에 뉴욕에서 한 달 정도 지냈는데 소위 말하는 공유숙박업소를 이용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공유숙박업소를 이용한 여행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의 슈퍼마켓이나 시장에서 낯선 재료를 구입해 밥을 해 먹으며 그들처럼 사는 것. ‘여행이 아닌 현지인처럼 살아 보기’를 슬로건으로 내건 그들의 말은 정말이지 그럴듯했다. ‘살아보기’라는 말에서 미처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망했다. ‘그들처럼’이라는 말은 절대로 그들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원래의 나도 아니다. 출근이나 등교 또는 가족의 속박을 제외하면 공유숙박업소에서의 시간은 여전히 나를 일상에 붙들어 놓았다. 빨래와 설거지, 부엌 치우기.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는 외교관이 된다고, 청소는 한국의 내 집보다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내가 묵은 집의 주인은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분리수거 역시 철저히 하기를 원했다. 매일 배출되는 음식물 쓰레기는 냉동실에 넣어 얼린 다음 매주 수요일에 뒷마당에 내놓아야 했다. 퇴비를 만들어 화단을 가꾸는 데 쓴다고 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행자가 아닌가. 일상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나는 여전히 일상의 범위를 돌고 있었다.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어야 한다. 현지인처럼 사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호텔로 옮겼다. 그제야 일상의 고리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텔 침대는 흰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흰색은 색조가 없는 색깔이다. 아무것도 없는 색이다. 그래서 내게 가장 완벽한 색이다. 흰색은 알록달록하게 덧칠해진 나의 일상을 다 지운다.


여행은 익숙한 모든 것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주위의 어떤 것도 나의 정신을 흩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소한 뉘앙스와 그 숨은 의도를 고민하여 대답할 필요 없이 단순한 물음과 그저 답하기만 하면 되는 곳.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하지 않으며 내키는 곳에서 운을 시험할 수 있는 곳.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과 내가 희한하게도 서로 소통이 되는 그런 곳(영어를 글로벌 언어라고 하지만 내 경험상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런 곳에서는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나는 진정한 자유와 고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여행을 가면 나는 새벽이라고 부르기도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 물론 집에서도 일찍 일어나기는 한다. 그러나 집에서의 이른 기상은 아침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서이지만 여행지에서의 새벽 기상은 해가 뜨기 전의 어둠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빛의 삼원색인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에서 빛이 없는 상태가 되면 검은색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검은색의 명도는 0이다. 색의 삼원색인 자홍색(빨간색 이라고도 함), 노란색, 파란색을 같은 비율로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상일뿐이며 실제로 검은색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프린터 기의 잉크가 자홍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의 네 가지 색으로 구성된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검은색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모든 색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회색이나 갈색이 된다. 그러므로 검은색은 흰색과 함께 가장 순수한 색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역사적으로 검은색은 정치, 종교,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저항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저항은 진행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새로운 시작이다.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두움은 존재와 비 존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기도 힘들다. 아니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순수한 검은색 속에서 새롭게 나를 인지한다. 서서히 흐려지는 검은색은 나의 시간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나의 현재는 0부터 다시 만들어진다.


외국의 빵가게는 우리나라의 해장국집처럼 해가 뜨기 전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곳이 많다. 나는 내가 늘 빵 가게의 첫 손님이기를 바라며 활짝 웃는 얼굴로 문을 밀었다. 그러나 언제나 내게 웃음으로 대답하는 첫 번째 사람은 가게 주인이 아니었다. 출근 전에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손님이었다. 0부터 시작된 나의 현재에서 1은 낯선 얼굴의 미소다. 그 미소는 이후 다음 여행까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미소로 답하는 낯선 이를 기대하면서 빵가게의 문을 힘주어 민다.


그의 미소는 일상에 대한 나의 저항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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