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 이달,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하곡 서 청와 론, 서론(書論)
손곡 이달 시, 하곡 김동운 해서 山寺 산사
- 佛日庵 因雲 불일암 인운
蓀谷 李達 손곡 이달
寺在白雲中 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로
절집
-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
절집은 흰구름 속에 있고,
스님은 구름 쓸 생각조차 않네.
손님이 찾아와서 문이 비로소 열리니,
온 산에 송화가루가 늙었네.
[청와 론]
1. 그 제자의 그 스승
이달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스승입니다.
이달은 어머니가 관기(官妓)였기에 서자 신분이었습니다. 반쪽짜리 양반이었던 이달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취해 울분을 터뜨리고는 했답니다. 이달은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도전적인 언행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재(詩才)가 출중했기 때문에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더불어 이달(李達)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했다고 합니다.
2. 경중정(景中情)의 경시라 할작시면
시를 읽노라면 그림이 눈에 삼삼합니다.
높은 산 중에 구름이 떠있고, 그 구름 속에 절집이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님은 구름을 쓸 생각조차 없습니다.
손님이 와서 그제야 문을 여니,
온 산이 온통 송화가루로 덮여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속을 잊은 탈속의 경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선문답(선問答) 같은 선시(禪詩)로 읽을 수 있다면?'
3. 선시(禪詩)라 할작시면
이달의 시 <산사(山寺)>를 처음 본 순간,
"이거 선시(禪詩)로군!"
이라는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선시란, 불교의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와 같은 겁니다. 말을 주고 받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해석만 해가지고서야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언뜻 보면, 말 밖에 뜻이 있노라 해서, 언외의(言外意)라고 할 수도 있고, 골똘히 보면,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해서, 언어도단(言語道斷) 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는 말이니 역설(逆說)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언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언어를 꾸준히 갈고 닦습니다.
말로 풀이는 해 보되, 그것에 매이지는 말자는 겁니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이제 시를 풀어보겠습니다.
4. 산사(山寺), 절집이라 할작시면
승려가 모인 곳, 부처님을 모신 곳, 불도를 닦는 곳, 불법을 펴는 곳을 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절이 산(山)에'만' 있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도처(都處)가 절이요, 일상이 수행도량인 겁니다.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 속에서 산사를 찾아 헤매야 하는가 묻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절집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요? 가수 김태곤을 불러옵니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있다고 했습니다.
산모퉁이 바로 돌면 송학사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산모퉁이 바로 도는 것이냐는 것이지요?
그 절집, 송학사는, 갈래갈래 헤매며 둘러보고, 산모퉁이랄 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산에 가려 찾지 못하고 있는 그놈, 눈을 감고 보아야 보이는 그놈의 '마음의 집'입니다.
마음의 집은 제쳐놓고, 금강송으로 으리으리하게 대웅전을 지어놓았다고 해서 절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에 부처님을 모신 곳이 마음의 절집입니다. 예수님을 모셔놓으면, 예배당이 되는 것이지요.
5. 흰구름이 뭐길래
이제 절집은 찾았겠다, 하면 어째 흰구름 속에 있느냐는 거지요? 물음을 바꾸면, 흰구름이 뭐냐는 겁니다.
무시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것, 구름이 곧 마음이라는 거지요. 그 마음을 어찌어찌해 보겠노라고 구름 속에, 마음 속에 부처님을 모신 절집을 세우는 것이겠지요.
6. 그런데 그 스님은 어찌 그러시는지
부처님을 모시고 마음을 닦겠다고, 마음을 비우겠다고, 마음을 내려놓겠다고 해야할 스님이 어찌 구름을, 마음을 쓸고 닦지 않으실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닦는다고 닦아지고, 비운다고 비워지고, 내려놓는다고 내려놔지면 그것이 또 어디 마음이겠습니까?
마음 속 절집만이라도 깨끗이 해야할 일이거든, 다 요량이 있었던가 봅니다.
7. 손님은 도둑처럼 온다고
손님이란 한 소식, 깨달음입니다. 그 손님은 작정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도둑처럼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밤손님이려나요?
하여간에 소식이 오겠지요. 어쩌면 그 손님 벌써 수없이 왔다 갔거나, 이미 와서 절집에 좌정해 계신 줄도 모르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 깨달음이라는 손님 소식은 언제 어떻게 오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손님이 오셨다고 하네요. 이제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는가 봅니다. 무명(無明)을 밝혀주는 개안(開眼)이겠습니다.
깨달음의 눈이 열리고 보니, <온 산에 송화가루가 늙었다>고 했네요. 선시(禪詩) 속에 화두(話頭)가 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국입니다.
8. 이리 풀든 저리 풀든
어차피 화두입니다. 풀어 보되 매이지 말고, 모름지기 한 번 풀어보렵니다.
8.1. <온 산에 송화가루가->
만학(萬壑)은 세상천지입니다.
반드시 송화가루가 아니어도 좋습니다만, 온 산을 빼곡히 뒤덮을 양이면 송화가루가 제격입니다. 그것이 바람에 날리니 온 산을 뒤덮고 남을 만합니다.
세상천지가 온통 송화가루입니다. 그놈이 그놈인 것 같은 송화가루는 만물(萬物)입니다. 만학송화는 천지만물, 천지자연의 다른 이름입니다.
8.2. <-늙었다>
이 '로(老)'의 주체를 송화로 보면 '쇠었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송화가 성장해서 가루가 날리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로(老)의 주체를 천지만물, 천지자연으로 보면, 이 로(老)는 '오래 되었다'로 읽힙니다.
<도덕경> 제7장에 나오는 천지장구(天地長久), 천장지구(天長地久)입니다.
불가의 화두 속에 아로새겨진 도가의 도입니다. 도가의 근본 이치가 무엇이던가요?
천지만물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부자생(不自生)'이 천지가 장구(長久)하는 이치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무위(無爲)라는 겁니다.
나가르주나의 '무자성(無自性)'을 시타르타의 깨달음에 가져다 놓으면 되려나요? '연기즉공(緣起卽空)'이라더군요.
저 스님의 게으름을 무위(無爲)로 본들, 깨달음의 소행(素行)으로 본들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9. 시로써 맺습니다.
我無來道 아무래도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晝勞夜酒反 주로야주반
無念去一日 무념거일일
盞虛炷火消 잔허주화소
無可無不可 무가무불가
제목 : 아무래도
낮일에 밤술이 되풀이 되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가 가네요
술잔이 비고 심지 불이 사그러듭니다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무가(無可), 그렇다고 할 것도 없고, 무불가(無不可), 아니라고 할 것도 없으니, 제목은 어떻게 해석하든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