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1쪽)
One late evening I
Wrighter, Han Kang
Translater, Park Soo-Kyoung
One late evening I was
watching the steam rising
from the rice in the white rice bowl
Then I knew
Something had passed forever
And it was still now
passing forever
I will eat the rice
I ate the rice
(Han Kang, I Put Dinner in a Drawer, Moonji Publishing, 2013, p. 11)
[청와 론]
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내는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오래 전부터 한강 작가의 팬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강의 책들이 집에 여러 권 있습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한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책을 한 줄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다른 글들을 써야했기에 미루어 두었던 한강의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소설이 아닌 시집부터 읽어보렵니다.
2. '느닷없는 물음'과 '느낌이 중요해'
아내에게 대뜸 "'지금(至今)'이라는 것이 뭘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 끝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디로 뛸지 모르는 '청개구리' 같은 남편을 만나, 제 아내가 고생이 많습니다.
아내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냐는 논지로, 저는 결국은 다 자기 느낌의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논지로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만약 저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객관적인 시간 아니라 절대적인 시간일지라도, 그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 눈에서 눈물이 한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내를 안아주었습니다. 아내가 제 등을 쓰다듬어주었습니다.
3. 그런 '시간'은 없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닫힌 한 계에서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의 변화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닫힌 물리화학계에서의 이치(법칙)입니다. 무질서한 정도가 변화한다는 것이지, 시간이 있어서 그것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의적(情意的) 세계에서의 시간이란, 심정이 자기 내면에, 천지만물에 느껴져서(感) 꼴리는(志) 겁니다. 느낌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물드는 겁니다. 그 물듦은 온갖 방향에서 온갖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벅차게 뻗어나가는 느낌과 쓸쓸하게 스러져가는 느낌, 그 느낌들이 심정의 시간입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이 다시 '지금 이 순간 여기'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 심정의 시간입니다.
논리적 세계에서의 시간이란, 움직임입니다. 움직임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계기를 동시에 갖습니다. 최한기는 그 움직임을 활동운화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음양인 기(氣)가 스스로 움직이는 과정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 활동운화하는 기의 양태를 시간이라 표현할 뿐입니다. 시간이 따로 존재해서 그것이 기 속에, 무슨 전류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기의 활동운화가 곧 시간입니다.
결국 시간은, 활동운화하는 기에 대한 물리화학적 표현이고, 심정적 느낌일 뿐입니다.
4. 지나가 버린 것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한강이 시에서, '지나가버렸다'고 하는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시간은 없다'고 이미 이야기했으니, 다른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지금'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여기'
'지금 이 순간 여기를 느끼고 있음'
어떻게?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느끼고 있는 겁니다.
느끼는 매 순간이 새 순간입니다.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는 그 느낌에 대한 망각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는 겁니다.
느끼면 살아있는 것이고, 못 느끼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황홀하게 느끼면 황홀하게 살아있는 것이고, 쓸쓸하게 느끼면 쓸쓸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5. 밥만 밥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은, 활동운화한다는 것은 결국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느낌이란 주고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이 다 님이라'
한용운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가져오렵니다.
'밥만 밥이 아니라, 내 안에 드는 모든 것이 다 밥이라'
'물리적인 밥'을 먹습니다. 흰 공기에 담겨 김이 피어오르는 밥은 물리적인 밥입니다. 햇살을 받는 것도 밥을 먹는 것이고, 꽃향기를 맡는 것도 밥을 먹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한 밥도 있을 테지요.
'심정적인 밥'을 먹습니다. 어머니의 손맛, 정성이 밥입니다. 그리움이라는 밥을 먹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밥을 먹는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밥도 있을 겁니다.
'생각이라는 밥'을 먹습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치에 대한 생각이 밥입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밥도 있을 겁니다.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밥을 먹고 있다는 겁니다. 신명이 꼴려서 꼴리는 대로 했다는 겁니다.
밥 얘기에 똥 얘기 슬쩍 얹어 놓으면서 맺습니다.
'똥만 똥이 아니라, 내게서 나가는 모든 것들이 다 똥이라.'
밥이 곧 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