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랄리 파르자 <서브스턴스> & 한강 작가 『채식주의자』
1. 줄리아 크리스테바 : 언어 이전의 감각적 혼돈으로서 비체(abject)
애브젝트(비체, Abject) 개념의 출처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저서 『공포의 권력- 애브젝션에 관한 에세이(Powers of Horror: An Essay on Abjection)』(1980)이다. 여기서 비체(abject) 개념을 제시하며, 주체 형성의 과정에서 억압되고 배제되는 감각적 질서에 주목한다. 비체란 주체의 경계를 침범하고, 체계와 질서를 위협하며,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는 주체가 자신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쫓아야 하는 것’이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고 끝내 자아 내부에 잔존하며 불쾌감과 매혹의 이중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이다. 또한, 애브젝트는 매혹과 반감이 공존하는 불쾌한 대상이자 모든 주체의 정체성과 통일성, 체계, 질서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중간적인 것, 모호한 것, 복합적인 것으로서 주체가 주체성(subjectiveity)을 형성하기 위해서 억압하고 밀어내야 하는 존재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주체와 세계와의 경계는 후천적인 것이다. 인간은 아무런 경계도 갖지 않은 존재로 태어나며 인간으로서의 첫 경험은 충만함, 주변과의 일체감으로 이루어진다. 주체는 자신의 일부처럼 여겨졌던 것들 중 자신의 적절한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것-애브젝트-을 몰아내면서 경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주체는 자신의 애브젝트를 배제하고 추방함으로써 단일한 주체로서의 위치를 구현하고 사회는 반사회적 요소들을 몰아내거나 억압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애브젝트는 완전히 추방되지 않으며 주체의 주변에 남아 모든 정체성을 배제하고 위협한다. 이처럼 주체의 주변에 애브젝트를 추방하고 배제하는 현상을 애브젝션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대상과 분리를 열망할 때 그 대상을 역겹고 비천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그 대상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한 감정을 말한다. 애브젝션은 애브젝트에 대한 주체의 육체적이고 상징적인 느낌과 반응이며 주체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외부 위협에 대한 주체의 저항이다.
크리스테바는 비체의 가장 뚜렷한 양상으로 여성의 몸, 특히 어머니의 신체를 지목한다. 주체가 상징계(the symbolic)에 진입하기 위해 추방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자신의 기원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피, 출산, 배설물, 구토 등 생물학적 경계 위에 위치한 요소들은 사회문화적으로 ‘더러움’과 ‘불결함’으로 간주되며, 상징계로부터 배제된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잔여들은 상징계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주체의 감각을 흔들고, 언어 이전의 혼돈 상태를 일깨우며 존재론적 위협을 가한다. 이처럼 애브젝트는 모호하고 경계적인 감각으로,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과 신체의 흔적을 담아낸다.
“나는 질에 대해서 육체적으로 개념적으로 조각적 형태로 건축적인 요소로 신성한 지식의 근원으로 황홀경으로 출산의 통로로 변형으로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질을 뱀 형태이 외형을 가진 일종의 반투명한 방으로 간주했다. 나에게 있어 질은 가시적인 것에서부터 비가시적인 것으로의 변화 생식의 신비와 욕망의 형태가 휘감겨있는 나선형의 또아리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힘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밀한 지식”의 원천은 여신 숭배에 혼과 살을 하나로 결합한 근원적인 지표로 상징화될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의 개념은 여성의 성기 이미지에 드러난 저항성, 혐오와 매혹의 월경혈, 창조적 모성 등 여성의 몸과 관련된 내용이며 페미니즘적 요소를 많이 함유하고 있다. 그녀는 여성의 신체가 단순히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 형성의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억압되어야 하는 경계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특히 어머니의 몸은 주체에게 심리적, 상징적 기반이 되지만, 동시에 주체로부터 추방되어야만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주체는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상징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기 위해 어머니와 상상계를 배척하고, 사회와 결속하기 위해 금기를 종교로 승화시켜 배척하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정체성이라는 보편적 기준을 상정하고 이방인을 배척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에게 모성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가부장제에서 억압된 것은 여성이 아니라 모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크리스테바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1987)에서 여성과 환상적인 처녀 모성과의 동일시가 가부장 문화 속에 헛된 안정감을 주고 여성에게 변화와 발전의 기회인 모든 사회적 관계를 금지시켰다고 보았다. 동정녀는 '말씀',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신에 의한 임신'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부성을 보장하고 모계사회의 흔적을 없애는 하나의 방법이다. 오히려 그녀는 모성이 가지고 있는 경계를 넘나드는 속성이 성스러움과 연결된다고 믿으며 그것을 통해 기존 역사의 무게를 이겨내고 문화적 전통을 탈피하고자 노력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애브젝트는 주체의 삶 전체를 잠식되고 위협하지만, 승화 작용을 통해 공포와 거부감, 밀어냄이라는 갈등을 해소한다. 그리고 애브젝트의 모호함과 위협은 예술적인 승화를 통해서 카타르시스적인 구원의 형태를 제공하는 종교와 예술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애브젝트가 미적인 영역인 예술로 고양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예술은 분명히 고정관념과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지 않으며 상징계적 질서를 발전시키지 않은 이미지, 행위, 유희 들을 보여주고 사람들은 이에 매혹된다. 문학의 예를 들어, 예술가들이 한계의 침투를 증언하는 사람들, 기쁨과 고통 사이에 전(葥) 언어적인 것들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인들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애브젝트에 매혹당하고 애브젝트에 자신을 투영한다. 이 불러냄(summon)과 밀쳐냄(repulsion)의 소용돌이라고 불리는 역겨우면서도 매력적인 두 가지 특성이 동시에 미적으로 작동될 때 최고의 효과를 끄집어낼 수 있다. 이는 가부장적 질서에서 여성의 육체가 이중적으로 자리 잡는 방식을 설명하며, 억압된 신체의 재현과 그 예술적 승화를 분석하는 데 결정적인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Abject) 이론을 통해서 바라본
영화 <서브스턴스>와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
본 연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비체(abject)’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신체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추방되며 감각적 경계가 무너지는지를 조명한다. 이를 위해 영화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와 연극으로 각색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비체는 상징계와 사회 질서로부터 배제되는 것으로서, 인간 주체의 경계를 위협하고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존재다. 여성의 몸, 피, 오물, 병, 고통 등은 이러한 비체의 전형적 형상으로 작동한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분석 프레임을 따른다:
1. 비체의 신체: 먼저 크리스테바의 이론을 바탕으로 신체가 비체화(abjection)되는 과정을 파악한다. 이는 사회와 상징계에 의해 배제되거나 억압되는 신체, 특히 여성의 노화, 유출, 고통, 정신질환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와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이 단계에서 모두 '비체'로 작동하며, 신체적 감각의 혼란과 경계 붕괴를 겪는다.
2. 감각 상실 및 초과 이미지: 비체화된 신체는 사회적으로 삭제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시각화되고 이미지화된다. 이때 감각은 실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기호화된 것으로 대체된다. 엘리자베스의 피범벅 퍼포먼스와 영혜의 반복되는 악몽과 자해 장면은 감각의 실종과 초과된 재현이 공존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2.1. 매체 연구 ①: 영화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여성 신체는 쾌락과 공포를 이중화된 장치로 재구성되며, 사회적“기능만 남은 몸”은 결국 기계에 의해 감각이 조정·전도된다. 기계 인식이 감각의 주체가 될 때, 감각은 기계의 명령 체계에 복속된다.
지난 해 12월, 프랑스 출신 여성 감독 코랄리 피르쟈에 의해 탄생한 영화 <서브스턴스>는 호러와 페미니즘을 결합해 그로테스크한 신체 이미지로 이상적인 겉모습에 집착하는 현대사회를 비판해 큰 화제를 모았다. 한때 빛났던 스타 엘리자베스는 50세 생일이 되던 날 고정 프로그램 “모닝 쇼”에서 퇴출된다. 좌절한 그는 우연히 의문의 약물 키트 ‘서브스턴스’를 접하고, 젊고 아름다운 ‘수’와 함께 일주일(7일)씩 교대로 나눠 사는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 순환의 고리 속에서 끊임없이 불화한다. 영화의 타임 전체를 지배하는 미학은 그야말로 비천한(Abject)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오물과 피, 내장처럼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비천한 모든 것을 추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절대적인 미에 대한 추구가 엘리자베스 자체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과하게 만들고, 스스로 하여금 극심한 부작용을 야기하는 약물에 손을 대도록 만든다. 엘리자베스 TV 쇼 대체자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는 수를 탄생시킨 엘리자베스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녀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은 덮어두고 극심한 비교의식을 촉발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그 둘은 하나님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신마저도 늙어버린 신체를 외면한 채, 끊임없는 자기 혐오와 폭식 속에서 혐오를 느끼게 된다. 그러한 엘리자베스의 자기 파괴적인 양상들을 목격하면서, 수는 엘리자베스의 골수에서 안정화 용액을 무분별하게 추출하여 비축하고 교체를 거부하게 된다.
그렇다면, 수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가 얻고 있는 인기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세월이 지나 노화가 찾아온 엘리자베스를 프로그램에서 배제하고 집에서 만들어 먹을 요리책을 은퇴 선물로 주었던 방송국의 권위자 하비에게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본다면, 수 또한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잃게 됐을 때 엘리자베스처럼 대체되고 버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또한, 수가 파티를 즐기다가 가벼운 관계를 맺기 위해 집으로 데리고 왔던 남자도 규칙을 깨며 엘리자베스에게 노화를 촉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도 바뀌어버린 엘리자베스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자신의 상황에만 치중하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비춰진다.
우리는 그 둘이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게 된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하나로 존재하는 순간은 단 한 번뿐이다. 바로 늙고 추한 이종의 괴물이 자신을 피범벅으로 만들어버리는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둘의 온갖 신체 부위가 이접된 괴물이 될 때이다. 여기서 영화가 이전까지 쌓아온 비천함의 의미는 괴물이라고 경악하며 쏟아내는 관중 앞에서 “몬스터 엘리자베스-수”로 이접되면서 한순간에 전복된다. 그리고 줄이 하나임을 끝내 믿지 않는 관객 전부에게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난사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영화 내내 그녀가 그토록 갈구해왔던 응시의 대상이자 시각적 쾌락적으로 쾌락을 주는 존재, 그리하여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여성의 육체적, 사회적 노화와 관련된 그랑 기뇰 장르에 여성의 몸이 문제시되는 바디 호러의 장르 관습이 결합한 작품이다. 여성의 신체 변형과 관련된 영화 연구 이론들에서 존중받는 텍스트는 크리드의 ‘괴물적-여성성’개념과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션 이론을 영화 서사 분석에 적용하였다.
a. 시각적 추방: 노화하는 여성 신체의 괴물화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노화한 여성 신체의 시각화이다. 이는 단순히 여성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산업에 의해 ‘페기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젊은 시절 얻었던 사회적 성공과 대중적인 인기와 상반된 자신의 모습을 잊니 못하고, 암거래되는 ‘서브스턴스’ 약물을 통해 “보다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젊음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금기를 깨게 된다.
본 연구는 크리드가 원용한 크리스테바의 애브젝션 이론을 통해 영화 <서브스턴스>를 분석하고, 여성 신체 괴물화의 함의를 고찰하였다. 이는 여성의 노화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장르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해당 영화 내에서 괴물화된 여성은 완전한 파멸로 귀결되기보다 사회 경계의 모호한 지점에서 지속적으로 매달려 있다. 이는 단순히 여성 신체에 대한 시선을 외부 응시자들로부터 괴물화하는 과거의 시야를 넘어, 내면화된 통제 시스템 즉, 자기 감시와 신체 최적화 욕망의 결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발생한다.
b. 경계 파괴: 분열된 여성 주체성과 젠더적 혼성성
영화 <서브스턴스> 내에 여성 인물들은 전통적인 성역활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 존재들이며, 크리드의 경계 파괴 프레임을 통해 명확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은 어머니이면서도, 희생자이면서도 가해자이면, 아름다움을 갈망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모순적 존재로 그려진다. 즉, “아브젝션 자체가 판단과 정서, 비난과 갈망, 기호와 충동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브젝션은 주체가 항구적인 위험 속에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는 개념을 시각화한다.
c. 모성의 추방: 자기 복제의 공포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는 최초의 시도 시기에 누구나 아브젝션을 경험하며, 이때 어머니가 아브젝트가 된다는 크리스테바의 주장처럼, 영화 <서브스턴스>에서도 엘리자베스의 몸으로부터 수가 탄생하는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며 모성의 추방을 극적으로 구현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출산은 고통스러우나 생명을 창조하는 신성한 과정으로 그려지는 반면, 해당 영화 내에서는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겨 나가는 무섭고 역겨운 의식으로 변형된다. 어디에도 긍적적이고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으며, 아브젝트로서의 모성 담지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즉, 출산을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고 파괴하는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결국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의 괴물화는 단순히 억압의 표상을 넘어, 자율성과 중독, 자기 파괴가 교차하는 복합적 현상이자 공간이 된다. 이와 같은 재현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로 하여금 여성 신체에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심층 구조를 인식하게 하는 비판적 계기를 제공한다.
2.2 매체 연구 ②: 소설 및 연극 『채식주의자』 ("The Vegetarian", 2007)
본 연구는 현대 여성 작가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2007)에서 “감각을 끊는 신체”즉,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감각을 정지하는 주체로서의 여성 화자의 ‘식물-되기’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식물- 되기를 꿈꾸는 여성 인물들의 무의식을 조명하며, 채식, 육식 거부, 식물성, 언어 상실, 관계 상실이라는 모습으로 은유된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가 남편이 화자로 등장하여, 영혜의 변화를 기이한 것으로 보여주고, 「몽고 반점」에서는 형부가 화자로 등장하며 영혜가 소망하는 세계가 원초적인 시원의 세계임을 신비스럽게 에로틱하게 그려낸다.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 인혜가 화자로 등장하여 인혜가 나무가 되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안타까운 어조로 전달한다. 이 안에서 사건을 전달하는 화자가 남편, 형부, 언니 등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인 까닭에, 독자는 주인공 영혜가 겪는 문제를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듣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개별적인 작품들은 이야기의 시작-중간-끝이라는 서사 구조에 대한 유기적 해석이 필요하다.
a. 『채식주의자』에 나타난 비체적 신체의 감각
1부 ‘채식주의자’에서 식욕, 육식, 존재에 대한 무감각 속에서 시각적 ‘비체’로서의 신체 생산하는 과정이 집이라는 공간에서, 혹은 가족 내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양상(폭력, 방치, 공포와 관련된 메타포들)이 일어났는지 차지하는지 살펴보는 시야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분석한다.
영혜의 유년 시절, 아버지는 어린 딸을 물었던 개를 잔인하게 죽여 잔치를 벌였다. 시장 공목의 아저씨들은 어린 영혜에게 '대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라며 개고기를 권했고, 어린 영혜는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눈'을 떠올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국밥을 먹었다. 영혜의 무의식 속에 살생과 복수의 기억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범죄 행위가 각인되어 있는 이 사건은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의 고기를 섭취하여 자신의 살로 만듦으로써 공포를 극복하던 수렵 시대의 습성을 연상시킨다.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라며 음식을 거부하는 딸을 설득하는 어머니 역시 단순히 육식의 문제가 아닌 약육강식의 공동체 속에서 삶 속에 스며 있는 '육식'으로 상징되는 차가운 악의 동물성을 적나라하게 되새김질하게 한다. 그녀가 남편과의 결혼 후 5년간의 편안한 일상을 보냈던 것, 또한 인류의 기억에 새겨진 먼 과거를 잊은 대신 얻어낸 것이었다.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려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채식주의자」, 53면)”
그녀의의 의식 속에서 묘사되는 공간은 어둡고 차가운 숲속의 헛간, 끝없이 빨려 들어가 갇히지만,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은 폐쇄된 공간이다. 첫 번째 꿈에서 보이는 행위는 마치 원시림에서 사냥을 하는 포식자의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인적이 드문 숲속 깊은 곳 → 헛간 → 헛간 속 피웅덩이 → 자신의 얼굴(눈)으로 의식의 공간은 점점 더 폐쇄되고 내밀성이 강화된다. 또한 헛간과 피웅덩이에서 보게 된 생고기와 자신의 신체는 육식을 즐기던 영혜의 가족들과 자신이 먹어온 고기들, 즉 삼킨 것들을 동시에 그 고기를 삼킨 자에 해당하게 된다. 이처럼 영혜의 부조리한 의식 공간은 밤의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는 무정형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이 공간은 영혜의 내적 독백이 반복될수록 현실의 사물들까지 삼켜버리며 하강한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은 해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막대기에 매달려 있는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이 해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18면)”
두 번째 인용은 탈 조각이 나온 음식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남편이 이를 비켜보는 영혜의 의식으로, 첫 번째 꿈을 촉발한 장면이다. 현실의 모든 사물들이 썰물에 휩쓸려 밀려나가고 자신만의 비현실적인 무한 공간에 남는다는 것은 꿈의 의식에 밀린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잡아먹는 치명적인 기억이자 꿈과 현실이 뒤바뀐 것 같은 전도된 공감성이 형성되어 있다. 영혜의 심각한 불면 역시 육식 거부와 자해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니라 꿈과 관련된 의식의 흐름에서 영혜가 현실로 융기하지 못한 채 공간으로 침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물리적 상상력으로 채워진 영혜의 꿈과 독백 속에서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열기는 '뭉개져있는' 물질성과 마찬가지로 살생의 환멸스러운 감각을 완곡하게 한다. 그 결과 영혜의 의식은 포식자로서의 죄의식과 희생물의 고통이라는 양가적 감정 모두에 자연스럽게 침투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산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36면)"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서술하고 있는 채식주의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기존의 채식주의는 보다 활기 있는 삶과 동물의 고통을 감응하고 이를 일상 속에서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동참하는 형태인 반면, 영혜는 중병 환자처럼 무의식을 드러내는 몽상적인 꿈에 영향을 받고, 남편 회사 부부동반 모임이라는 정식적인 자리에서도 브레이저를 하지 않고 가거나, 외부에서도 스스럼없이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활보하다니는 등의 자폐적인 행동을 띈다. 이처럼 주인공 영혜는 신체와 관련해서만 기억, 행동, 진술하는데 그 시작점은 몸의 경계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몸에 대한 외부의 자극과 반응들이 몸의 경계선을 침범하는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결혼으로 분가(分家) 하자마자 그녀는 윗통을 벗고 브레지어를 벗기 시작한다. 이러한 탈의(脫衣) 행동은 집안이라는 사적 공간을 벗어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적 공간으로 넓혀간다. 사회적 공간에서는 반드시 옷을 입어야만 하는 상징계의 경계선을 ‘이탈’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인과 달리,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 즉 속옷과 외투, 몸에 주입되는 육식과 몸에 투여되는 약물이나 주삿바늘 등에 예민한 거부반응을 보이다 점차 보다 강력한 저항의 의지를 발휘한다. 더불어 영혜의 육식 거부는 단순히 개인의 일탈을 넘어 비인간화된 문명의 폭력과 약육강식의 논리로 황폐해진 자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역동을 드러내고 있다.
b. 정신 분석학적 관점에서 드러난 『몽고반점』의 욕망 이론
2부 「몽고반점」은 비디오 예술 작가이자 '제2의 인격'이 강한 영혜의 형부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형부가 꿈꾸는 예술은 '더 고요하고, 은밀하고,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분주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작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예술혼을 실현할 수 있는 대상을 현실화하지 못하고 무력한 자기 환멸을 가지며 살아가던 중, 아내에게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 순간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이 연상되며 매혹적인 이미지와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형부는 자신이 가진 충동적이고 강렬한 자아가 금기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만물의 배경과 깊이를 획득하는 힘으로서 경계를 넘게 된다. 그는 영혜를 통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경계에 가지는 사람의 '가지를 치지 않는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을 느낀다.
영헤의 분열 증상이 또한 형부의 자기중심적인 예술적 욕망을 통해서 회복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하고 주장해 본 적 없이 살아왔던 영혜는 형부가 자신의 몸에 그려주는 꽃 그림을 통해서 새롭게 촉발하게 된다. 그 안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고,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며, 형부와의 행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영혜는 자신이 염원하는 세계의 태초가 어떠한 폭력도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적 세계였음을 깨닫게 된다.
칼 융은 '제2의 인격'이 출현하며 '제1의 인격'과 대극 할 때,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용은 영혼으로 "원시적. 무의식적 정신을 재구성하는 시도"라고 하지만, "정신이 늘 자신에 관해 진술한다 해도 결국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쇠렌 키르케고르 역시 유사한 방법을 제기하고 있다. 그 또한 자신의 정신적 외로움을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생각에 의해서만 덜 수가 있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고통과 내면의 대극 현상이 화해와 통합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종교적 성찰이 현실 세계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가능성은 종교적 성창을 통한 치유 효과를 문학을 통해서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문학이 인간의 고통을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인간의 고통을 구원할 방법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합하는 작가들은 '제2의 인격'에 압도당하지 않고, '제1의 인격'과 통합하며 하나의 방법으로 형상화할 필요가 있다.
c. 『나무 불꽃』에 나타난 ‘거꾸로 선 나무’의 생성과 교목성의 꿈
3부 『나무 불꽃』에서 한강의 영혜가 나무로 변신하는 ‘나무-되기’를 분석하며, 이들의 변신 서사가 갖는 포스트휴먼적 의미가 어떻게 여성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창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그려 나가보고자 한다. 『채식주의자』가 남편의 시점과 영혜의 내적 독백이 교차되는 이중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무불꽃」은 언니 인혜를 초점 화자로 하여 자신의 내면과 그의 눈에 들어온 영혜의 모습을 교차 서술하여 조명한다. 두 여성 자아들 사이의 ‘차이’들을 보여줌으로써, ‘주체성’의 문제를 회의, “재사유”케 한다는 점에서 ‘유목적 주체’의 모습들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영혜의 꿈에 등장하는 숲과 나무 인간의 이미지는 「나무불꽃」에 이르러 더욱 생생한 실체를 지닌 현실적 대상과 중첩된다. 「나무불꽃」의 초점 화자는 언니 김인혜다. 인혜는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영혜에 대한 원망과 절망,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자신의 아이를 버리려 했다는 죄의식, 언니이자 엄마로서 갖는 책임감 등 관계성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으로 괴로워한다.
영혜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 근처에는 거대한 휴양림인 축성산이 있다. 축성산의 여름 숲은 ‘제 빛을 찾으며 살아나’기 시작한 성스러운 숲(nemeton)의 이미지로 영혜와 인혜를 끌어당긴다. 「나무 불꽃」의 영혜는 이 숲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산속으로 들어가 ‘비에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지하를 향한 하강 욕망이자, 대지적 원형과 맞닿아 있는 뿌리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인혜의 기억에 의하면 영혜에게 숲은 유년 시절 아버지의 습관적인 구타를 피해 인혜와 함께 달아나 길을 잃었던 도피의 공간 혹은 삶/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최초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던 인혜, 맞은 만큼 아이들을 패 주고 다니던 남동생 영호와 달리 어린 영혜는 부친의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하곤 했다.
이렇듯 같은 부모 하의 자매이면서도 기존 가부장제의 전형적 여성으로 출발하여 그곳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언니와 체제 질서에 저항하며 온몸으로 체현적 주체성을 보이는 동생의 병립 배치는 현시대 주체 인식의 변화, 이동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작품은 자매의 대비적 삶을 통한 여성 ‘주체’ 탐색에서, 가부장적 상징체계가 규정해 온 여성 정체성이 아닌, ‘정체성을 복수적 주체로 용해시키는 유목적 주체’에 대한 인식을 선보이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 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156면)“
또한 「나무 불꽃」에서 존재의 순수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영혜의 모습은 숲속을 헤매거나 양달에 쪼그려앉아 나무들의 영혼과 대화하고, 햇빛 강한 날에 창가에 가슴을 드러내고 앉아 나무 인간이 되길 꿈꾸는 모습으로 지속된다. 비록 정신병원에 갇혀 주사로 연명하고 있지만, 식물성을 지향하는 영혜의 노력은 더 치열하고 강렬 해지만, 영혜는 30분 이상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점점 더 완벽한 나무의 교목성을 생성해 간다. 영혜의 물구나무서기에서는 땅속 멀리 뿌리를 뻗어 대지의 모든 것을 소화, 흡수하고 그 영양분으로 꽃을 피우려는 상승에의 욕망이 포착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나무 인간을 꿈꾸며 햇볕 아래 앉아 인간의 언어를 상실하는 대신 식물의 언어를 꿈꾸었다면, 「나무 불꽃」에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함으로써 대지와 더 가까워지고 뿌리에 대한 대지적 가치 부여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혜는 꿈에서 모든 나무들은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고 ‘모든 나무는 형제’라는 몽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몸을 매개로 자신 역시 거꾸로 선 나무가 되어 간다. 영혜의 손에서는 뿌리가 나와 땅속으로 끝없이 파고 들어감으로써 땅속 활동에 밀착되고 지하를 향한 강렬한 욕망을 실현해 간다. 몽상가는 볼 수 없어도 상상하고 꿈꿀 수 있듯이, 병실 침대에만 누워 있으면서도,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집념과 몽상은 땅속 깊이 침투하여 뻗어가고, 지하의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수직성과 식물적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결국 한강 작가에게 나무 이미지는 상상력을 거처, 일종의 꿈의 요새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서 거부하는 한강의 인물들은 모두 실어증과 망각의 양상을 보인다. 실어증의 경우 기억의 끝이 침묵이라면, 언어로 통하는 것은 오히려 망각이다. 이는 자연과 정신 사이의 교감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오랜 기억의 희미한 웅알거림, 자신은 망실된 상태에서 아름다운 상상력의 언어를 회복시켜주는 옹알이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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