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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Jul 16. 2024

어떤 무늬

철학의 부재는 일상의 고통, 《지지 않는 하루》

“책 속에서 조용히 자신과 함께 늙은 외로움조차 잃어버리고, 책 속에서 상상한 인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 원작으로 만든 영화 보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시어머니를 가진 며느리는 행복할 것 같다.      

프랑스 남자 올비와 결혼하여 20년 넘게 파리에서 살아가는 저자의 글은 나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하였지만, 편안하면서 지적인 매력을 가진 글은 읽는 내내 행복한 시간을 선물처럼 안겨주었다.    

 

《서재 이혼 시키기》가 무척 인상 깊고 좋았는데, 책날개에 저자의 또 다른 책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갑작스레 직장암 판정을 받고 1년간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고 보냈는데, 그 시기 일상을 담은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가까운 이들이 암 투병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퍼스트 셀》을 비롯하여 항암 투병을 담은 책들을 읽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였다. NHK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위해 취재한 암에 관련된 최첨단 정보와 자신의 방광암 투병 이야기를 함께 엮어 만든 책이었다. 암에 관한 상식을 뛰어넘어 ‘암’에 특질과 발생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인상적이었고, 암을 대하는 태도마저 지적 호기심으로 넘치는 저자의 모습도 귀여웠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책을 집어든 나에게 《지지 않는 하루》는 너무 우아하고 지적인 투병기이다. 투병기라기보다는 ‘암’을 매개로 더 깊어지는 자신에 대한 시선,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수술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하는 환자의 질문에 담당 의사가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추었다 이렇게 답한다. “수술 후엔 삶이 있지요.” 저녁 식탁에서 구역질 때문에 식사를 못하는 저자를 보고 남편 올비는 “6개월 뒤에 출산하는 거야.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아한 의사가 어디 있을까. 고통의 벽 앞에서 이처럼 우아한 농담으로 말할 수 있는 남편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처럼 우아하고 철학적인 투병기를 쓰는 저자가 어디 있을까.     


***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몸을 내준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통도 따라 일어나고, 하루 종일 쫓아다닌다. 온전히 자기만 봐주길 원하기 때문에 책도 읽지 못한다.     


탈모는 여지없이 암이라는 병에 포로로 잡혔다는 걸 증명해 준다. 막을 방법은 없다. 내 몸이 전쟁터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전쟁이든 아군의 사상은 불가피하다.


***     


저자를 만나면 ‘샤또 마고’ 한 잔을 함께 마시고 싶다. 샤또 마고는 너무 사치스러운지도 모른다. 올봄에 우연히 와인 잘 아는 지인 덕분에 만난 ‘피노 누아’가 좋을 것 같다. 봄밤에 마신 피노 누아는 우아하고 세련되면서도 절제된 기품이 있었다.      




〈책 속에서〉 


하늘이 주었던 셀 수 없이 아름다운 감동, 기분 좋은 소식과 함께 샴페인 글라스를 부딪쳤던 순간들, 음악이 주었던 짜릿한 기쁨, 허겁지겁 쫓겨 살지 않고, 음미했다. 내 인생은 유쾌했다. 

    

코르크를 따야 할 시기를 놓쳐 맛이 날아간 포도주가 대부분이다. 영원히 숙성하는 포도주도, 불멸의 인생을 사는 인간도 없다. 적당한 시기에 포도주를 따서 마시고, 햇살을 만끽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있는 걸까?     


오랜 친구는 유행을 타지 않는 캐시미어 스웨터 같다. 치장하기 위한 옷이 아니라 가장 나를 자연스럽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스웨터. 세월이 지나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따뜻함을 잃지 않는, 예측 불허 인생에 그런 존재를 옆에 둔다면 조금은 성공한 삶이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아무개가 여행을 다녀왔지만 나아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여행하는 동안 줄곧 자기를 데리고 다닌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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