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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Jan 29. 2024

책의 우주

《헌책방 기담 수집가》

책이라는 미로에서 길을 잃으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책의 미로에서 가끔 현실 감각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되어 절판된 책을 찾는 사람에게 책을 찾아주고 책에 얽힌 사연을 수수료로 받는 이상하게 재미있는 헌책방지기가 쓴《헌책방 기담 수집가》을 읽으면, 책도 자신만의 고유한 운명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중고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면서 책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헌책방 주인에 따르면, ‘새책방’은 사람이 책을 선택하는 곳인데 반해 ‘헌책방’은 ‘책이 사람을 선택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책 날개에 적힌 지은이 소개가 흥미롭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후 IT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서른 즈음 회사를 그만두고 손님으로 드나들던 헌책방에 취직을 했다니, 매우 흥미로운 이력이 아닐 수 없다. ‘칼’ 대신 ‘글과 그림’을 사랑한 사무라이 오자키 세키죠(尾崎石城, 1829~1876)가 떠올랐다. 책과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하던 하급무사 오자키 세키죠는 일상생활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세키죠 일기’를 남겼는데, 이 그림일기는 에도시대 말기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담고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IT 회사에서 뛰쳐나와 헌책방과 출판사에서 일을 하던 저자는 직접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책에 관한 사연들을 수집하게 된다. 헌책방은 어떤 곳일까. 저자에 따르면, 헌책방은 책 속에 끝없는 우주와 거기서 반짝이는 보물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심이 어지럽게 엉켜 있는 비좁은 시장 골목과 같은 곳이다.     


사랑하던 사람에 얽힌 책의 사연이 있고(‘로리타’ ‘비가 전하는 소식’(귄터 아이히), ‘그 여인의 고백’(슈테판 츠바이크), 1986년 출간된 ‘철학입문’을 찾는 손님에게는 너무 달라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던 동생에 대한 추억이 있다. 부부의 인연으로 인도해준 책의 사연(‘꼬마 니콜라(르네 고시니)’)도 있고, 다 읽는 데 40년이 걸린 책의 사연('모눈종이 위의 생(조선작 지음)'도 있다.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의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에서 ‘부정적적인 생각도 충분히 생산성 있는 결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희망’을 보았다니 읽어보고 싶다. 마르리트 뒤라스가 《연인》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쓴 《앙데스마 씨의 오후》도, 헤르만 헤세의 ‘방랑’도 나는 아직 읽지 못한 것들이다.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소설작품처럼 읽히는 앞부분보다 4부 ‘책과 삶-인생편’이 더 좋았다. 앞부분에 나오는 손님들의 사연은 어떤 부분에서는 글쓴이가 각색을 한 느낌이 들었는데, 4부는 온전히 글쓴이의 경험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으로 느껴져 그것이 더 와 닿았다. 특히 일본작가 시마다 마사히코의 책 ‘미확인 비행물체’에 얽힌 사연인 ‘나의 형 이야기’가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무뚝뚝해 무엇을 선물하거나 사주거나 하지 않던 아버지가 나를 서점으로 데려가더니 읽고 싶은 책을 고르라고 했다. 신이 난 나는 문고판 이야기전집 가운데 한 권을 골랐다. 책 표지만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골랐는데, 집에 가 두근두근 책표지를 넘겨 읽기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맛보았다. 사막을 여행하던 일행이 고생 끝에 보물을 찾는 이야기였는데, 그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그후 몇번이나 더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을 계기로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를 읽으면서 어린시절 나를 책의 우주로 이끌어준 그 책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제목도, 저자도, 출간연도는 물론 출판사도 모르는 그 책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페이지를 넘기며 읽는 동안 알 수 없는 행복이 나를 감싸주었던, 책의 마법을 경험하게 해준 어린시절 그 책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세상에 책이 남아 있는 동안, 그 책과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책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 그 끈이 보이지 않을 뿐. 둘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기에 제아무리 억지로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금방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직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책은 살며시 다가와 제 어깨를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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