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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n 12. 2024

나만 모르는 거야?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2023.12.10. 일요일



슈레기의 날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9시까지 잤다. 코골이로 남편도 내쫓고. 정상적인 아침을 먹고, 정상적인 어른처럼 집안을 청소했다. 어제 슈레기의 날을 보냈기 때문에 열심히 부지런한 척을 했다. 슈레기의 날에 대한 남편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제2회도 기대해 본다. 정기적으로 시행해도 좋겠다.



집안일이 아주 많이 밀렸다. 물론 남편은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냥 내가 세운 기준과 말미에 나만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나도  안 함.





2023.12.11. 월요일



아침으로 먹을 사과를 깎고 있는데 마침 주변에 맴돌며 남편이 내 손질에 안절부절못했다. 남이 보기에 위태롭고 조마조마하지만 나에게는 나만의 안정이 있거늘.



발라당 누운 치즈의 배털을 쓰다듬으며, 왜 강아지는 배에 털이 없을까 고찰했다. 물론 답은 나오지 않는다. 강아지들의 조상 격인 늑대들도 배에 털이 없을까? 걔넨 있을 거 같은데...



필라테스를 하러 노랑티셔츠에 핑크레깅스라는 현란한 차림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7층에서 아이와 엄마가 탔다. 가볍게 인사하는데 그분이 "어머, 머리 자르셨네요. 잘 어울리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겉으로 "감사합니다."라고 기계처럼 말하며 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절 알아보시는 거죠? 내가 아는 아파트 주민은 옆집 아주머니와 강아지 솜이(아저씨와 아이들은 좀 헛갈림), 10층의 무례한 흡연할아버지(절대 인사 안 받아줘서 이제 나도 안 함), 층은 까먹었지만 다정한 노부부(이 경우 각각 있을 때 인식 불가능), 11층에 사는 원피스 입은 나를 보고 임신했냐며 축하해 주던 아주머니뿐인데. 내가 남들을 모르듯 남들도 날 모른다 하며 즐겁게 살아왔는데 조금 쫄았다.


필라테스를 할 때 선생님이 숨 쉬듯 칭찬해 주신다. 거의 이메일 자동첨부 문구 수준인데 들을 때마다 위안이 되고 기분이 좋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 줄걸. 칭찬에 늘 인색했다. 영혼이 안 담겨있어도 칭찬하는 말이라도 해야지, 하고 결심하고 교실에 가서 수행 수준을 보면 자꾸 열이 뻗쳐서 그만... 그냥 한다는 것 자체로 훌륭한 거였는데. 속으로 라테 운운하지 말고 조금 더 북돋아 줬다면 그들도 더 열심히 했을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을 글짓기 교실 선생님께 말한 적 있었는데 "돈 내고 온 열의 있는 성인 학습자와는 다르죠. 호호호."를 좋게 돌려 말해주셔서 위안이 됐다. 하, 그래도 아이들에게 칭찬은 더 해줬어야.


필라테스 선생님은 매번 수업 구성을 어떻게 짜는 걸까, 궁금해하기만 하며(어릴 때부터 절대 질문 안 하고 혼자 답 내리는 스타일이었음) 집으로 돌아왔다. 저렴이 레깅스나 오래된 레깅스를 입으면 자꾸만 탈출하는 뱃살 때문에 새 레깅스를 살지도 고민했다. 뱃살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때문에 자꾸 망설여진다.



매일 씻는다면 그건 휴직자의 삶도 아니고 슈레기의 삶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씻는 게 싫을까? 휴. 싫어하지만 결국 꾸역꾸역 씻고 나가니까 인간 실격은 아니겠지. 요즘엔 기특하게 바디로션도 바른다. 아무튼 머리 자르니까 감고 말리는 것도, 배수구도 쾌적해졌다.



곡물을 섞어놓은 통을 꺼내 밥 지을 준비를 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이걸 다 섞어놓은 거야? 그런다 해도 비율이 맞진 않겠지만..." 나는 말했다. "걍 먹어." 쌀을 2번 씻다가 이유 없이 한 번 더 씻었다. 예전에 본 피시방 아르바이트생 브이로그가 떠올랐다. 아르바이트생은 "그래도 쌀은 5번은 씻어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초등학생 때 배우기로는 2번이 국룰이었는데? 그새 국룰이 바뀌었나, 혼란스러웠지만 역시나 검색해보지 않았다(게으름뱅이). 지금 찾아보니 2~3번이라고 한다.



코타츠를 보고 있으니 심란하다. 남편이 그런 나를 의식하곤 연극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고양이나 한 마리 키울까? 둘만 있기도 적적한데." 처음엔 셋째 냥이를 들이자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몇 초 후 이해하고 킥킥거렸다. 정말 참을 수 없어지면 코타츠 이불을 들추고 그 안에서 녹고 있는 고양이들의 뱃살을 마구 주물렀다. 그들은 잠에 취해 저항하지 못했다. 



고등어. 청주와 레몬즙을 바르고 밀가루와 맛소금을 뿌리고 다시 기름을 바르고 굽는 고등어. 성의가 담긴 고등어였지만 결과물은 고등어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범 44명은 잘 살고 있습니다" [그해 오늘] (daum.net)


오늘 읽은 기사. 인간이 싫어진다. 약자에게만 다른 얼굴을 하는 세계는 지긋지긋하다. 밀양 사건 때 '세상이 나에게 가르친 것'과 정반대로 일이 처리되는 것을 보며 의문이 가득했다.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아무도 화내지 않았다. 대학 때 성범죄를 고발하는 대자보가 무용한 것도, 교내 페미니즘 교지의 글들이 공기 중 비눗방울처럼 무시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약자이지만 약자인 걸 들키지 않으려고, 또 나보다 약한 이를 밟지 않으려고 언제나 살금살금 깨금발로 걸어야 한다.



많은 시간을 소파와 리클라이너를 오가며 보냈다. 창밖으로 거센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남이 바람에 날아갈까 봐, 그를 역까지 데려다주고 또 데리러 갔다.



새로 산 누에고치 장난감이 후추와 치즈에게 호평! 얼마 만에 축구하는 후추를 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틀 갖고 노니까 없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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