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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n 14. 2024

저는 천박해서 이 글이 고리타분하네요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2023.12.13. 수요일


머리를 자르니 아침마다 실험에 실패한 박사처럼 일어난다.



웬일로 코타츠에 들어가지 않고 내 옆에 살그머니 앉은 후추에게 조근조근 뽀뽀를 퍼부었다. 골골거리는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남들은 운전을 하며 욕을 한다지만, 나는 주로 샤워를 하다가 옛날 생각이 날 때 '시발놈..'을 읊조린다. 



언젠가부터 칫솔질을 할 때 눈을 감는다. 한국인 평균 양치질 시간은 45초라는데, 권장은 3분이고, 유튜브에 유명한 의사는 10분을 말하니 또 어떤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1분 정도로 타협 봐야겠다. 머리를 말릴 때는 숫자를 세며 말린다. 왼쪽 오른쪽 각각 60까지 센다(쇼트커트 기준). 머리 감는 것보다 말리는 게 더 싫다. 말려야 하기 때문에 감는 게 싫어진다. 고단하고 아까운 시간인데 안 할 수 없다.



옷방에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담은 상자가 열흘째 덩그러니 놓여있다. 문득 돌아보니 크리스마스까지 2주도 남지 않았다. 세상에. 장식품이 꽤 많아져서 쓰지 않는 것은 아파트에 나눔 하려고 했는데 이러다 내년 설에 글 올려서 비웃음 당하게 생겼다. 장식 언제 하냐고 묻지 않는 남편이 고마워졌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어느 순간부터 쌓여있는 건프라 상자에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쌤쌤이다.



어렸을 땐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힘들다고 여겼다.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주 6일 일하는 삶을 견뎌온 아빠가 대단하고, TV를 독차지하고 누워있거나 홀로 등산을 가도 그것만이 유일한 낙이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휴식이 없었다. 365일 내내. 심지어 지금까지도.



친구가 용하다는 점집에 예약을 했단다. 자기 차례까지 2년이라고.


- 나: 그 사이에 고민이 해결되겠다.

- 친구: 그때가 되면 새로운 고민이 생길 거야!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낙관적이면 굳이 안 가도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오늘의 글쓰기 교실은 뭔가 지루했다. 확실히 학생이 참여하는 활동이 있어야 재밌는데, 이번 수업은 설명이 주였다. 수업을 할 때, 나는 주로 복습퀴즈로 아이들에게 참여 기회를 줬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어처구니없게 쉽게 내면 아이들은 의기양양해지고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뽕(?)에 가득 찼다. 그 들뜬 기세로 나머지 수업을 이끌어나갔는데, 그때는 학생참여를 주지 않았다. 별 이유는 없다. 시켰는데 딴짓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빡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미안해진다. 내 편의를 위해 그들의 재미와 사고 발산을 빼앗았구나 싶고 그렇다. 그런데 시간은 또 시간대로 부족해.


마지막으로 강사님이 준비한 수필 한 편(대충 천박해지는 문화와 그럴수록 중요한 고독에 대한)을 돌려 읽었는데, 여성인권과 빈부격차면에서 자꾸 반박하고 싶은 글이었다. 그것이 글의 핵심이 아니고 작가의 의도와 다른 이해일 수 있음을 알지만, 표현에 자꾸 분노하게 됐다. 피천득의 '인연'에서도 어린 여자아이를 보며 김칫국 마시는 남자가 쓴 글 같다는 소감을 밝혀 선생님을 당황케 하였지만 또 멈출 수 없었다. 제법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오늘이 끝나가는 지금, 힘들고 졸려서 쓸 수가 없다. 그냥 핵심은 이거다. 옆자리 선생님에게 속삭인 말. "저는 천박해서 이 글이 고리타분하네요." 


다음 주 마지막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미리 밝혔더니, 강사님이 사실 책이 이미 나왔다며 살짝 건네주셨다. 남의 글이 궁금타.



저녁을 먹고 치즈랑 놀아준다. 새 장난감이라 흥미를 보이고, 코타츠에서 술래잡기도 하는데 5분 정도면 만족하고 가버린다. 놀이도 그렇지만, 음식 또한 입이 짧아 생을 유지할 만큼만 섭취한다. 덕분에 아주 호올쭉하다. 절전모드로 사는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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