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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짓는사람 May 07. 2023

집에 바닥이 있듯 삶에도 바닥이 있다.

집 짓기의 첫걸음, 바닥을 만들며.

집을 짓겠다고 결심을 하고서도 제천에 있는 건축학교로 가는 첫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든 시작에는 용기와 두려움, 설렘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밀려와서 부침이 있다. 정말 할 수 있을지, 그냥 변화 없이 여기서 살던 대로 사는 게 맞는지, 내면의 소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어 마음을 심란하게 휘저어 놓았다. 마침내 시작할 날을 잡아 놓고 짐을 싸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시작은 늘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시작에는 결코 후회가 없다는 것을. 여태 껏의 나의 후회는 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갈 거라고, 나는 집을 지을 거라고.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몇 년째 어떤 굴레 속에서 계속 쳇바퀴를 돌며 사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가 다시 안 좋아지고, 다시 또 조금 회복하는 것 같다가 어느새 고꾸라지고. 언제까지 괜찮아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 살아가야 할까. 성장하기는커녕 과거의 멀쩡했던 나를 다시 되찾는 것에만 열중해야 하는 걸까 싶었다. 3년간 한치도 나아지지 않는 삶과 일상을 살았다. 스스로가 끔찍했고 그 굴레 속의 시간을 꼽아보면 괴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어디라도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실패일지라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성공일 테니. 


너무너무 힘들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점을 보러 갔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의 상태를 말해주는 보살님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한참을 울고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생계에 대한 막막함이 떠올랐다. 

“그래서 돈은 어떻게 벌고 살아야 할까요…?”

그러자 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잿더미인데 무슨 돈 얘기를 하냐고. 일단은 삶이 먼저니 살아있는 것부터 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


바닥도 없는 상태에서 지붕을 올릴 순 없듯, 현재의 내가 없는 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했다. 바닥을 먼저 만들어야 했다. 건너뛸 수도 없고 나중으로 미룰 수도 없었다. 내가 건축학교에 와서 첫날부터 한 것은 바로, 바닥 만들기였다. 지금 당장 완성된 집을 갖고 싶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피스 하나 박는 것이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어떤 잡념도 걱정도 없이 주어진 일을 그냥 하는 것. 그것을 매일, 꾸준하게 하는 것. 트레일러 프레임에 테고(방수) 합판을 붙이고 피스로 고정시킨 후 뒤집었다. 그리고 구조목으로 바닥판을 만들어 프레임에 고정시켰다. 그다음 단열재를 꼼꼼하게 채우고 그 위에 OSB 합판을 덮은 후 피스로 고정시켜서 마침내 온전한 바닥 하나를 만들었다. 피스 하나, 둘, 일하는 날 하루, 이틀이 모여서 벽이 세워지고 지붕이 올라갈 튼튼한 바닥을 만든 것이다.  


이 과정을 지나는 동안 나의 일상도 변했다. 규칙적인 시간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고, 온 힘을 다해 몸을 쓰다 보면 복잡한 마음들이 끼어들 틈도 없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고 일을 마무리하면 물리적 실체가 있는 성과들이 나의 하루를 증명해 주었다. 오늘은 이만큼, 오늘은 또 이만큼. 아주 조금씩 나의 집은 만들어지고 있었고 나도 딱 그만큼씩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굴레에서 아주 조금씩 경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힘든 날도 많았다. 지난여름에 다리를 다쳐 성치 않은 상태로 하루종일 서있다 보니 발목이 욱신욱신거렸고, 어떤 날엔 기껏 열심히 해 놨던 작업을 다 뜯고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하루종일 일 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온몸이 안 아픈 곳 없이 쑤셔서 이게 맞나 싶기도 했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힘든 날도 있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첫째 날에 잠깐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다. 두께 5T(mm) 짜리 철판에 테고 합판을 붙이는 작업을 할 때 피스 하나 박는데 10분 넘게 걸려서 ‘아, 내가 집 짓기를 쉽게 봤구나,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돌아간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살짝 스친 것이다. (물론 빠르게 멘탈을 붙잡았지만.)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꽤 두꺼운 철판을 뚫었던 거라 힘들었던 것이었고, 다음 공정부터는 피스 하나에 십분 넘게 걸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었다. 그뿐일까. 너무 추운 날에는 손이 얼어서 일하는 시간보다 손 녹이는 시간이 더 많이 들기도 했고, 손가락을 많이 써서인지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서 손을 제대로 오므리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했다. 해야만 했다.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나야 했으므로.  


바닥을 만드는 일은 집 짓기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공정에서 따지면 그렇게 비중 있는 일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집의 바닥을 만들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삶에도 바닥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잿더미가 된 한 사람의 세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하는 일, 그것이 삶의 바닥일지도 모르겠다고. 나에게는 ‘집을 짓는 일상’이 그랬던 것 같다. 집을 짓기 전 서울에서의 일상은 대부분 ‘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하거나(예를 들어 영화를 만드는 일), ‘생계를 위해서 마지못해 하는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서는 도저히 그 어떤 것도 내 힘과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모든 일을 관두고 집을 짓겠다고 제천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집을 짓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렬하게 내가 원하는 일이었고, 너무도 분명하게 나의 힘과 의지로만 나아가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집을 지으며 나의 그 힘과 의지가 가져온 결과물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감각들로 채워진 일상이 조금씩 쌓여 나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집의 바닥을 짓는 것처럼, 삶의 바닥도 튼튼하게 지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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