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way ticket project #03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토록 꿈꾸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의 첫 아침.
같은 칸 할머니의 이른 기상에 나도 덩달아 일찍 눈을 뜬다. 난 어젯밤 계속 설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같이 기차에 오르신 할머니도 나처럼 모스크바까지 다이렉트행. 얼떨결에 동행이 되어버린 덕에 아마도 앞으로 일주일 동안 할머니의 생활패턴에 강제로 맞춰지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눈을 뜨자마자 부산히 움직이시던 할머니는 잠시 후 무언가를 마시기 시작하신다. 향은 분명 커피 인 듯한데... 러시아 사람들, 특히 어르신들은 홍차를 주로 드시지 않던가? 아침인사도 할 겸 그게 머냐고 여쭤보니 역시 예상대로 커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곤 이내 '너 차 마실래?'라고 물어보시며 홍차 티백 하나를 건네주신다. 정작 당신은 커피를 드시면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사람들의 차 인심은 여전하구나 싶다. 그렇게 모닝 чай(tea)와 함께 원치 않았던(?) 이른 아침을 맞이한다.
열차에서 첫날 마주한 분위기는 내가 기대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지낼 수밖에 없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특성상 자의 반 타의 반 다른 승객들과 나누게 될 많은 대화와 교류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내가 타고 있는 2등 칸에는 가족 단위 탑승객이 많아서 인지 도통 사람들과 말을 트기가 쉽지 않다. 역시나 어설픈 러시아어 실력을 선보여서 일까, 아니면 말주변 없는 성격 탓일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또 내 표정과 행동에 보이지 않는 실드가 쳐져있을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몇몇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자꾸 뭐라고 말을 해댄다.
'분명히 제가 말했잖아요. 난 러시아말 조금밖에 할 줄 모른다고... 졸업한 지 이미 15년이나 지나서 다 잊어버렸다구요!!'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와도 간단한 호구조사 이후엔 도통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 분명 언어 실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이 사람들은 내가 소련말을 전혀 몰랐다면 말조차 걸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경험으론 여행 중 만나는 타국의 누군가를 알아가는데 언어가 최우선 요소는 아니다. 외국어가 유창하지 않더라도 서로 박장대소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그런 여행자들을 많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결국 상대를 알아가는데 필요한 건 먼저 다가가고 먼저 마음을 열 줄 아는 자세와 내게 빠져들게 만드는 대화의 기술이다. 40여 년을 이와 반대로 살아온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있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결국 또 닫혀있는 나의 마음과 얼굴이 상대방을 밀어낸 것이다.
그나마 옆 칸,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너무 귀여운 3~4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신기한 듯 자꾸 나를 보러 와 미치도록 귀여운 미소를 날려주고 가는 게 첫째 날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하바롭스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운 열차는 중간중간 작은 역에 정차하며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해간다. 때로는 자작나무 숲이, 때로는 나지막한 산이, 또 때로는 작은 마을들이 지나가는 창밖의 색다른 풍경은 내가 정말 시베리아의 품에 안겨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다음날 아침 정차한 역에서는 다른 승객들과 같이 나도 열차 밖으로 발을 내디뎌본다. 아직까지 기차 안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 의외로 따뜻한 시베리아의 초여름 햇살은 자연스레 기분 좋은 산책을 떠오르게 한다.
잠깐의 자유를 허락한 열차는 이내 가슴이 탁 트일,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의 구간을 달려 나간다. 정말 온종일 창밖만 보고 있어도 한없이 좋을 풍경. 간혹 푸르른 수풀이 보이지만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 때문인지 울창하지는 않다. 때로는 내 침대 칸에서, 때로는 복도에서 창밖으로 스쳐가는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 모든 잡념은 사라진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느끼고 싶었던 시간이다.
[D+3~4] 2018.05.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