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진보세력에게 보내는 메시지
유발 하라리는 최근(3월5일) 캐나다 국영방송CBC의 팟캐스트 커런트The current에서 호스트 맷 갤로웨이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에 대한 입장을 묻는 앵커의 질문에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이 올바른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벤쟈민 네타냐후를 비판해 온 그였기에 이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촉발한 하마스의 무장해제를 주장한 이 인터뷰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이번 전쟁에 대한 소감을 묻는 호스트의 질문에 하라리는 ‘끔찍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악의 시간들’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양쪽 모두가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에 대해 얘기한다. 자신의 친척들도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끌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이웃사람들이 어떻게 살해당하고 끌려가는지를 두려움에 떨며 숨어서 지켜봐야 했다고 말한다. 10월 7일 이후 주변 전체 지역이 잔인성과 증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또 한편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시 정말로 끔찍하다고 말한다. 2백만 명의 사람들이 물도 전기도 음식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하라리는 이 ‘양쪽 모두의 고통’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전쟁의 초기, 세계의 진보세력은 하마스의 폭력행위를 비판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유발 하라리의 비판에 대해 호스트가 무엇 때문에 그 입장이 중요한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가 겪은 고통과 비극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의 임무 때문이다.
지식인은 문제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의 생각을 동시에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존엄한 삶의 권리, 자신의 땅에서 안전하게 살 권리를 지지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도 자신들의 땅에서 안전하고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의 잔혹한 행위를 부인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한다.
하라리는 동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특히 하마스가 행한 강간 등 잔인한 성폭력 행위 등을 부정한 것에 대해 일반 이스라엘인은 물론 이스라엘의 진보세력이 깊은 배신감을 가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마스의 폭력 행위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 정부를 계속 비판하는 것처럼 세계의 진보세력들도 하마스의 잘못된 행동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호스트는 하마스를 무장해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발 하라리의 전쟁 초기 발언에 대해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인지를 묻는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다.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 인터뷰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하마스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의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의해 세워진 자치정부(PA; Palestinian Authority) 의회선거에서 가자지구의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정부를 구성했다(2006년).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기자지구에서 철수한 2005년부터 실질적으로 가자지구를 통치했고 사회복지 시스템을 도입해 가자지구의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존 여당이었고 서방의 지원을 받고 있던 파타Fatah 정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마스는 일주일 간의 내전을 통해 파타의 군대를 가자지구에서 축출하였다. 따라서 적어도 가자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마스는 그들이 선택한 합법적 정부이다. 2023년 6월 한 조사(PCPSR)에 의하면 가자지구의 주민 절반이 PA의 현 대통령 대신 하마스의 리더 하니에Haniyeh를 선택하겠다고 대답했다. 현재 PA가 통치하고 있는 웨스트 뱅크 지역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하마스에게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PA의 대통령은 2021년에 예정되어 있던 총선을 미루고 있다. 하라리는 하마스의 무장투쟁 집단이 팔레스타인 내부가 아닌 외부의 무슬림 세력에 의해 심어진 조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마스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출신 리더 셰이크 아메드 야신에 의해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역 지부로 만들어졌다.)
나는 하마스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이 조직은 무장해제 해야 한다. 우리의 장기적 목표는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하마스가 중무장하고 있는 한 그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다. 하마스는 폭력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조직이다.
10월 7일 공격의 배경에는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평화협정 가능성을 파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 역사적인 평화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 세력 간의 실질적인 관계의 정상화,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마스와 그들의 배후인 이란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하마스는 그동안 어떤 종류의 평화의 가능성도 궤도에서 이탈하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오슬로 평화협정도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하마스가 중무장을 하고 있는 한 우리가 평화에 다가가는 순간마다 그것을 무위로 돌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하마스의 공격이 미국이 이스라엘과 중동의 여러 나라(아랍 에미레이트, 바레인, 수단, 모로코) 사이에 평화 협정을 중재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국교 정상화로까지 진행되자 이에 놀란 하마스와 이란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마스는 무력투쟁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존재 기반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란은 미국과 수니파가 연합해 시아파인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이 ‘신 중동 평화구상’을 추진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하마스를 지원했다. 하마스의 공격이 결국 미국의 신 중동 평화구상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여기에서 하라리의 말대로 ‘스토리’에 주목해 보자.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수업>이라는 책에서 스토리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비판을 제기한다.
종교나 민족, 국가 등은 집단의 정체성,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수난의 이야기,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역사적 영웅과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그 이야기들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 만들어진 이야기, 가짜 이야기이다.
스토리는 한 집단이나, 종교, 민족을 하나로 뭉치고 행동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사실 스토리는 인류만이 가진 도구이고 인류를 지금처럼 지배적인 종으로 만든 핵심 도구였다. 그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토리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갈등과 전쟁, 학살의 도구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스토리가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지면 지구적 보편성을 상실하게 된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자기 중심주의와 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에 빠진 국가민족주의와 종교들에 대해 비판한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우월주의 역시 그 한 사례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21세기는 종교, 이데올로기, 국가-민족주의가 자신들을 지탱하기 위한 스토리에서 해방되어 ‘현실-고통’에 주목해야 당면한 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은 현실이다. 이 현실을 끝내기 위해 결국 두 집단의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을 가능케 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단지 미국의 전략이라는 이유로 평화협정을 부수는 것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나의 이념이나 진영의 논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 유발 하라리의 ‘스토리’에 대한 분석이다. 다시 하라리의 인터뷰로 돌아가 보자.
이 전쟁은 흔히 생각하듯 식량과 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아니다. 지중해에서 요르단 강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을 위해 집과 병원과 학교를 지을 수 있는 충분한 영토가 있다. 전체 인구를 먹일 만큼 충분한 식량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가? 그들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공통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템플 마운트와 성스러운 바위에 대한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야기 때문에 싸우고 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스토리, 예를 들어 북미에서는 유럽의 식민지 시절의 갈등에 대한 유산으로 남겨진 스토리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현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가 아니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주민들이 집을 잃고 조상들의 땅에서 추방되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 비슷하게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집트, 이라크, 예멘 등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대다수 유대인은 살길을 찾아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왔다.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화 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의 ‘정신soul’과 관련된 문제라고 말한다.
호스트가 전통적 지지자인 미국 조차 이 전쟁에서 선례가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이스라엘 정부가 아니라)의 생각이 어떤가 묻는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편향된 한쪽의 정보만 받고 있다. 그들은 가자지구의 실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른다. 단지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당한 고통, 아직 풀려나지 못한 인질들의 참혹한 상황에 매우 분노하고 있다. 수십 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가자지구 인근 국경과 레바논 접경지역에서 피난한 난민이 되었다.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이기려면 팔레스타인이 겪는 고통을 인식하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장의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기적인 목표 즉 일시적 휴전이 아니라 확고하고 영구적인 평화가 정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라리는 자신과 이스라엘의 진보세력은 두 개의 전선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이스라엘은 하마스 보다 더 강력한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신soul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네타냐후 총리와 그의 내각에는 유대인 우월주의와 극단적 인종주의자들이 힘을 갖고 있다. 사실 10월 7일 사건 이전에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사회에는 두 이념적 세력 간의 전투가 존재했다. 전통적인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고유성 uniqueness를 주장하지만 우월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민족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자신들의 땅에서 평화롭고 존엄하게 살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다. 시오니즘이 유대인 우월주의 이념으로 물들면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우위에 놓게 되면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 영향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캐나다의 유대인들도, 미국의 유대인들도 모두 이스라엘의 유대주의는 원래의 유대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대주의자가 아니다 설명하고 변명하기 바쁠 것이다. 소련의 공산주의를 보면서 세계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저건 진짜 공산주의가 아니다라고 변명해야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진보세력이 이 싸움에서 지게 될까 봐 두렵다. 그래서 이 전투는 하마스와의 전쟁 보다 더 두려운 전투이다. 하마스는 아무리 중무장을 해도 이스라엘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무장력이 훨씬 더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의 전투에서 유대교 우월주의와 인종주의가 승리한다면 유대교의 정신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비록 하마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정신을 잃게 되는, 더 큰 전쟁에서 지는 것임을 이해시켜야 한다.
다른 한편 그는 반 유대주의와의 전투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반 유대주의자들과의 전투 역시 그가 세계의 진보세력에게 참여를 요청하는 투쟁전선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넓은 지역에서 유대인을 핍박하고 추방하고 살해했던 반 유대주의에 대항해, 유대인도 자신의 종교와 문화와 고향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싸움에 세계의 진보세력이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반 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을 공격하는 도구로 삼을까 봐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가 내부의 전투에서 패배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깊게 와닿은 것은 이스라엘의 진보적 세력이 처한 입지가 실제로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브런치에 올린 <희망은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글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하마스의 공격으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평화공존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변 동료나 가족들이 받은 정신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일부가 긴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평화의 플랜 대신 즉각적인 응징과 복수로 돌아서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구호물자들이 하마스의 생존을 연장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물리적으로 도로를 봉쇄하고 있는 탓에 팔레스타인으로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물론 네타냐후 정부는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십분 활용해 보급물자를 전달하기 위한 길을 확보하는 데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하마스의 항복을 받기 위해 가자지구의 아이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두 죽어도 좋다는 이스라엘인들의 극단적 분노를 넘어 팔레스타인인들의 참혹한 현실과 고통 역시 인식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고 해도 결국 그 길만이 방법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진보세력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가자지구는 독립적인 경제적 자립구조나 생산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외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주민의 70-80%가 외부 지원에 의존해 살았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이 이집트와 레바논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통제하면서 지원물자의 보급을 통제해 왔다. 주민들은 항상 궁핍과 희망 없는 삶에 짓눌려 있었다. PA 지도부는 오랫동안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이런 주민들의 삶을 향상할 수 있는 조치를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부패한 세력으로 주민들의 불신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진보세력이 가자지구 주민들의 삶을 향상하기 위한 실질적 계획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설득하고 실현시키지 않는 한 하마스의 무장투쟁 노선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하마스에 대한 이란의 지원을 비판함과 동시에 무능하고 부패해서 주민들의 신뢰를 잃은 PA정부에 대한 서방의 지원을 비판하고 제대로 주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정부가 세워지도록 돕는 것 역시 이스라엘이나 서방의 진보세력이 취해야 할 입장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스토리에 의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을 남과 북의 관계에서도 저지르고 있지 않은 지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무조건 한쪽의 항복을 요구하며 반세기에 가까운 경제 제재로 굶주림이 만연하고 일상의 삶이 피폐해진 한반도의 다른 한쪽이 있다. 고통을 이해하고 현실에 기반한 남과 북의 관계는 어때야 할까?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를 거쳐도 안정되고 확실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길, 한쪽을 때려 부숴야 할 적이 아니라 대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삼는 그런 길을 우리는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