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겨울로 간 여행
글래셔 국립공원에서 남쪽으로 잠시 내려가다 서쪽을 향해 7시간 정도 달리면 이번 여행의 최종 경유지인 노스 캐스케이드North Cascade 국립공원에 도착한다. 몬타나의 드넓은 초원을 3시간가량 달리게 되는데 이 길은 네바다의 황량한 들판과 달리 부드럽고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 주민이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것 같다. 검은 소와 말들이 자주 눈에 뜨이고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면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우리의 농촌처럼 한 곳에 오밀조밀 모여 동네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땅의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커다란 집을 짓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철책을 두른 넓은 목초지 가운데 완만한 언덕 위에 커다란 집들이 하나씩 흩어져 있다. 군사적 방어에 최적의 조건이랄까, 공격하는 편은 몸을 숨길 마땅한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없는 낮은 초원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형상이다. 노동집약적 농사가 아니라 기술집약적 목축업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개척시대 땅과 수자원을 둘러싼 이웃 간의 피의 투쟁이 낳은 문화적 특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몬타나의 퀸즈 핫스프링Quinns Hot Spring 지역을 지나는데 강가 마을 풍경이 아름답고 평화롭다. 클라크 포크 리버의 일부일 이 시냇가 조용한 곳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물멍을 때리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그 풍경이 하도 평화스러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동생이 말했다.
"언니 우리 언제 시간 내서 여기 와서 한달살이 하자. 나는 낚시하고 언니는 옆에서 그림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구릉지대를 벗어나 더 넓은 초원지대를 달리고 있다. 길가에는 노랗게 핀 유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몇 분을 달려도 계속되는 유채 밭이 여기저기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원래 가축들의 먹이로 쓰였다는 유채꽃에서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식용유를 뽑아내고 있다. 카놀라유는 오메가 3도 많고 발화점이 높아서 튀김이나 볶음 요리에 좋고 건강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산화가 잘되기 때문에 한 번 쓰면 반드시 버릴 것을 권한다. 캐나다의 특산물이라고 하는데 몬타나에서도 이렇게 많이 재배하고 있는지 몰랐다. 밭 한쪽에서 유채꽃을 뜯어먹고 있는 소들이 눈에 띈다. 행복한 놈들이다.
몬타나의 초원을 지나 아이다호의 좁은 북쪽 길목을 금방 지나치고 드디어 워싱턴 주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스포켄Spokane에 들려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곳에도 한식당이 있어서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오징어 볶음과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값도 비교적 싸고 양도 많고 맛도 있어서 만족스러운 점심식사였다. 안타깝게 김치는 없었지만 도라지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으로 위안을 받았다. 식사 후 온 김에 이 도시에서 가볼 만한 곳을 물어보니 종업원이 몇 군데를 안내한다. 그중 가까운 무어 터너 가든과 매니토 공원을 둘러보며 오래 자동차 여행으로 피곤해진 허리와 다리를 펴고 숨을 돌렸다.
다시 차를 달려 노스 캐스케이드 동쪽 근처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일찍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부터 이 지역에 비바람이 몰아친다는 일기예보가 나왔다. 여행하는 동안 날씨가 참 좋았는데 마지막 날 결국 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산을 넘어가면 나아질지 모른다 희망 섞인 추측을 주고받으며, 기름도 잊지 않고 가득 채우고 마지막 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아직은 다행히 비가 시작되지 않아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국립공원을 향해 계속 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눈앞에 서부영화에서나 봄 직 한 오래된 마을이 나타났다. 서부시대에 세워진 듯한 건물에 윈드롭Winthrop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아마도 이 지역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차를 멈추고 잠시 마을 구경을 하고 커피와 간식도 샀다. 화장실도 이용하였다. 이곳이 아마 국립공원 밖 마지막 마을이 아닐까 싶었다. 마을 옆으로 수량이 풍부한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개울 옆으로 봄기운이 가득한 연녹색 나무들이 싱싱하다. 아름다운 마을이다.
몇 분을 달려도 이어지는 유채밭의 노란색이 황홀했다
산악지대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노스 캐스케이드 Loop(주요 관통로)를 통과하며 그 길 주변에 있는 로스 레이크Ross Lake와 디아블로 인공호수Diablo Lake를 구경하기로 했다. 우림 지대의 숲답게 키 큰 침엽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다. 고도가 높아지자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순식간에 소복하게 눈이 쌓인 삼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와~이거 우리 지금 크리스마스 기분 난다~응? 5월의 크리스마스네~”
눈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 거대한 산봉우리들에 눈발이 날리고 있다. 어느새 전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무겁게 가지들을 밑으로 누르고 있다. 연녹색으로 반짝이던 봄에서 불과 한 시간 만에 검고 하얀 겨울의 한가운데 서있는 우리. 새삼 여행길에 만난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들에 마음이 설레었다.
이 지역은 가장 원시 상태에 가까운 숲 속 아웃백 트레킹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만큼 트레킹 코스가 쉽지 않아 우리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안내 센터에 공원 주변의 산과 호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축소판 실물 모형 지형물이 전시되어 있다. 산봉우리나 호수마다 작은 전구가 들어있어 산 이름을 터치하면 그 산에 불이 들어온다. 모형 외에도 이 지역에 사는 각종 동물과 새들의 박제, 생태계에 대한 정보가 전시되는 전시실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직접 조작해 볼 수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어 재미가 제법 쏠쏠한 전시실이다.
로스 호수 근처 트레킹 코스는 포기하고 멀리서 호수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디아블로 호수는 댐을 조성해 만든 인공호수이다. 워싱턴 주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이 댐은 연어의 회귀를 막아 노스 캐스케이드 계곡에 풍부했던 연어가 이제는 거의 사라진 형편이다. 건설 당시에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전기 공급에 대한 인간의 필요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요즘은 곰을 이주시키는 문제로 원주민과 환경보호자들, 정부 기관 사이에 논쟁이 오가고 있다고 한다. 노스 캐스케이드 지역에서는 현재 그리즐리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목장주들이 자신의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곰을 사살하는 것이 합법화되어 있었고, 연어의 소멸도 곰들이 생존하는데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최근에 다른 지역(옐로스톤과 글래셔 지역, 몬타나 북쪽 일부지역)에서의 성공적인 사례를 근거로 이 지역에도 캐나다의 로키 지역에 사는 그리즐리를 이주시키려는 계획이 정부와 관련 단체들에서 추진되고 있다. 뉴할렘Newhalem과 스카짓Skagit원주민 조직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희소해진 연어를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원주민들, 농장주들이 곰을 생존의 경쟁자이며 위협으로 느끼는 탓이다.
연어의 수가 감소한 것이 인간이 댐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글래셔 지역에 곰을 이주시킨 뒤 급격히 늘어난 그리즐리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곰에 의해 사람이 해코지 당한 경우는 방문객 270만 명당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한 정도라는 조사 결과도 이들이 가지는 막연한 두려움은 해소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1872년 옐로스톤이 국립공원화 된 뒤 총 7명의 인간이 그리즐리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이는 번개에 의해 당한 경우보다 2명 더 적다고 한다. 공원 레인저는 방문객들이 트레일위에서 운전하다 사고를 당해 죽거나 부상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한다. (June2024 SCIENTIFICAMERICA.COM)
디아블로 호수 주변 트레일 코스는 가볍게 걸을 만했다. 호수 위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계곡과 호수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서늘했다. 간혹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로 숲길은 어두웠지만 나무와 들풀들이 풍기는 생명의 냄새로 충만했다. 비취 빛 호수에는 무지개 송어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길가의 풍경들이 이제 우리의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워싱턴주의 고속도로는 차들이 많아지고 소란하고 길가에는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마지막 아쉬움을 달래려고 버나비로 국경을 넘기 전 가까이 있는 베이 뷰 주립공원에 들렀다. 그 길을 찾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정말 문명세상에 돌아왔구나를 실감하며 어렵게 찾아간 해변은 조용한 캠핑장으로 좋은 곳이었다. 맑은 바다와 숲을 배경으로 가족들이 쉬다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드디어 아무 탈없이 국경을 넘어 버나비로 돌아왔다. 딸과 사위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다음 날 모처럼 캐나다에 온 이모를 위해 딸이 밴쿠버 북쪽 바닷가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전혀 해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예쁜 마을 옆 숲길을 꾸불꾸불 가다 보니 숲이 끝나고 갑자기 탁 트인 해변과 작은 섬들이 보인다. 속임수 비치 Deception beach라는 이름이 꼭 어울리는 해변이다. 그 섬에 걸어 들어가던 우리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위에 까맣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모두 홍합이 아닌가. 아줌마의 본성에 지배당한 우리는 바위에 붙은 홍합들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너무 어려서 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큰 바위 옆을 지나는 순간 바위에 올라와 쉬고 있는 물범 세 마리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가까이 서서 보며 속삭여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따뜻한 햇볕아래 엄마와 새끼 물범이 평화롭게 쉬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저렇게 자족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면… 나는 또 부질없는 바람을 떠올린다.
나를 무사히 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임무를 잘 수행한 동생은 이틀 뒤 아침 일찍 제 집을 향해 14시간의 운전을 시작했다. 저녁 9시 무렵 집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어머니가 사진으로 나마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라며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올렸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이러저러한 코멘트를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한편으론 즐겁고 한편으로 안타까웠다. 어머니가 이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은 희망사항이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계시니 우리가 맘 놓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현실에 만족해야지. 더 욕심부리다 탈 나는 수가 있지.
어머니가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우리에게 어머니가 보낸 답장이다.
형지간에 좋다는 건 다 아는 것 아니냐 내가 그래서 너희들 많이 낳았다 미국에 캐나다에 있는 둘이 왔다 갔다 하고 시은이랑 너희 올케들은 나중에 직장 다 마치고 나서 언니들 같이 나이 먹으면은 같이 한국에서도 놀러 가고 놀러 다니고 외국에도 가고 멀리멀리 돌아다니면서 살아라 아직은 어디 먼 데는 가기가 어려우니까 나이 좀 더 먹으면은 편안하게 돌아다니면서 살아라 행복하게 5만 원('엄마는'을 음성전환 기계가 잘못 받아 적은 듯) 없어도 너희들끼리 날마다 만나서 재미나게 살아라
(이 글에는 놀러 다니지 못하는 동생들에 대한 다독거림과 외로운 노후를 보내는 두 딸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너희들 많이 나았다'에 웃고 '엄마는 없어도 행복하게 살으라'는 말에 눈물이 났다. )
모든 것을 미리 설계하고 예견하고 준비해도 뜻하지 않은 장애나 행운을 만나는 여행길처럼 삶은 바라고 예정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이 여행의 끝에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알지 못하지만 담담히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만큼 오늘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여행의 마지막 이야기를 써놓고 오래 기다리던 심장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 후 퇴원해서 써놓은 글을 발행했을 터인데 퇴원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기왕에 쓴 글 늦게라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