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탈주> 리뷰
올여름 너무나 재미난 극장가. 평일에 본 영화 <하이재킹>은 北으로 가더니, 주말에 본 영화 <탈주>는 南으로 왔다. 북쪽으로 가는 사람은 나름의 사정이 있고 남쪽으로 오는 사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둘 다 북이든 남이든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어서 반대쪽에 가면 살 만할까 싶어서다.
영화 제목은 '탈북'이 아니라 <탈주>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몸을 빼쳐 달아난다는 뜻인데 주인공 규남(이제훈)은 말 그대로 영화 내내 몸을 빼쳐 달아난다. 여느 탈북자처럼 두만강 너머 중국을 향한 북쪽이 아니라 휴전선 넘어 한국을 향한 남쪽으로 집념을 가지고 내달린다.
과거 이야기는 축약해서 응집한 장면으로 아스라이 넘기고 오직 현재만을 긴장감 있게 풀어가는 속도감 있는 영화다. 아마도 주인공은 남쪽으로 무사히 귀순할 테지만 - 아닐 가능성은 약 2%? 설마! - 그 길은 아슬아슬하다. 단 한 번의 탈주를 위해 규남은 수 천 번의 예행연습을 하며 지도를 만든다. 그리고 여느 영화가 그러하듯,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의 탈주 준비는 제대로 시도도 해보기 전에 어이없이 발각되고 사태가 커진다.
오래된 인연 덕분에 사태는 전화위복이 되어 북한에서도 그럭저럭 살 만한 자리가 생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규남. 굳이 남쪽으로 가지 않아도 될 텐데 그의 집념은 멈추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아주 낮은 신분이고 군에서도 변방부대 중사에 불과한 그가 탈주를 위해서는 (국가안전) 보위부 특임 요원 행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꾀를 내어 죽은 척하는가 하면 생에 미련 없다는 듯이 죽음을 불사하고 지뢰밭에도 뛰어든다.
그를 움직인 것은 탐험가 아문센의 책, 그리고 한국가요 <양화대교>. 이 책과 노래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규남은 노래의 사연에 동병상련으로 감정이입을 했고 책에는 선물한 사람이 그를 도전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의 탈주 행위가 빛나는 것은 그 책을 선물하고도 정작 본인은 탈주하지 못하는 현상(구교환) 때문이다.
현상의 정체성을 대놓고 밝히지 않고 은근히 암시하는 영화적 연출이 돋보인다. 무시무시한 분위기의 보위부 소좌 현상은 립밤을 바르며 등장한다. 핸드크림을 바르고 노상방뇨 후에는 물티슈로 손을 닦는다. 떨어진 사탕은 남의 입에 넣어주고, 사격 명령을 한 후에는 시끄럽다며 차에 타 버린다. 사람들이 아내 안부를 물을 때 그의 시선은 러시아에서 함께 유학한 추억이 있는 꽃미남에게 향한다. 그 꽃미남이 요즘 피아노를 치느냐고 묻자 그는 다 잊어버렸다고 말하지만, 피아노에 앉자마자 마치 임윤찬이나 조성진인 마냥 열렬히 연주한다.
현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의 섬세함이 곧 나약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의 눈으로 규남의 탈주 의도를 알아챘고 결정적 증거가 되는 규남 아버지의 유품, 만년필을 슬쩍 챙긴다. 그런가 하면 지도 한 장을 펼쳐 두고 지형을 파악해 규남의 동선을 좁혀간다. 지하와 지상, 후발대까지 준비해 착착 투입하는 걸 보면 조상이 이순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명품 지휘력이다. 완벽주의에 깔끔 떠는 강박 때문에 지휘만 하고 직접 나서지는 못하나 싶었는데, 지뢰밭으로 뛰어든 규남의 뒤를 주저 없이 따라 들어가는 멋짐까지 갖췄다.
밤새 내달린 규남을 현상은 따라잡는다. 그리고 말한다. 나라고 하고 싶은 것이 없겠느냐고. 하지만 그냥 사노라고. 자신이 규남에게 선물한 책에 써 준 글귀와는 다르게 살고 있는 현상이다. 몸싸움을 벌인 후 규남은 다시 내달리지만 현상은 끝까지 추격해 군사분계선 앞에서 규남을 쓰러뜨린다. 최후의 한 발이면 규남은 끝이다. 그러나 현상은 그 마지막 한 발을 당기지 못한다. 아니, 당기지 않는다. 그것은 규남의 집념을 응원하는 것일 수도 아니, 사실은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는 자기 삶의 안타까움을 응원하는 것이다.
영화 <탈주>는 규남의 탈북 계획으로 시작했지만 여기까지 오자 더 이상 그의 귀순 성공 여부와 이후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끝까지 규남의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우리의 시선은 오롯이 현상에게 향한다. 탈북 계획이 탄로 난 규남을 구하고 가는 길에 노상방뇨 후 꺼낸 새하얀 물티슈로 마술사처럼 손에서 새가 날아가는 흉내를 내던 현상은 이제 규남이 남기고 간 아문센의 표지를 넘기며 슬며시 웃는다.
"죽음이 아닌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라..."
- 피아노 형
규남에게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고서 정작 자신은 의미 없는 삶을 살았던 현상. 그 이후 현상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군사분계선 앞에서 규남을 살려주고 쿨하게 뒤돌아 북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그의 나머지 인생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이 영화는 사실 '탈북' 영화라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갇혀 운명에 순응하며 살 것인가, 목숨을 걸고 탈주해 볼 것인가를 도전하며 다가온다.
만약 이 영화가 단순한 탈북 영화였다면 이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규남의 이야기는 현상의 이야기와 대조되면서 빛이 난다. 규남은 현상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영화 <탈주>가 던지는 메시지와 재미는 오로지 영화를 보는 전지적 시점의 관람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피아노 형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규남과 같이 탈주할 것인지, 정작 그런 메시지를 품었으면서도 탈주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