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마음
어쩌다 강남에 갈 일이 생기면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리는 버릇이 있다. 제 쓰임을 다 한 책들을 판매하고 현금으로 받아서 또 구입할 책을 찾는다.
원래 같았으면 sf 판타지나 특이한 소재의 소설을 구매했을 텐데, 그날은 뭔가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같이 간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머리를 굴려 찾아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명성은 익히 알지만 그저 유명하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차분하게 책 목록을 보다가 제일 유명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골랐다. 호기롭게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며- 결제를 하고 나오는 길. 책의 무게만큼 나는 붕 뜨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마음의 양식을 구매한 게 아니라, 환심을 사는 무언가를 구매한 것이 아닌가.
약속 시간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 카페에 들렀다. 편지를 써야 한다며 양해를 구하는 당신 앞에서 나는 방금 전 구입한 책을 꺼내 들었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로다.
빽빽한 글씨와 어려운 내용에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는데 당신은 대뜸 나에게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해보라 했다.
자기도 그 책을 다 읽은 적이 없다며,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꺼낼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었나- 사진에는 수줍어하며 책 읽는 척을 하는 내가 있었다.
반전처럼 내가 완독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남에 다시 갈 때 그 책은 중고가의 중고가로 팔아버렸다.
이 과정 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 취향이 아닌 글을 완독 할 수 있는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떤 마음가짐과 동기가 있길래 할 수 있는 걸까?
문득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나는 자칭 문학소녀였는데 안은 텅 비어있고 겉멋만 든 독서부원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도서관에 가면서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이 끌리는 책을 여러 권 집어와집에서 확인하는 걸 좋아했다.
여느 때와 같이 둘러보다가 '조디피코'의 '거짓말규칙'이라는 책을 발견했는데 무려 780p나 되는 전공서적보다 두꺼운 책이었다.
도전 욕구가 들어 허구한 날 학교에 들고 다니며 쉬는 시간마다 수다를 마다하고 책을 읽었다. 연장의 연장을 하며 붙들고 있었는데 결국 읽다가 지쳐서 포기를 했다.
그 며칠 뒤엔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던 같은 반 남자애가 내게 그 책을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나 이거 다 읽었다?
어?
나 다 읽었다고
어?
당황해하던 나와, 쭈뼛거리며 말을 걸고는 도망친 네가 기억이 난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관심 있다는 말을 수고스럽게 한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을 따라 읽고 싶은 그런 마음.
780p나 되는 책을 완독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마음.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객관적인 수가 없다.
처음부터 유리한 게임이 되어버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까지가 취향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