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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나 Nov 23. 2024

구원해주

구원해줘


해주야 기억나? 그런 날 있잖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어둠은 짙게 깔린 날. 남들은 이런 날 우울하다고 나가기를 꺼려하는데 나는 이런날이 좋더라고. 날이 좋다 나쁘다는 맑음 흐림으로 나뉘는게 아니라 사람에 따라 상대적인거잖아.


내가 너를 만났던 날은 10년지기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던 날이었어. 사람도, 우정도 다 잃고 쉽게 바스라지는 낙옆처럼 나는 그냥 가루가되어 흩어지고 있었지. 정처없이 떠돌다가 어느 위스키바에 갔는데 손님이 너 하나밖에 없었어. 다른 인상착의는 기억이 안 나고 네가 나를 쳐다보던 그 눈이 기억이 나.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있었지.


첫 잔으로 맨해튼을 시키고 수첩을 펴고 펜을 들었어. 분노, 슬픔, 서운, 증오, 아픔 이 복잡한 감정은 엉킨 이어폰 줄처럼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정리가 필요했지. 너는 위스키를 니트잔으로 마시며 컬러링 북을 펴놓고 색을 채워넣고 있더라. 왜 네가 드는 색들은 검정색, 보라색, 초록색일까? 조용하게 흐르는 재즈음악 사이로 서걱 서걱 소리가 우리를 감싸고, 너는 길게 나는 짧게 소리를 내며 맞춰가다 네가 먼저 색연필을 내려놨지.


내 시야에 하얗고 얇은 네 손이 들어왔어. 테이블을 두어번 치는 소리에 놀라 네 눈을 쳐다봤는데 말 없이 휴지를 건네며 눈가를 가리켰지. 그 때 내가 울고있다는 걸 자각했어. 한 두 방울 떨어지더니 네가 건드린 손가락 두번에 나는 무너졌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걸 서로 느낀걸까. 왜 이미 지옥을 벗어난 사람들이 하는 위로는 약올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 형식적인 '힘내'라는 말도, 나를 생각해서 해준다는 말도, 모두 다 듣기싫고 모든 연을 끊어버리고 그냥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파묻히고 싶었는데. 네 눈에도 한 두 방울 떨어지더니 네가 색칠한 검정색, 보라색 꽃이 번져가더라. 왜 그게 내게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어. 너도 그 때 나와 같은 지옥에 있을거라고 추측했던 것 같아. 우린 그렇게 마주보며 한참을 울었지.


분명 처음 만났는데 이상하게 편안하고 안정감이 들었어. 서로 통성명을 하고 불행한 사람들끼리 말이나 놓자며 서로의 대한 인생을 그 깊이를 주고받았지. 네 이름은 이해주. 너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깔깔 웃더라. 내 이름과 네 이름을 합하면 구원해주, 꼭 구원해줘라고 외치는 것 같지않냐며. 그 날 이후로 우린 서로 불행할 때마다 찾는 무언가가 되었지.


내 상처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점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데, 네 상처는 점점 곪아가는 것 같더라. 네가 나를 구원해달라며 불렀을 때 사실 철렁했어.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는 건 아닐까싶어 급하게 달려간 포장마차에서 너는 속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고있더라.


최근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지? 정말 여느때와 같이 평범한 날이었고 저녁으로는 같이 외식을 하기로 해서 식당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고했어. 몇주를 부정하다가 겨우 인정하고 오늘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며 쓰게 웃는 너에게 뭐라고 해줄 말을 찾지못해서 소주잔이나 기울였다.


내가 너를 구원해줄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뱉은 말인데 너는 또 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깔깔 웃더니 나를 지긋이 쳐다본다.


구원은 별 거없어. 그냥 힘들다고 손을 내밀면 살포시 손 끝만 닿아주면 돼.

그러다가 같이 불행해지면?

네 지옥에 빨려들어갈까봐 겁나? 괜찮아 나도 이미 지옥이거든. 그러니까 우리 같이 탈출하려고 미친듯이 발버둥 쳐보자.


그래 서로 불행한 사람들끼리 위로해주고 감싸주며 서로를 지옥에서 꺼내줄 때까지 격려하고 미친듯이 발버둥치자. 이 어둠에 잠식되지않게 안간힘을 써보자.


그게 우리의 구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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