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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나 Nov 08. 2024

랑사

뒤틀린

꽉 쥔 손에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꽉 깨문 입술은 비릿한 철분맛이 느껴지고, 울지 않으려고 더 크게 뜬 눈은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뿌옇게 변한다. 내가 너무 좋다며, 나랑 있으면 다른 걱정 생각도 안 날만큼 내가 너무너무 좋다며.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너무너무밖에 말을 못 하겠다며. 이번주에 만나면 애정표현 좀 해달라며 귀엽게 투정 부릴 생각이었는데. 내 애정표현이 숨이 막힌다고 표현하는 너에게 나는 다가갈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저녁으로 뭘 같이 먹었던 것 같은데 뒷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모든 감각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잠시 이 연애를 보류하자고?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다시 반문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헤어지자고 좀. 제발 그만해. 나 좀 놔주면 안 될까?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래.


왜? 내가 너무 사랑한다고 말해서 그래?

왜? 내가 자주 질투해서 그래?

왜? 내가 자꾸 네 여사친한테 디엠 해서 그래?

왜? 내가 계속 집에 찾아와서 그래?


내 모든 관심사가 너인걸 어떡해. 더 특별히 신경 쓴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특권 같은 거 아니야?

나는 너에게 많이 바라지도 않았어,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만큼의 사랑이라도 주길 바랐는데. 도대체 왜?


너는 나를 방목하더니 이제는 드넓은 초원을 뛰어놀라고 내쫓는다. 주인을 잃은 개가 어딜가겠냐며. 달려봤자 그어진 선을 넘지는 못한다며. 나를 매정하게 버리고 앞으로 걸어가는 그 귀여운 뒤통수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면 나를 경멸하듯이 쳐다볼까? 아니면 자기가 너무 심했다면서 나를 꽉 끌어안아줄까. 생각을 하는 사이 너는 작은 점이 된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잡생각들이 밀려와 오늘 잠에 일찍 들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분명 보류한다고 했어. 그러면 헤어지자는 건 아니잖아. 근데 시간을 가지자는 건 헤어지자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헤어진건 아닌데.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 되는 거지?


연락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누워서 너의 인스타 스토리와 피드를 정주행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부계정으로 들어가서 너의 여자 팔로잉 목록을 조사하려는데, 왜 네 프로필 사진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어? 왜 부계정으로만 보이게 해 뒀어?


노란 은행나무 사이로 예쁘게 웃음을 지으며 서 있는 네가 있다. 그리고 작게 태그 되어있는. 네가 절대 친구 이상은 아니라던 내가 거슬린다고 했던 그 아이. 태그를 타고 들어가서 피드를 봤다. 노란 은행나무 사이로 웃고 있는 그 애가 있다. 밑에 쓰여있는 '승현이랑 ㅎ.ㅎ'이라는 문구가 나를 자극한다.  그렇게 디엠을 보냈어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하고 사진을 넘기는데 왜 깍지 낀 두 손이 있는 걸까.


승현아 네가 내게 거짓말을 했구나. 아닌가 헤어지자고 했었나. 아무튼 방금 네가 내게 선을 넘을 용기를 줬어. 거슬렸는데 이제야 정당해졌네. 그래 이제 그년만 없으면 우린 행복하겠다 그렇지?


내가 곧 돌아갈게. 사랑해.

그래 주인 잃은 개가 결국 어딜 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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