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손 푸는 글
00.
영우는 지독한 골초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갔던 그의 자취집에는 다 빠지지 못한 담배 쩐내와, 어제 먹다 남은 배달음식 사이로 보이는 날파리들이 있었다. 너 온다고 급하게 치웠어-라며 멋쩍은 듯 소개하는 그의 모습에 미연은 참을 인을 새겼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사람이 너무 완벽할 필요는 없잖아. 잘생겼잖아.
새로 꺼낸 흰 양말에 바닥에 있는 김치국물이 묻을 때까지만 해도 미연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영우는 쓰레기 같은 집을 여자친구가 온다는 말에 치웠다는 나 자신에 자아도취했다. 그러므로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미연을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함께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에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찾았는데 그 옆 싱크대 거름망에 욱여넣은 담배꽁초들을 보고 아- 이 남자랑 결혼은 못하겠다 미연은 결심했다. 여기까지가 참을 인을 두 번 반.
이미 굳어버린 배달음식을 그대로 바닥에 두고, 새로 시킨 음식을 테이블 위에 뒀다. 그리고 뒤에 오는 말이 가관인 게 '오빠가 널 위해 준비했어.'라며 내게 묻지도 않고 짜장면을 시켜두고는, 탕수육 소스를 냅다 부워버렸다. 참을 인을 두 번 반의 반.
그리고 그 탕수육을 젓가락으로 쿡 찍어서 쩝쩝거리면서 먹는 게 아닌가.
"오빠는, 밥 먹을 때 쩝쩝거린다는 소리 못 들어봤어?"
쩝쩝거리면서 먹지 마 새끼야를 돌려 말한 말에, 영우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반쯤 먹은 탕수육을 짬뽕 위에 올려뒀다.
"오빠한테 지적하는 거야? 우리 엄마한테도 못 들어본 말인데-"
를 시작으로 급흥분을 하더니 오빠한테- 아니 오빠가 널 위해 집도 치우고- 오빠는- 그런 소리를- 정말 쉬지도 않고 말하는 오빠오빠오빠오빠에 참을 인을 세 번. 펑 인내심이 터지는 미연이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송강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테무에서 산 송강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다,
그날로 헤어지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얼굴만 보고 좋아했던 것도 맞는데 나는 그 더러움까지 사랑할 수 없어. 영우는 헤어지는 마당에도 끝까지 오빠타령을 했다. 아 내 연애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처음으로 만났던 사람은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그다음으로 만났던 사람은 여자친구 두고 친구들이랑 섹드립이나 하는 양아치였고, 헌팅으로 만나서 또 헌팅하러 간 헌팅남, 기타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골초 오빠성애자.
아무것도 모르던 집순이 시절이 좋았지. 사랑에 눈을 뜨고 나는 더 이상 사랑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사랑중독이 아닐까. 연애를 계속하면서 애정을 갈구하고 나를 확인받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는 어찌 보면 애정결핍일 수도 있겠다.
미연은 차가운 밤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들었다. 싸한- 멘솔향, 이 몸을 해하는 연기가 내 속을 감싼다. 담배 한 대로 위로가 되는 인생이라니 참으로 덧없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보며 미연은 생각했다.
아 어딘가에서 내 운명의 상대가 짠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01.
"지수야... 나는 왜 쓰레기만 만나는 걸까. 나는 그냥 열혈 한 사랑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지랄. 나가서 놀고 와."
숙취해소제를 사러 나간다는 지수는 미연을 소영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매정하게 나갔다. 글쎄- 쓰레기가 자꾸 꼬인다는 건 네가... 소영은 말을 삼키는 대신에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미연은 늘 사랑을 갈구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정이 불우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사랑에 목매달았다. 미연이 이런 하소연을 할 때마다 모였던 친구들은 몇 번이고 쓴소리를 해댔지만 돌아온 말은 '내 안에 사랑이 너무 많아... 그래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어'라며 철학적인 술주정을 하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더라. 그래서 미연이 헤어졌다며 술을 마시자고 하는 날에는 대충 흘려듣고 술이나 마시면서 노는 날이 되었다. 미연은 취하면 흥이 많아져 헤실헤실 웃으며 춤을 추고는 했다. 흘러나오는 최신 아이돌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미연을 쳐다보며 소영은 미연의 술잔에 물을 따랐다. 한차례 돌고 온 미연은 자리에 앉아서 지수가 사 온 숙취해소제를 쫍쫍 빨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지수는 늘 미연이 정이 많아서 탈이라고 했다.
"아무나 만나는 거 좋아, 연애 계속하는 거 상관없어. 근데 가볍게 만나면 되는데 너는 늘 진심으로 대하니까 문제라는 거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어떻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어!"
"아 진짜 또 지랄."
지수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했다. 아 이 세상물정 모르는 애새끼. 아직 덜 놀았다며 클럽을 가자고 떼를 쓰는 미연에 지수는 이제 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계산을 하러 간 지수와, 화장실에 간 소영. 그리고 홀로 남은 미연. 미연은 이대로 집에 가기 싫었다. 그래서 뛰쳐나갔다.
계산을 하고 돌아온 지수와 화장실에서 나온 소영은 사라진 빈자리에 허망함을 느꼈다.
아 좆됐다.
02.
상수는 불의를 못 참기보다는 잘 참는 편에 더 가까웠다. 세상이 이렇게 흉흉한데 괜히 도와줬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그렇지만 워낙 심성이 착한 상수였기에 불의를 참는 날에는 죄책감에 악몽을 꾸고는 했다. 문제는 그 악몽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어제는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 무리를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고등학생들이 흡연을 하던 바로 윗집에 사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일주일 동안 담배냄새와 새벽까지 이어지는 욕설에 잠을 설쳤다. 그래서 그런지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밤이었는데 허기가 져서 집 앞 편의점에 먹거리를 사러 나가던 참이었다. 흰색 긴 원피스에 긴 머리를 한 세상 청순한 여자가 쩍벌을 하고 바닥에 토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치마 끝자락에 조금 묻은 것 같아 보였다. 아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괜히 엮이기 싫어 최대한 피해서 편의점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불닭볶음면이랑 소시지를 사서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남자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대충 헌팅에 실패해서 기분 뭣 같은데 앞에 개꼴아 보이는 여자애 있더라. 이쁘던데 갈래?라는 내용의 음담패설. 아 왜 내 옆에서 이런 일이.
불의를 참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어떤 악몽을 꾸게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에이씨. 옆에 남자애들이 나가려 하는 모습에 상수는 불닭볶음면을 원샷하고 남자애들을 제치고 성큼성큼 나갔더랬다.
피자 한 판을 만들어둔 미연에 상수는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싶어 근처를 빙글빙글 돌다가, 큰 결심을 하고 제가 이 사람 남자친구라며- 껄렁해 보이는 남자애들을 돌려보냈다. 미연이 슬그머니 눈을 뜬 건 상수가 싸우고 있을 때쯤.
"저기요.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친구나 부모님이나 전화 좀 해보세요."
삐죽삐죽 삐져나온 머리, 조금 올라온 수염,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의 상수를 미연은 계속 쳐다봤다.
"그쪽이 제 남자친구예요?"
"아니-"
내가 이럴까 봐 안 엮이려고 했던 건데. 아니 지금 저 사람들이- 억울해하며 울분을 토해내던 상수의 입은 강제적으로 멈춰졌다. 입술과 입술이 붙었다가 떼어지는 소리가 났고, 상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문을 잃었다. 그것보다 방금 토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무슨?? 상수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차다가 곧 아 취한 사람이었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
"휴대폰 줘봐요."
"잃어버렸는뎅..."
미연은 상수의 휴대폰을 뺏어 들고는 멋대로 제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벨소리가 들렸고 상수는 기가 막히다는 듯 미연을 쳐다봤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속도 없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타이밍 좋게 찾으러 온 친구들에 미연은 거의 끌려갔고, 홀로 남은 상수는 토를 치우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곱씹었다.
토와 뽀뽀만 남기고 떠나간 흰 원피스.
가끔은 불의를 못 참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집을 돌아온 상수는 다른 의미로 또 잠을 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