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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청춘회상

존재 3의 존재

by 쏭나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中


우리 병원은 아침에는 체조음악을, 점심에는 가요음악을 틀어주는데 MZ라는 이유로 음악선곡은 내 담당이 되었다. 귀찮아서 8090 발라드를 검색한 다음 목록도 살펴보지 않고 재생시켰는데 오늘따라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싶어 멈춰서 듣다가 흘러나오는 노래에 나는 그 자리에서 잊고 있었던 추억 하나를 꺼내어 펼쳤다.


추억은 의식적으로 눈에 새기거나 기록물로 남겨두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당시에 들었던 음악이 함께 남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태연의 제주도 푸른 밤, 어느 페스티벌에서 들었던 박혜원(흰)의 오늘도 응원할게, 어느 밤 드라이브를 하며 들었던 빈지노의 목요일 밤-이 내게 그렇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는 조금 더 특별한 추억이 담겨있다. 그때의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 내성적이고 소심했다. 남에게 자기소개하는 것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던 아이였는데 그 성격을 고치고자 친구의 권유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갔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에서 내 역할은 존재 3이었다. 1도 아니고 2도 아닌 3. 단독 대사 없이 합을 맞춰 말을 하거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들 뿐이었는데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던지.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갈등을 그린 청소년 극으로 극작가님이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꽂혀서 만드셨다고 했다. 그래서 극의 엔딩에는 존재 1,2,3이 해당 노래의 후렴을 부르며 막이 내린다.


이 노래만 들으면 무대에 첫 발을 내디뎠던 순간순간, 눈이 부시던 조명, 무대에 오르기까지 연습했던 과정들이 떠오른다. 그때의 사진과 영상은 남아있는 게 없지만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나는 다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다. 흰색 소복을 입고 양갈래 머리를 하며 사탕 모형을 들고 있던 존재 3.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감이었지만,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 때 나는 분명 존재했다.


기억은 휘발되기 마련이지만 오감으로 느끼려고 발악한 추억은 살아남는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에 추억이 담긴 노래들을 일부러 찾아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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