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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다정한 거리

그 옆에 서기만 하면 나도 빛날 줄 알았다.

by 서이안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한다. '만약 내 얼굴이 저렇게 생겼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에게 그 상상의 주인공은 ‘임은호(가명)’ 형이었다. 키가 크고, 눈빛이 살아 있었으며, 여자들이 먼저 말을 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늘 중심에 있었고, 스스로가 빛이라고 믿는 듯 당당했다. 나는 그 빛을 동경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기만 하면, 나도 조금은 빛나 보일 거라 믿었다.


그 형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형제 결연’ 행사였다. 1학년 3반 30번인 내가 2학년 3반 30번인 은호형과 짝이 되었다. 형은 덩치 큰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와, 오늘 점심은 얘한테 다 뺏기겠는데?”

농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음 속에 서서, 선망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날 이후, 형은 나에게 ‘될 수 없는 부러운 존재’의 상징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그 형을 다시 만났다. 그토록 선망하던 사람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 어깨가 펴졌고,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형은 나를 친구가 아닌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새벽에도 전화를 걸어 불러냈고, 밥을 먹을 땐 늘 “너 먼저 내. 나중에 보낼게”라며 계산을 미뤘다. 돈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형의 곁을 지켰다. 형의 인정 한 마디면, 그 모든 피로가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그때, 그게 ‘존경’이 아니라, ‘의존’이었다는 걸 몰랐다.


형은 사람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공모전을 함께 하자더니, “네가 영상 잘하잖아”라는 말로 모든 실무를 나에게 맡겼다. 어느 날은 “자취방에서 자고 가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정작 형은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가버렸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라는 낯선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음날 형이 웃으며 사과하자, 또 아무렇지 않게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지금 돌아보면, 괜찮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희생의 정점은 형의 본가 이삿날이었다. 형은 가족 이사를 돕는 데 나를 불렀다. 좋은 마음으로 도왔다. 하루 종일 악착같이 일했다. 땀으로 온몸이 젖었고, 짐을 나르다 안경까지 깨졌다. 세상을 보던 창이 부서졌지만, 나는 여전히 관계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그날 저녁, 형의 부모님께서 고맙다며 저녁을 사주셨다. 하지만 정작 형은 나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내게 온갖 부탁을 했다. 형은 모든 숙소 예매자 연락처를 내 번호로 해두었고, 현지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국제전화로 해결해 달라고 했다. 심지어 수강신청까지 부탁했다. 그리고 웃으며 약속했다. “돌아올 때 기념품 꼭 사 올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물질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마음이 없으면 물질을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형은 단 한 번도 내게 밥 한 끼 사준 적이 없었다. 그의 약속들은 늘 가벼웠고, 나의 희생은 늘 당연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어떤 사건이 아니었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그날도 형은 나를 불러냈고, 나는 가족과의 저녁 식사 약속을 뒤로한 채 형의 부름에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는 나보다도 그 형을 더 챙기고 있었다. 나의 시간과 마음, 심지어 가족과의 약속까지 저버리면서, 나는 무엇을 얻으려 했던 걸까.

단칼에 인연을 끊어내는 대신, 나를 지키는 거리를 두는 법을 택했다. 모든 인연은 소중하다고 믿었기에, 그를 완전히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더 이상 내 마음을 내어주지 않기로, 그의 부탁에 웃으며 응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멀어졌다.


‘다정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나의 오랜 믿음은 틀렸던 걸까? 아니다. 그 믿음은 여전히 내 삶의 뿌리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진짜 다정함은 나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 마음에서, 나에게 먼저 다정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랫동안 나는 타인의 인정 속에서 자존감을 찾으려 했다. 그 빛나는 사람 옆에 서면, 나도 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나를 방치하는 이기심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전에, 나에게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다정함이란 멀어질 줄 아는 용기 속에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의 평온이 나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지금도 그 형과 일 년에 한두 번쯤 안부를 묻는다.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인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내 모든 것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나를 위한 가장 다정한 거리를 지키며, 오늘도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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