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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한 Sep 18. 2023

'잘' 받는다는 것

유난히 더 감사한 달, 8월

분명 지금까지 내가 타인에게 준 것보다 타인에게 내가 받은 것이 더 많을 텐데 왜인지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어렵다. 많이 한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렇다고 ‘잘’ 주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사실 그것도 자신 있게 그렇다 대답할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들의 생일 때마다 선물 고르는 일에 고역을 치르니까. 여하튼 나는 ‘잘’ 주고받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럼 무조건 많이 주고받기보다는 ‘잘’ 주고받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은 내가 태어난 달. 받는 것을 집중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감사한 달이다. 축하하는 말들과 선물, 나에게 전달되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반응하고, 감사하고자 한다.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전히 왠지 남사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노력한다.

선물. 요즘은 인터넷에서 상품을 골라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거나 메신저를 통해 상대에게 곧바로 선물을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이 생긴 이후로 생일날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가 이전보다 늘었다. 일 년에 두 번 연락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아직까지는 애매하고 부담스럽기보다 생일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일이 되면 메신저의 ‘생일인 친구 목록’에 뜬다. 생일 다음날까지 생일이었음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는 ‘선물하기’ 버튼이 있다. ‘선물하기’ 버튼을 누르면 상점으로 들어가게 되고, 친구가 추가해 놓았을 경우 ‘친구의 위시리스트’가 가장 상단에 뜨고, 아닌 경우 선물 추천 목록들이 금액별로 뜬다.

나는 ‘위시리스트’ 기능을 이전까지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기능이 생기고,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 딱히 필요 없는 선물들도 많이 받게 되었다. 선물을 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일 년이 지나 이듬해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 아직 전년도 선물을 뜯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새로운 물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택배 상자를 뜯고, 접어서 버리는 것의 귀찮음이 더 큰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마움과는 독립적인 일이다. 볼 때마다 고마움과 죄책감이 버무려진 감정을 느낀다. 그럼에도 상자를 그대로 두는 것은 귀찮음과 그 상자를 열어 그 물건을 보았을 때도 잘 쓰지 않을 나를 너무 잘 알아서라고 변명하고 싶다.

뜯지 않은 상자가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올해는 정말 ‘잘’ 받고 싶었다. ‘잘’ 받으려면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내가 필요한 물건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고민.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것이다. 생일 몇 주전부터 필요한 것 생각해 놓으라는 친구들의 말에 간간히 고민을 했지만 도저히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빠른 시일 내에 지금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한 현재, 짐을 어떻게 하면 더 줄일지 고민을 하는 중이라 더욱이 쓸데없는, 내가 가지고 싶지 않은 물건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필요 없다는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웃기게도 남에게 선물을 선물할 때만큼(혹은 보다)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을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 끝에 책이라는 답을 내렸다. 내가 지금 가지고 싶으면서도(읽고 싶은 책과 소장하고 싶은 책 목록들을 최근 정리해 놓았다), 평생 가지고 있어도 좋을 물건이자 꼭 이용하지 않고 바라만 보아도 일단은 마음이 편한 물건. 책. 생일 일주일 전, 위시리스트에 20여 권이 넘는 책을 추가했다. 위시리스트 기능을 지금까지 이용해 보지 않은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간지러웠고, 어색했다. 선물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고르게 되는 배려와 정성의 산물이라 여겨왔기에 이러한 과정들을 매우 축약시키는 이 기능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 년에 서로의 생일 때 딱 두 번 연락하는 친구의 최근 취향을 알기 힘들어 이 기능을 적극 활용하는 나를 마주했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생일날, 반가운 연락들이 많이 왔다. 책만 들어있는 나의 위시리스트에 대해 많은 친구들이 한 마디씩 하며 다양한 반응들을 보였다. 이러한 반응을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웃겼다. 멋있다는 친구, 역시 이상하다는 친구,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게 맞냐는 친구, 위시리스트와 상관없이 자기가 주고 싶은 선물을 주는 친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부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까지 다양한 책들을 나의 위시리스트에 넣어두었다. 위시리스트에서 한 권씩 한 권씩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웠지만 사람들마다 좁은 선택지 중에서도 자신의 취향과 맞는 책을 골라 주는 것이 느껴졌을 때 참 즐거웠다. 책을 자주 읽는 친구들은 자기가 좋아하던 책을 추천해 주어 고마웠고, 위시리스트에 없는-책이 아닌- 선물을 주는 친구들은 또 자기대로 나를 위한 선물을 생각하고 골라 주는 것이 고마웠다. 위시리스트에 있는 책을 주는 친구들은 내가 원하던 선물이라 좋았고, 아닌 경우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한번 더 생각해서 준 것 같아 좋았다.

나처럼 자기도 읽고 싶은 책을 위시리스트에 넣은 친구도 있었고, 서로가 좋아하는 책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친구들도 있었다. 자신이 선물해 준 책을 다 읽고 꼭 후기를 남겨달라는 친구도 있었고, 좋으면 자신에게도 추천해 달라는 친구도 있었다. 책을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 선물 받은 덕분에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과도 책을 매개로 한마디 더 하게 되고, 다음에 연락할 때도 지난번에 네가 선물해 준 그 책이라는 화두로 또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름 자신의 취향과 감성을 담아 선물한 친구들 덕분에 각각의 책들을 볼 때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한 권 한 권 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 책을 선물해 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짧은 글이라도 하나 남겨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이번 생일 때 받은 선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잘 쓸 것 같다. 한 달여 동안 '잘' 받았으니 이제 다시 '잘' 주는 것을 연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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