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림에는 제목이 없다.
인생에 제목을 달 수 있을까? 만약 달 수 있다면 인생의 제목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내가 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지켜본 타인의 시선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가끔은 제목이, 타이틀이라는 것이 그 대상의 본질을 정말 잘 표현하는지 의심이 든다. 본래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불리는 타이틀에 의해 삶의 모양이 규정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닌지 문득 어머니의 제목 없는 그림들을 보다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그림에는 제목이 없다.
아들인 내가 감히 제목을 붙여본다면 '희생', '사랑', '강인함', '감사', '기쁨'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푸르른 나무 그림에서는 생의 강인함이 느껴지고, 활짝 웃는 소녀의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기쁨이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들을 통해 어머니의 삶을 한 단어로 박제하기에는 그 삶의 스펙트럼이 너무도 넓고 깊다. 기쁨의 환희와 슬픔의 골짜기가 너무도 가깝고도 아득히 멀다. 그 역동적이고 다양했던 세월을 어떤 이름으로 한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도화지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어머니도 결국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하셨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생활은 늘 '기-승-전-가족'이었다. 무뚝뚝한 남편과 경제적으로 고단했던 살림의 한가운데에서, 당신 인생의 제목을 고민할 여유란 사치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되는 현실의 굴레 안에서 어머니는 그저 바삐 하루를 보내셨다.
우리는 흔히 매일 산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인생에 비유한다. 누군가는 그 반복되는 형벌 속에서도 시지프스가 행복했을 거라 말하고, 누군가는 그저 무의미한 고통이라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신화 속 시지프스는 바위가 산 아래로 다시 굴러 떨어지는 그 짧은 하강의 시간만큼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마의 땀을 닦아낼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곁에서 본 어머니의 삶은 조금 달랐다. 어머니는 바위를 밀어 올리다 잠시 쉴 때조차 그 무거운 바위를 온몸으로 받치고 쉬어야 하는 분이었다. 자식이라는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질까 봐 단 한순간도 손을 떼지 못했던 삶. 그 무게를 문학적으로 고찰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나는 감히 어머니의 그림에 제목을 달기가 두렵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림 속 소녀의 입을 빌려 내게 말씀하신다. "늘 감사해라, 그리고 행복해라."
커피 한 잔의 온기 속에서,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사이에서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행복하라고 하신다. 내가 매일 밀어 올리는 무거운 바위가 곧 내 삶이며, 비록 정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바위를 받치고 서 있는 고단한 쉼표조차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들과 이토록 다양한 삶의 문양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지금 이 찰나들이 모여 결국 내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그림에 제목이 없다는 것, 그 '무제(無題)'는 무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단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삶의 무게이자, 차마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다. 수식어로 가둘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요즘의 나는 내 인생의 제목을 너무 미리 정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제목은 짓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매 순간에 성실하고 다가오는 삶에 진실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등 뒤로 서서히 채워지는 뒷모습 같은 것. 그렇게 인생의 제목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하루를 채워가는 과정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그림에는 제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