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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pr 13. 2023

조정래의 "아리랑"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읽고 . . .


먼저, 재작년에 타계하신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쓴 서평을 옮겨 적고자 한다.

“ 우리가 지난 역사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이제 조정래의 ‘아리랑’은 광범위한 역사적 자료를 놀라운 문학정신으로 응축, 수난과 굴욕의 현대사를 투쟁과 승리의 대서사시로 펼쳐 보였으며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살아 있는 민족 언어의 활달한 구사와 함께 패배와 좌절을 민족주의 정신으로 승화시켰으니 통일로 가는 분명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더불어 조정래 작가는 자신이 동 소설을 쓰는 동기와 의도를 아래와 같이 분명히 했으며, 결코 과장됨이 없이 사료에 근거해서 한반도는 물론 만주, 연해주, 중국, 그리고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 내에서의 일제와 싸운 생생한 독립전사(獨立戰史)를 담아내고 있다.

“ 독일은 수상 빌리 브란트가 전 세계를 향해서 사죄를 했고, 유대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사죄를 받아들여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에 도달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독일과 정반대로 교과서를 왜곡하고,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계속 망언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일식의 용서를 빌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 동의에 충실하고자 나는 '아리랑'을 쓰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슬픈 과거를 떠올리기를 싫어하고 될 수 있으면 회피하며 눈에 보이는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본능이라 생각한다. 나도 동 소설을 읽으면서 절절한 얘기들에 가슴이 먹먹하고 이런 사연들을 뼛속 깊이 담아야 될까 회의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2만 장 원고지에 글로써 써내려간 작가의 심정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완독을 스스로 독려하곤 했다. 굳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씀을 떠올릴 것도 없이 . . .


동 아리랑은 장장 12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무대도 독립 투쟁이 벌어진 전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시대적 배경은 박경리의 “토지”와 비슷한데, 소설의 성격이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 소설을 놓고 작품 비교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기도 한다.

앞으로 광복절이 정확히 일주일 남았다. 아리랑에 대한 독후감을 광복절을 기해서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은 핵심어를 중심으로 나누어 쓰고자 한다.


1.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석과 그 폐해

2. 만주로의 도피 그리고 이주민들

3. 하와이로의 인신매매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4. 관동군과 중일전쟁

5. 송수익과 신세호의 우정- 오줌대감

6. 독립운동의 주체세력(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중국 공산당과의 연합전선 항일연군, 김일성,

   -스탈린의 배신

7. 친일파의 정의

8. 가깝고도 먼 나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의 토지와 자원 등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회사로서, 주로 곡창 지대인 전라남북도, 황해도, 충청남도에 있는 토지를 집중적으로 사들여 1920년 말에는 전체 경작지의 1/3에 해당하는 9만7천여 정보를 소유하게 됨과 동시에 산림 지를 가로채어 1942년 임야 16만 정보를 소유하게 된다.

총독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다양한 수법으로 토지를 약탈해 가는데, 대표적인 방법으로서는, 현금이 필요한 농민들에게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자식들 학비, 가족들 병 치료비 등으로 쓰면서 동시에 소작을 부쳐 먹으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것’이 아니냐고 꼬드겨 토지를 매수해간다. 그러나 매매에 비협조적이거나 훼방을 놓는 자가 있으면 경찰을 동원하여 겁박을 하거나 매타작을 행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에는 별 다른 문서 없이 자자손손 자작농을 해오던 농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조상 때부터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토지를 경작해왔으며, 이를 알고 동척은 정식 토지 문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토지에 문서가 있을 리가 없고 이로 인한 분쟁으로 경찰에 물리적으로 시위하는 농민은 체포하여 반병신이 될 지경으로 곤장 세례를 퍼붓는다. 곤장을 심하게 맞은 어떤 경우는 성불구자가 되어 젊은 나이에 땅도 잃고 성기능도 상실하는 어처구니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상황에서 격렬히 저항하다가 경찰에 상해라도 입히는 경우, 일벌백계의 표본으로 공개 처형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더욱 악랄한 것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농민들에게 한자로 된 토지 신고서를 발부하여 정해진 기한 내에 작성 제출하도록 한다. 종잇조각 하나에 지나지 않는 신고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서류 작성의 방법도 몰라서 눈 뜬 채로 토지를 빼앗기고, 결국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신의 땅에서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 같은 비열한 방법으로 경작지를 소유하게 된 동척은 일본으로부터 농업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들에게 헐값으로 토지를 불하하게 된다.

한편, 소작료 또한 6:4에서 7:3, 8;2까지 올려 받음으로써 기껏 농사를 지어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소출이 좋지 않을 때에는 장리(이잣돈)를 쓰지 않을 수가 없어 죽지 못해 사는 서글픈 인생을 한탄하며 지내게 된다.

즉, 자신의 땅을 동척에 빼앗기고, 그 땅을 일본 농업이민자가 불하받아서 일본 소유주 밑에서 소작을 빌어 부쳐 먹는 어이없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데, 울화통이 치밀어 항거하는 날에는 당연히 투옥되거나 곤장 세례로 약값만 축나는 꼴이 되고 만다.

작품 속에 나오는 일본인 하시모토의 말이 떠오른다.

“누가 나라를 뺏기라고 했나?”


이처럼 삶의 터전을 몽땅 잃어버린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군산이나 인천, 목포 같은 일본인들이 쌀과 자원의 방출을 위해 확충한 도시로 무작정 떠나게 되거나, 도시 생활도 여의치 않을 경우 만주를 향하여 정처 없는 발길을 돌리게 된다.  

이 같은 일제의 수탈과 병행하여 한반도 내에서 일어나는 의병과 독립 운동은 규모와 횟수가 더해지고, 그에 따라 일제는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 강점기,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이라 통칭하는 반대 세력들을 색출하는데 가일층 기를 쓰고 경찰과 헌병의 조직망을 촘촘히 해 나간다. 독립군과의 연관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가차 없이 처벌하는 통에 국내 독립투사들도 하나씩 만주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국내 독립 운동의 전개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큰 물결은 동학 혁명 때의 혁명군이 을사늑약 이후 의병으로 발전했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독립군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지금 현 시점에서 보면 개탄스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작품에 나오는 대목은 이렇다.

“ 전세가 불리한 상태에서 며칠을 싸웠지만 약속된 안승우의 원병은 오지 않았다. 김백선은 많은 부하들을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한 그는 약속을 어긴 안승우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런데 총대장 유인석은 오히려 김백선을 처형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평민이 감히 양반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 유인석의 의병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김백선의 죽음으로 평민이 절대 다수인 의병 대중의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탓이었다. 결국 유인석은 의병을 해산하는 궁지에 몰렸고, 소수만을 이끌고 중국 요동 지방으로 이주하는 운명에 처했다.


원수부 13도 총대장이 된 이인영은 군사장을 비롯하여 각 지방별로 일곱 명의 의병장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 대장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유생 일색이었다.

그 결과를 보고 송수익은 또 앞이 가로막히는 벽을 느꼈다. 그들이 과연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 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지체 높은 양반 유생들끼리 감투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성을 공격해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려는 군대라면 마땅히 대장도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부대를 지휘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분명 있는데도 그들은 또 지체를 앞세워 능력을 묵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


상기의 송수익은 동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인물이다. 양반 집안이지만 아래 사람에게 함부로 하대하지 않고, 일본을 극도로 증오하지만 단발령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이다. 김제와 전주 전라북도 의병 활동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역할을 하다가 조선 영토에서 조여 오는 수사망을 피해 만주 통화로 망명을 결행한다. 그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하고, 그를 따르는 지삼출, 천수동, 필녀 등과 만주에서 신분을 감춰가며 끊임없이 독립 운동을 지휘해 나간다.

이 중에서 지삼출은 머슴 출신으로 송수익을 그림자처럼 보필하고 김제 고향 사람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데, 그가 동학농민군에서 의병으로 그리고 독립군으로 피신하느라 가정을 등한시하며 다니는 점에 있어서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애비가 못된 짓 허고 댕긴 것 아닝게 원망언 말어. 니도 사내꼭진게 알아둬야 헐 일이여...” 아! 전라도 사투리가 이처럼 진정성 있게 가슴 울리는 적이 있었던가?


송수익은 모친의 장례는 물론이고 자식들에 대한 양육도 모두 포기하고 독립을 위한 희생으로 한 몸을 오롯이 바친 인물이다. 일본 형사와 그의 전담반은 그의 집안은 당연하고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 관계인 신세호에 대해서도 호시탐탐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송수익은 결혼 20년이 되는 날 처음으로 아내에게 절절한 안부 편지를 전한다. 만주로 망명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독립투사를 남편을 둔 죄로 홀로 가계를 꾸려가며 자식들의 교육과 혼사 등을 홀로 치르는 고생을 감수한다. 송수익의 서신을 장롱 깊이 간직하는 것으로 그의 온기를 간직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이 후에 발각이 되어 자신은 물론 아들 송중원과 사돈 신세호 모두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에 시달리게 된다.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죽을 때까지 병치레를 면하지 못하며 아들 송중원은 폐병을 얻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하게 독립 운동을 지휘하던 송수익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새벽 만주 계곡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비통한 심정으로 목 놓아 운다.

송수익은 신분을 위장해가며 동서로 활동하던 와중에 결국 밀정의 신고로 관동군에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둘째 아들 송가원은 아버지의 옥중 수발을 들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그와 10여년 만에 재회를 한다. 그리고 모진 고문에 옥사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주 벌판에 그의 골분을 뿌리고 독립투사의 길로 나서길 결심한다.

송가원은 아버지 송수익과의 상봉 이전에 형 송중원과 논의하여, 일본의 간섭이 심한 법과 공부보다는 경성제대에 신설된 의예과에 지망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송수익의 유지를 받들어 독립투사를 후방에서 치료 지원하는 군의관이 되기로 한다.

후에 송가원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찾아 만주로 건너온 옥녀(옥비)는 소리 명창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송가원의 반려자이자 간호사로서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자 한다.

송수익의 조촐한 장례와 골분을 뿌리는 자리에서 옥녀는 진혼곡을 애절하게 부르며 눈물로써 그의 영혼을 위로한다(*소리 내용이 길지만 심금을 울리는 것이라 그대로 옮겨 적고자 한다).


왜 왔던고 왜 왔던고 만주 벌판에 왜 왔던고

낯설고 물설은 만리타국 만주땅에 어인 일로 왔던고

삼천리라 금수강산 왜놈 발에 짓밟혀서

조선 해는 간곳없이 암흑천지 되었으니

뜻 굳은 남아로서 할 일이 무언고

빼앗긴 날 되찾는 것 그것밖에 더 있는가

암흑천지에 불밝힐 일 그것밖에 더 있는가

옳소이다 옳소이다

그 생각이 옳소이다

그 길을 아니 가면 어찌 조선 남아리까, 어찌 조선 남아리까

그러허나 예로부터 옳은 길은 가시밭길

처자식도 생이별에

둘도 아닌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는 길

그 길을 택한 남아 몇몇이나 되었던가

하나뿐인 목숨을 초로같이 여기고서

의기 푸른 조선남아들 만주땅에 진을 치니

장하도다 장하도다

하늘이 칭송한다

설한풍 몰아치는 허허벌판 만주땅에

풍찬노숙 뼈깎으며 왜놈들과 싸우기 그 몇몇 해이던고

1년이 10년 되고 10년이 20년 되어

고향땅이 그리워라 처자식이 목메어라

그래도 굽히지 않은 뜻 일편단심 구국이라

나라 찾아 깃발 날려 금의환향하렸더니

에고오 어인 일로 갇힌 몸 되었던고

에고오 어찌타 옥사가 웬말인고

어화 원통해라

이이고 절통해라

이대로는 못가겠다 이대로는 못가겠다

원통하고 절통해서 이대로는 못가겠다


혼백으로도 끝끝내 싸워 이길 터이니 나를 만주땅에 뿌리거라

고결하신 그 뜻에 산천초목이 떨고

휘영청 밝은 저 달도 낙루하는데

어쩌타 뒤따르는 자들이 그 뜻을 모르오리까

무릎꿇고 머리 조아려 하늘에 맹세하오니

다 못 이루신 뜻 정녕코 이루오리다

남기고 가신 한 기필코 이루오리다

굳게굳게 맹세하고 뒤따르오니

어화 님이시여, 님이시여

원통함을 푸시고

절통함도 푸시고

이 거친 만주벌판 떠돌지 마시고

춥고 어두운 구만리장천을 떠돌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시는 얼굴로

백화난만한 얼굴로

상춘화창한 극락으로

왕생하오시라

극락왕생하오시라

비옵나니 비옵나니

극락왕생하오시라


송수익과 그 일가의 생애만큼 가슴 저린 사연을 안고 있는 집안이 방씨네(감골댁)이다.

방씨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얻은 부상으로 내내 병치레를 하였고, 치료비로 인하여 큰돈을 빚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큰 아들 방영근은 일본 대륙식민회사에서 모집하는 하와이 파견 인력에 지원하여 20원을 받기로 하고, 뱃길에 오른다.

어머니 감골댁은 치료비 18원을 김 참봉으로부터 빌려 썼는데, 중늙은이인 김참봉은 빚 대신 맏딸 방보름을 후처로 삼고자 사람을 내어 쉴 새 없이 닦달을 하고 있었다.

이에 방영근은 인력 송출에 지원하여 빚도 갚고, 남은 돈 2원으로 보름이를 서둘러 시집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방영근이 떠나간 후, 감골댁은 대륙식민회사를 찾아가 20원을 요구했으나, 일제 앞잡이 장칠문은 20원을 김 참봉에게 모두 주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즉 2원의 돈을 떼어 먹고자 했던 것이다.

군산까지 50리 길을 지친 몸을 이끌고 다니기를 수 차례, 마을 머슴이던 지삼출은 주인의 허락을 하에 감골댁의 일을 마치 제 일인 양 따라 나서서, 장칠문을 우격다짐으로 압박한다.

결국 장칠문의 간교였음을 알게 되자. 지삼출은 성질을 못 참고 장칠문의 얼굴을 받아 버린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감금이 된다.

영창 안에서 그는 감옥 생활 대신 철도 공사 작업을 선택하게 되고 노예보다 못한 부역 생활을 2년 동안 하고선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고 지삼출은 송수익을 따라 만주로 이동하여 그의 분신처럼 활동을 하게 된다.

감골댁은 빚 18원을 김참봉에게 갚고, 남은 돈 2원은 장칠문에게 떼여서 돈 한 푼 챙기지 못한 채로, 의지하던 지삼출 마저 부역 공사에 끌려가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하와이에 도착한 방영근은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루나라고 하는 백인 십장의 착취와 중노동을 견디어 가며 항상 귀향과 조국 독립의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작가 조정래는 방영근을 비롯한 하와이 이주민들의 고달픈 생활상과 독립운동 모금 활동, 군사 훈련을 통한 대일 항쟁 준비 등을 세세히 묘사하였으며, 특히 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독립 자금을 회비 마냥 적립해 나간 것으로 적고 있다.

아주 우연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2022.08.12.일자) KBS 뉴스에서 “버려진 하와이 이민자 묘비 추적했더니 ‘안중근 지원군’”이라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왔는데 한 달에 17달러를 벌어 10달러씩 기금을 한 사실들이 고스란히 밝혀지고 있다.

그들의 독립을 위한 희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와이 이민자에 관한 얘기는 끝이 없지만, 작가가 분명히 밝히고자 한 정치적 인물에 대한 context를 짚고 가야만 할 것 같다.

바로 박용만과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애증 관계 그 자체인데, 1904년경 한성 감옥에 함께 투옥된 두 사람은 소위 감방 동기로서 의형제를 맺는 등 절친한 관계였다.

박용만은 작은 아버지를 따라 도미를 했고 그 때 유일한씨(후에 유한양행 창업자)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헤이스팅스 대학 소년병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을 위한 무관 양성에 힘쓴다. 그리고 하와이로 와서 교민회 활동과 독립 운동을 위한 군사 훈련 등을 진두지휘한다.

이승만은 그가 발 길 닿는 곳마다 돈과 관련되어 문제를 불러일으키는데, 이승만은 박용만의 초대로 하와이로 와서 교민들이 회관 건립을 위하여 적립한 기금을 자신이 운용하고자 한다.

후에 생긴 일이지만,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도 각료들이 이승만을 탄핵한 주요 사유 중에 하나가 정부 자금 집행에 있어 불투명한 건의 용처를 밝히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고 경고하였음에도 이승만이 묵살하였음을 들고 있다.

그 이전에 1908년 샌프란시스코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장인환과 정명운에 의하여 일어났는데, 이는 안중근의 히로부미 암살의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스티븐스 암살 사건을 주목하면, 일본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뒷돈을 받은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당연시하며 조선인의 미개함을 그 이유로 들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를 조선 외교 고문으로 추천한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미국 교민 장인환과 정명운이 샌프란시스코 페리항에서 그를 사살한 사건인데, 그 둘은 사전에 미리 공모한 바가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심금을 더욱 울리고 있다. 동 사건이 일어나자 교민들이 변호사 비용과 통역 비를 대고자 모금을 하였고, 통역으로 지목된 자가 바로 유학생 이승만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하자마자 교민들이 준비한 숙소를 물리치고, 고급 호텔에 짐을 풀어 원성을 사기도 했고, 재판 기일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논문 준비를 해야 한다며 홀연히 떠나 버렸다고 한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서, 이승만은 박용만에게 모금액의 집행 권한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했고, 이를 거부하는 박용만과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 이주민들에게 별도의 모금 활동을 전개하여 좁은 교민 사회가 둘로 쪼개지게 되었다. 이 둘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일은 이승만이 교민회장 격인 김종학을 공금 횡령으로 미국 법원에 고발한 사건이다. 이는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건너간 일이었다. 김종학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평판은 이미 땅에 떨어졌고, 이에 김종학은 권총으로 자살을 하게 된다.

요즘도 항간에는 전라도 사람을 하와이로 칭하는 속어를 접하기도 하는데, 이 말의 유래는 이승만이 귀국 후 전라도 지역에서 인기가 좋지 않자 “저것들 하와이구먼”이라고 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라 한다(조정래의 소설 한강).

이승만의 공과는 별도의 지면을 통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하와이 이주민과 멕시코의 에네켄(henequen)과의 관계 등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방영근과 이주민들은 몇 년 만 고생해서 돈을 모아 귀향하겠다는 꿈을 간직하지만, 일제가 중일전쟁으로 팽창하는 소식, 독립 운동 세력의 분열 과정 등을 보면서 자괴감과 함께 침통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자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였고 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한 자신의 아이들 6명을 선발하여 아내들의 절규와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기꺼이 중경으로 옮긴 임시정부에 파견한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아아라아리이요오오....

누군가가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금새 합창으로 변했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 그 서럽고 사무치고 구성진 가락은 잔잔한 파도 소리에 실리며 뱃전을 감싸고돌았다. 아리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배가 떠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그 노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식민지민족의 망향가고 이별가고 탄식가고 환희가며 애국가가 되어 있었다. “


한편, 방씨네의 두 딸은 모두 미모가 아주 출중하게 태어났다.

동생 수국은 절세미인이었고, 언니 보름이도 수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누가 봐도 한 누에 반하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전언한 바와 같이 김참봉의 돈을 빌려 쓴 감골댁은 보름이를 차마 그의 후처로 보낼 수 없어 부랴부랴 다른 혼처를 구해 시집을 보낸다. 보름의 시댁 또한 의병 출신 집안인데, 그의 남편은 농사일을 하면서 독립군을 지원하고 연락책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름이 아들 삼봉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남편의 행적이 순사들에게 적발되어 그는 당산나무 아래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다.

홀로 남은 보름은 삼봉이를 안고 군산으로 먼저 가 살고 있는 손판석에게 의탁코자 시댁 마을을 떠난다.   

보름은 삼봉이를 키우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정미소에 간신히 자리를 구한다. 정미소에서 쌀을 치마 속 작은 주머니에 감춰서 조금씩 빼내어 삼봉이와 끼니를 잇던 보름이는 순사 자리를 꿰차고 있던 장칠문에게 적발당하고 그의 겁박과 간계를 빠져 나갈 수 없어 결국 그의 여인이 되어 버린다.

장칠문은 그의 상관인 경찰 계장 세키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느 날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만찬을 가진다.

세키야는 보름의 미모에 혹해서 장칠문의 앞길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보름이를 요구한다. 조선인 신분의 순사인 장칠문은 고민 끝에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게 되고,

보름이의 생은 다시 한 번 다른 남자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장칠문 이전에 군산에서 조선인 깡패 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서무룡이 보름의 환심을 사고자 무진장 노력했으나 순사의 자리에 있는 장칠문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장칠문 역시 일본인 상관 앞에서 무슨 별다른 수가 있었겠는가?

보름은 세키야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하나 더 가지게 되었고, 남편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편안하지만 웃음기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3.1 만세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녀 또한 만세를 목 놓아 부르고 집에 돌아 왔는데 일본 순사에 쫓긴 조선 학생이 담을 넘어 들어 왔다. 보름이는 그들을 허겁지겁 숨겨 주었으나 일본 순사들에게 바로 발각이 되어 개머리판에 머리가 터지고 구속이 되고 만다.

경찰 고위 간부인 세키야는 난처한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보름이를 출옥시키고 그의 자식과 함께 내쫓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보름은 고향 어른인 손판석에서 다시 의지하며 지내다가 오래 전부터 그녀를 흠모해온 서무룡의 보살핌을 받고 서무룡이 밑돈을 대주어 떡장사를 하며 지낸다. 그러면서 서무룡과 잠자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와 사이에서 또 다른 아이를 배출하게 된다.

결국 보름이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씨가 각기 다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큰 아들 오삼봉은 세키야와 살 때에도 눈칫밥을 먹으면서 항시 어머니를 위하는 철이 일찍 든 아이였다. 보름은 오삼봉이 중학생이 되는 해에 그와 함께 시댁이 있던 곳으로 먼 여행을 가게 된다.

삼봉이로 하여금 시아버지와 남편의 묘소를 참배하게 하고, 주위 산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시아버지가 왜 너의 이름을 삼봉이라 지었는지, 그 정기를 받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색을 하고 일러준다.

후에 오삼봉은 학교 동료들을 규합하여 열혈단이라는 소규모 비밀 단체를 결성하여 군산 내 악질 일본인이나 혐오스런 친일파들은 하나씩 응징하게 된다. 그리고 꼬리가 잡힐 즈음에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간다.


방보름의 동생 수국은 언니가 시집을 간 후 어머니 감골댁과 함께 생계를 유지하고자 군산에 있는 손판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미선소(정미소에서 나온 쌀을 다시 정갈하게 고르는 작업소)에 다니며 근근이 살아간다. 당시 정비소나 미선소는 일본인 혹은 친일파들이 쌀을 일본으로 방출하기 전에 거치는 작업으로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이권 사업으로 보여 진다.

그러던 중, 미선소의 주인은 아전 출신이자 친일파 일진회 군산 지부장을 맡고 있는 백종두였으며 그의 아들 백남일은 일본 헌병 자리를 매직하여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고 기세도 등등하게 미선소를 관리하고 있었다.

백남일은 수국의 미모에 빠져 어떻게든 수국을 겁탈할 계략을 짠다. 그는 수국에게 어머니인 감골댁이 기다리고 있다며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여 욕을 보인다. 백남일은 수국에게 돈과 권세를 약속하며 달래 보지만, 수국은 뒷산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거의 반 실성 상태로 넋이 빠져 지내게 된다.

군산 항만에서 지삼출과 함께 노역을 하며 일하고 있던 동생 방대근은 이 사실을 알고, 지삼출과 함께 백남일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백남일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헌병 자리에서도 퇴출당하게 된다.

일본 헌병을 묵사발로 만든 죄는 누가 보아도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라, 지삼출과 감골댁은 수국을 달래어 단출하게 가재만 챙겨 송수익이 있는 만주 통화 지역으로 야반도주를 한다.

만주에서 화전민의 딸 필녀를 만난 수국은 사내처럼 털털한 필녀와의 우정으로 아픈 상처를 잊어가며 평상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장사꾼으로 위장한 양치성(일본에서 특수 교육까지 받은 밀정)의 눈에 들어 그로부터 끊임없이 구애를 받는다.

한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자 일본군은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독립군의 관계를 끊어 놓고자 양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데 이를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경신참변의 와중에서 신분을 속인 양치성은 수국을 빼내고자 선배 형사와 미리 짜고 사살 작전 감행 이전에 수국을 체포하여 취조실로 이송한다. 그리고 양치성은 수국에게 감골댁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수사에 협조하라며 송수익의 거처를 파악하고자 유도한다.

양치성과 짜고 수국을 취조하던 선배 형사는 수국의 미모에 반해 취조실에서 양치성 몰래 수국을 겁탈하고 난 후, 훈방 조치하며 양치성에게 돌려준다.

이로 인하여 수국은 양치성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 애정 없는 동거 생활을 영위한다. 양치성은 감골댁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거짓말로 수국과의 관계를 이어가지만, 이미 감골댁은 경신참변의 재물이 된 지 오래였다.

어느 날 마을 주민과 만난 수국은 그들을 통해서 양치성이 수시로 경찰 주재소를 출입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비로소 양치성이 장사꾼으로 위장한 밀정임을 간파한다. 수국은 맘을 단단히 먹고, 양치성이 오기만을 기다려 주안상을 마련하고 잠자리에서도 교태를 부리며 그가 곯아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준비한 식도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줄행랑을 친다.

다시 송수익과 합류한 수국은 이제 아리따운 처녀에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 여전사로 거듭나서 필녀와 함께 전선을 전전하는데, 송수익이 밀정의 신고로 체포되고 조직이 와해될 때 다시 한 번 관동군에 체포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선전수전을 겪은 수국은 자신의 장점인 미모를 바탕으로 교태와 함께 몸을 허락하는 등으로 감시병을 따돌려 탈출에 성공한다.

재차 독립군에 합류한 수국은 관동군이 중일전쟁을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 대토벌 작전을 감행할 때 필녀와 함께 포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다.

미인박명이라 하던가?

보름이와 수국은 결코 평탄하다할 수 없는 삶을 경험하게 된다.


방씨네의 막내 방대근은 형인 방영근이 집안 살림을 위하여 하와이로 떠나고, 누나 수국의 복수를 한 후, 만주로 건너 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을 한다.

대근은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타고난 신체와 순발력 있는 두뇌로 혁혁한 성과를 세워 나간다. 그리고 누나 보름이의 아들이자 조카인 오삼봉을 부하로 두고 상사로서 애정과 가르침을 주곤 한다.

그는 독립군의 활동이 변절자와 밀정에 의하여 번번이 좌절되는 어려움을 간파하여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기로 한다. 상해에서 특수 훈련을 마치고 비밀 활동을 한다. 그리고 관동군의 기세에 밀려 독립군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자, 중국공산당과 힘을 합친 항일연군에 합류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다.


송수익과 방씨네가 겪은 삶의 곡절이 바로 나라를 잃은 민초들의 생활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터를 세계무대로 확전시킨다.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이 20만~30만의 중국인을 무차별 사살한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사건으로서 1920년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경신참변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중일전쟁과 2차대전은 일본 군국주의가 불러온 허황된 야욕의 결과였으나, 전쟁에 동원되어 총알받이로 소모된 조선인, 자원 채굴로 강제 징용된 노무자들, 군수 물자의 품목 중 하나로 징집되다시피 한 위안부들은 고스란히 조선인들이 안아야 했던 고통이었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에 대하여 작가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들의 참혹한 생활상과 금수만도 못한 대우 등을 적나라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만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사를 통하여 구체적 조사가 없이는 써 내려갈 수 없는 내용들이다.

강제 징용 160만 명, 강제 징집 40만 명, 정신대 약 30만 명이 끌려 나갔고, 이들 중 부지기수가 사망 혹은 행방불명이 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나라를 잃은 비참함은 이 같은 직접적인 수탈과 착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연계한 독립군은 항일연군에서 용감히 싸웠고, 러시아에서 적백전쟁이 한창일 때 백군을 지원하는 일본에 대항코자 연해주에서는 스탈린의 적색 군대와 연합하여 일본군 징벌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스탈린은 조선 독립군의 용맹성과 그의 전과를 높이 치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스탈린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여 시베리아 지역 개발에 필요한 노무자로 활용했던 것이다. 토사구팽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나라 없는 서러움은 국제 사회에서도 길 잃은 미아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중일전쟁의 초반 기세를 자신의 군국주의가 성장일로에 들어선 것 마냥 언론과 각 기관들을 통하여 과대 선전을 한다.

만주의 정벌, 중국 본토의 진입 등을 지켜본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의 뻗어나는 기세에 휘둘려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많은 학자와 예술인들은 친일 세력으로 전환하게 되고, 독립 세력 내에서도 많은 변절자가 속속 생겨난다.

이 당시 조선 반도에 체류하던 일본인이 약 70만 명, 친일 앞잡이가 약 150만 명 정도 되었으며 이들이 2천만 명의 조선인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정도규와 같은 자산가이자 진보적 사고를 가진 지식인은 친일세력인 양 위장 전향을 하여 일제의 내부 동향을 파헤치며 보이지 않게 독립 운동을 지원하는 부류도 있었다. 마치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최서희와 같은 인물이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교신이다.

그는 민족종교론을 주창하였고 그의 지론은,

“공산당도 조선 공산당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다른 특이한 것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기독교도 조선 김치 냄새가 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김교신의 기독교 민족종교화 정신은 결국 조선의 독립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투철한 민족정신은 기독교의 주요 교파들이 신사참배라는 종교적 굴욕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끝끝내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김교신에 관해서는 함석헌이 작시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두 사람 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고

맘 놓고 갈 만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마지막으로 송수익과 신세호의 우정은 실로 눈물겹다.

두 사람은 양반이자 유생으로 출신 성분이 비슷한 가정에서 태어나 같이 수학한 죽마고우이다.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을 겪으며 단발령은 받아들인 진보적 지식인 송수익은 상대적으로 가산이 풍부한 신세호를 찾아가 서당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유생으로서 조국 독립에 힘쓸 것을 피력한다.

그러나 신세호는 유생 본연의 자세에서 군주가 있는데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지나친 행위라는 뜻을 밝힘으로써 두 사람은 서운한 감정으로 헤어지게 된다.

차후 송수익은 의병 과 무력 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신념에 따라 만주로 건너가고, 신세호는 일제의 강압이 예상 수위를 넘어서는 민족 말살의 저의가 분명히 있음을 간파하고 송수익의 뜻이 옳았음을 뒤늦게나마 깨닫는다.

신세호는 이때부터 송수익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의 숭고한 뜻에 따라 양가 집안을 사돈으로 맺고, 송수익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송중원에 대한 학비 등을 지원한다.

그리고 서당을 개설하여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행위 등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신채호의 역사서와 독립선언문을 며칠 밤을 새워 필사본을 만드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 운동을 전개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일제의 강점은 고착화되고, 송수익의 투옥과 옥사, 교향에도 돌아오지 못하는 시신. . . 이 모든 것이 신세호에게는 한으로 남아 그를 괴롭힌다.

늙어버린 육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옹졸하게 남은 재산 . ..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일본인의 가옥 앞에서, 깔깔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일본인 처자들 앞에서 수시로 오줌을 싸고 경찰 주재소에 끌려가서 훈방되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오줌 대감”이었다.

이것은 그의 뜻과 행동을 주민들이 숭고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악랄한 일본 대농장주인 하시모토가 김제 읍장에 취임하는 기념 행사장에서 그는 양반 의관을 정중히 갖춰 입고, 인두겁을 쓴 하시모토의 언행에 울부짖으며 오줌을 갈기고 온 몸으로 난장을 부린다.

그는 끝까지 상투를 고집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립 운동을 이어나간다. 이것이 바로 송수익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만의 위령제였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은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가 생각나는 내용이다.


여담이지만, 1990년 조정래 작가가 “태백산맥”출간 후, “아리랑”집필을 위한 취재차 중국 여행을 가려했으나 당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 내사 중이라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씨의 지시로 방중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학문과 예술, 종교의 자유가 지극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획일적 사상을 강요한다는 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조정래의 작품은 우리의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자 그의 천부적 재능이 표출된 실제적 존재물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풍족히 하고 올바른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가? 한 작가의 자유로운 사상이 그토록 위험하고 공권력을 이용해 금기시해야만 했던 것인지...

이것이 바로 촌스러웠던 우리의 과거사라고 생각된다.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우리 미래의 거울로 삼고자하는 일련의 노력이 과연 글로벌 시대를 맞아 과거에 얽매인 촌스런 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인지...

어느 것이 촌스러운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P.S

1. 좌익 세력의 독립운동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는 사상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과의 연대가 독립을 위한 길이었다. 구한말 무력한 왕조를 목도하고 제대로 된 서구 사상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지식인과 민초들은 자신의 생존과 미래에 필수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지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2. 이승만에 대한 해석에 있어 작가 조정래는 그의 독불장군식의 인간성과 방만한 자금 운용, 기회주의적 처신 등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소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확립, 건국 초기 국가 토대의 수립 등을 이유로 그를 칭송하기도 한다.

이에,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_ 끝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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