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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pr 13. 2023

료마가 간다(시바 료타로작)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읽고서. .


이 책은 약 30년 전 해외 체류 중일 때 현지 출장을 온 지동환이라는 친우가 한 질을 선물해서 읽었던 책이다.

당시 제목은 “제국의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다시금 읽다보니 몇 몇 대목이 상이해서 내용을 대조하려 검색도 하였으나 ‘제국의 아침’이라는 제목으로는 검색만 될 뿐 구할 길이 없고 달리 방도가 없어 씁쓸하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내용상 부분적으로 편집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두었던 것이 사카모토 료마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활약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0년경 에도 막부 시대를 개막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동 소설은 정확히 250년이 지난 1868년 메이지 유신 바로 직전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면 과연 250년 동안 에도 막부 시대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 하겠다.

소설 대망에 따르면 이에야스 평생의 소원은 전쟁 없는 일본 영토의 평화였다.

눈뜨면 나가 싸우는 것이 일과였고 “다다미위에서 죽는 것은 무사의 길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시절의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이 그의 평생 염원이었기에 이에야스는 일본 천하 통일을 이룬 후 각 영지를 300개로 구분하여 크고 작은 영주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각 영주는 정해진 군사 규모 이상 병력을 키울 수도 성을 증축할 수도 없게 하였으며 영지 간의 다툼이나 전쟁은 에도 막부에서 전적으로 담당하여 처리하고자 했다.

더불어 이에야스는 ‘슨푸의 너구리’라는 별명답게 영지 획정과 영주 선발에 있어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입장이나 성격의 인물을 교묘히 배치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의 안위를 최대한 꾀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는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치 시대였지만 그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가 서로 접경에 있어 두 사람 간 반목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공 때에는 물론 일본 내에서도 평생 앙숙으로 지냈던 점을 기억나게 한다.

게다가 도쿠가와 에도막부 시대에는 소위 참근교대( 参勤交代) 라고 해서 그 의미는 아래와 같다.

“ 참근교대(参勤交代)는 각 번의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에도를 오고 가게 함으로써 각 번에 재정적 부담을 가하고, 볼모를 잡아두기 위한 에도 막부의 제도이다. 이 제도에 따라 각 번은 도쿠가와가에 반기를 들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도쿠가와 가가 15대에 걸쳐 번영을 누리는 요인이 되었다. 산킨(参勤, 참근)은 일정 기간 주군(이 경우는 쇼군)의 슬하에 오고 가는 것, 코타이(交代, 교대)는 여가를 제공 받아 영지에 돌아가 행정 사무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 위키백과 ”.


즉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시대에는 막부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300개의 영주와 제후로 분리 독립되어 상호 견제 속에 놓여 진 상태였고 전반적인 사회구조는 사농공상에 따른 엄격한 신분 제도 하에서 세습 문벌주의가 고착화되어 있었다.

이 같은 신분 제도는 사무라이 내에서도 크게는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로 나뉘고 하급 무사 내에서도 칸칸이 나눠지는 단계적 신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드러난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 무사라 할지라도 하급 무사는 영주 등을 알현 대면할 수 기회가 봉쇄되어 있었고,

- 지적이거나 고급 기술을 요하는 직업도 하급 무사는 근접이 불가하였다.

- 번(蕃과) 번(藩)사이 이동은 엄격히 규제되었으며 자신의 번을 벗어나 타 번으로의    여행은 목적과 기간을 분명히 하여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으며,

- 여행 중에 숙박하는 여관이나 숙소도 신분에 따라 기거할 수 없는 장소 등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 가족에 대한 연좌제는 당연시 되었던 사회였다.


각 번(藩)은 분리 독립된 나라로서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영지, 즉 번(藩)을 자신의 국가라고 생각했을 뿐 일본이라는 것은 막연한 개념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 우국지사라는 인물들도 자신이 속한 번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에 머물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중반 산업 혁명 이후 서양의 문물이 밀려오고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등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천황이 있는 황실과 막부라고 하는 2중 지배 체제를 가진 상태에서 시대적 조류를 읽고 예측하여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정치력과 통제력을 막부는 점차로 잃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하급 무사 중에서도 향사라고 하는 낮은 계급의 사무라이 집안 출신으로서 다른 지사(志士)와 결을 달리 하여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부 수립과 국가적 발전 구상에 일생을 바친 비범한 혁명가이기에 일본 청년들에 있어 가장 위대한 일본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한 마디로 말하면 4차원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릴 때는 오줌싸개, 둔재에 가까운 학습 능력 등으로 덩치만 큰 보잘 것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오토메라는 누님만은 료마의 비범함을 간파하고 자신이 거의 키우다시피 했으며 전적인 신뢰와 사랑을 주었다고 한다. 실제 동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료마와 오토메 간에 일기마냥 수시로 주고받은 서신을 근거로 전체적인 맥락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언한 바와 같이 도쿠가와 막부는 세키가하라 전쟁을 기점으로 도쿠가와 가문에 의탁하는 인물들을 위주로 거의 모든 영주들을 선임하였기에 그들은 도쿠가와 가문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자손손 엄격한 신분 제도 아래 영주로서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즉 막부에 대항한다는 것은 상상 조차 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이에야스와 대결한 전쟁이며 이에야스의 승리로 도쿠가와 막부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


그러나, 숨 막히는 신분 사회에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젊은 지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주로 사무라이 중에서 하급 무사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사유로 탈번(번의 영역을 무단으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극형에 처하는 중대 범죄)을 하여 다른 영지의 지사들과 교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새 시대에 맞는 정치 체제와 사회 변화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막부 타도라는 목표는 실로 너무나 큰 그림이었고, 자신의 번 내에서 주요 중신이나 막부 지지자들을 암살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 등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현재의 막부 체제로서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도저히 응답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개혁 세력과 깊은 유대를 갖게 되지만 적극적인 활동은 자제하고 있었다.

“종기도 완전히 곪아야 바늘로 고름을 빼낼 수 있듯이, 천하를 도모하려면 때를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와중에 료마는 막부 관료인 가쓰 가이슈와 조우하게 되는데 가쓰 가이슈는 료마 일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이슈는 당시 일본인 최초로 막부를 대신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을 준비코자 직접 미국을 시찰하였고 난학(蘭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우물처럼 고인 막부 내에서 가장 진보된 인물이었다. 가이슈는 료마의 인물의 비범함을 파악하고 그에 대하여 물심양면으로 많은 후원을 한다. 특히 료마가 고베에 해군 조련소를 설립하는데 절대적인 지원을 하였다. 후에 훈련 생도 중 탈번 무사의 존왕도막(尊王倒幕) 활동으로 해군조련소는 해체되고 가이슈는 에도 송환과 동시에 군함부교직에서 해임되는 고충을 겪는다.

료마는 해군조련소를 통하여 배운 항해술과 훈련생들을 중심으로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샤추(사쓰마 번의 원조로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나가사키의 가메야마에 세워진 무역회사)를 창설하였고 이는 후에 가이엔타이(海援隊: 사쓰마 번의 자금원조를 받아 설립된 일본 최초의 주식 회사)로 발전한다. 해원대는 문자 그대로 해상에서 지원한다는 뜻으로 일본의 해상을 통한 세계 진출을 그 목적으로 하며, 같은 도사 출신인 나카오카 신타로를 대장으로 한 육원대(陸援隊:육상에서 막부를 타도한다는 조직)와 함께 막부 세력의 해체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19세기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당연히 삿쵸 동맹을 시발로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일본 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메이지 유신이다. 가장 굵직한 역사적 진행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의지와 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삿쵸 동맹이다.

사쓰마와 죠슈의 동맹이 도사출신 료마의 주선으로 맺어진 것이다. 사쓰마와 조슈는 국경을 이웃하고 있고 양 번 간에는 끊임없는 라이벌 의식으로 물과 기름처럼 화합할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으나 료마는 사쓰마의 사이고 다케모리와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에게 영지의 개념과 차원을 넘어서서 일본 나라의 설립을 위한 막부 타도를 기치로 내새워 자신의 인간미와 미래 비전의 제시로 이들을 설득하였다는 것이다.

되풀이하면 당시 지사라 할지라도 새로운 변화를 자신의 나라 즉 자신의 번을 중심으로 이루고자 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그들의 의식을 료마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꿈과 희망으로 새로운 시대 개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삿쵸 동맹은 료마의 출신지인 도사 번까지 연계가 되어 일본 내에서 가장 기질이 강한 영지 간의 화합으로 막부 시대는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대정봉환(大政奉還 : 1867년에 일본 에도 막부가 반막부 세력에 의해 국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사건)은 료마의 진가가 더더욱 빛이 나는 사건이다

삿쵸 동맹 이후 사쓰마와 조슈는 막부에 대항하여 부지런히 서양의 현대식 무기를 사들이고 군사력을 배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 막부와의 결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료마는 막부와의 군사적 대결은 일본 나라의 수립은커녕 중국처럼 열강의 탐욕 속에 빠져들 우려가 다분히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막부는 프랑스 군대로부터 화력과 군함의 지원을 약속받고 있었고, 실제 조슈 번은 영국으로부터 현대식 군사 교육과 무기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었던 바, 막부와의 전쟁은 곧 영국과 프랑스의 대리전의 양상으로 치닫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료마는 한편으로는 사쓰마, 조슈, 도사, 에치젠 번등에게 막부 타도를 위한 의지를 모으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군사적 대비를 해원대와 육원대 등과 함께 철저히 준비하였다. 이 모든 준비는 막부에 대한 군사력 실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정봉환을 위한 협상 및 압박 수단으로 준비하였고, 대정봉환이 수포로 돌아갈 시 실행할 마지막 카드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막부 타도의 대열에 선 영지들은 그 때까지도 전쟁을 불사하고 선봉대에서 공훈을 쌓고자 하는 공명심에 들 떠 전쟁 발발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

료마는 전쟁을 피하고자 새로운 일본의 비전을 선상팔책(船上八策)으로 제시하고 막부에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15대 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받아들이고 일본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 전환기로 박차를 가하게 된다.

후에 막부 세력 잔당의 소요 사태로 보신 전쟁(戊辰戦争: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에도 막부의 세력과 교토 어소에 정치 권력을 반환하기를 요구하는 세력과의 싸움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을 겪게 되기는 하지만, 이미 대세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일본 정부의 수립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정봉환이 가지는 의미를 나는 동학혁명으로 말미암은 청일 전쟁과 비교할 때 내심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동학교도들의 간청에 따라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대하여 일말의 자정 능력이 있었다면 과연 우리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당시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에게 정 2품의 벼슬을 내리고 관운장의 귀신을 모신다는 동묘라는 사당을 숭인동에 짓고, 진령군을 통한 매관매직이 횡행했던 시절에 우리나라의 지사들은 동학혁명으로 그 답을 대신하였다. 결국 청일 전쟁을 불러 오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조선 진출의 도화선이 된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료마는 대정봉환을 앞두고 나가사키에서 출발하는 배에서 선상팔책이라는 새로운 일본 정부의 강령을 만든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되 미국식 민주주의를 접목함으로써 신분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과 상하원의 구성 등을 피력하고 있다.

대정봉환 요구가 도쿠가와 요시노부로부터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료마는 일본 정부의 각료 구성과 선임 안까지 완료함으로써 메이지 유신의 실제적인 초석을 단단히 다진다.


“ 다 이루었도다”

1867년 11월 15일 그는 교토의 한 숙소에서 육원대 대장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자객의 급습에 피살당한다.

작가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에는 뜻이 있다.

이 젊은이의 경우,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도리가 없다.

하늘은 이 나라의 어지러운 역사를 수습하기 위해 이 젊은이를 지상에 내려 보냈다가 그 사명이 끝나자 아낌없이 하늘로 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 P.S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메이지 유신이후 주요직을 차지하고 남작이나 백작 등의 귀족으로 남게 된다.

그 중에서 나에게 인상적인 인물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토 슌스케라는 인물이다.

조슈 출신으로서 삿쵸 동맹 이후 료마의 주선에 따라 사쓰마의 이름으로 무기를 구매하여 막부의 눈을 피해 조슈로 밀반입하는 데 크게 기여를 한다. 그 외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인물인데 이는 바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이다.


또 한 사람은 이와사키 야타로이다.

료마와 같은 도사 번 출신인데 야타로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 지역에서 최고의 욕쟁이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술주정으로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에도 유학 중에 급히 도사로 귀향하는데 통상 30일 정도 소요되는 거리를 15일 만에 당도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투옥된 감옥 앞에서 소위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써서 시위하다가 그 또한 감방 생활을 하게 된다.

감방 생활 동안 다른 수감자를 만나 산술(算術)을 배우는데 남들이 2년 걸릴 것을 한 달 만에 터득했다고 한다. 후에 야타로는 료마 암살을 기도하는 특수 조직에 가입하기도 하고 숫자에 밝은 재주로 도사 번의 회계 담당 공직으로 발탁되기도 하는데 사카모토 료마와는 기질이 달라 같은 도사 출신이면서도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료마의 꿈은 일본 나라의 수립에 있었고 야타로는 상업과 사업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돈 되는 일이면 다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고 전쟁을 통하여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는 미츠비시 그룹의 창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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